자신의 자리 찾아가기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자기 내면의 깊은 욕망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어쩌면 남에게 이야기하기 부끄러운 것일 수도 있다.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 ‘모두에게 사랑 받고 싶다’ ‘아름답고 멋진 이성들에게 인기를 얻고 싶다’ ‘독보적으로 뛰어난 존재가 되고 싶다’ ‘타인을 지배하고 싶다’ 등등.
여기에 더해 자신의 성향, 능력, 성격, 주어진 조건 등등을 인정하면서 자기 욕망의 일부를 타협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 과정은 사회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는 것과도 관련 있다. 다들 자기 자신을 알기 어렵다고 말하지만, 실은 대부분 자신의 욕망은 잘 알고 있다. 다만 그 욕망을 현실에서 실현할 때 부딪히는 장애물들이 많아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타협해야 하는지, 무엇을 고집해야 할 지 혼란에 빠지기 쉬울 뿐이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결국 사회 속에서의 마찰을 통해 자기 위치를 찾아가는 과정까지를 의미한다.
그동안 알게된 친구들 중 많은 친구들이 사회적으로 꽤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중 두 명의 케이스가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한 명은 사업가로서 대단히 크게 성공했다. 업계에서는 거의 입지전적이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성공했다. 일단 사업을 통해 업계 평균 수준과 비교해서 엄청난 돈을 벌었다. 그런데 이 친구는 조금 특이한 구석이 있다. 일단, 거짓말과 허풍이 너무 심하다. 가끔 대화를 하다보면 과연 내가 누구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잊을 정도로 이 친구의 말은 신뢰가 가지 않는다. 마치 완벽히 꾸며진 세상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이란 느낌마저 들었다. 그와 동시에 이 친구는 물질적인 욕망이 무척 컸다. 이 친구는 그 욕망으로 인해 사기도 몇 번 당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 뿐 아니라 이 친구에게선 때로 사람을 너무 도구화시켜 생각한다는 인상도 받았다. 이 친구가 자기 사업체 직원이나 고객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가끔 기분이 나빠지곤 했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 친구의 그런 물질적인 욕망, 허풍과 거짓말을 좋아하는 성향, 사람들을 도구로 여기는 성향 등등은 모두 이 친구가 크게 성공하는데 기여를 한 것 같다. 경쟁이 치열한 사업의 세계에서 경쟁자를 물리치고 업계 탑을 찍기 위해서는 그만큼 비인간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결단력과 보통 사람들은 갖기 힘들만큼 엄청난 물질적 욕망이 있어야 한다. 그 친구는 물론 능력이 뛰어난 친구지만, 그 능력은 바로 그런 강렬한 욕망과 특이한 성향과 합쳐져야만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인간 세계는 조금만 위로 올라가면 서로를 죽고 죽이는 전쟁터와 다름 없는 곳이니까.
또 한 명은 학자로 크게 성공한 경우다. 이 친구는 명문대 교수가 되었고, 매우 높은 수준의 연구 실적을 쌓을 수 있었다. 보통 학계에 진출한 사람들은 대개 지도교수의 말을 잘 따르고, 별로 튀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자기가 하고 싶은 연구는 일정 수준 이상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뒤로 미룬다. 하지만 이 친구는 처음부터 자신이 원하는 연구에 초점을 맞췄고, 지도교수가 지시하는 방침도 따르지 않았다. 오로지 자기 연구가 최우선인 사람이었다.
그 결과 중간 중간 꽤 먼 길을 돌아야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자기가 원하는 분야에서 원하는 연구를 하며 실적도 우수한 교수가 될 수 있었다. 남과 다른 방식으로 혼자 튀는 길을 걸으며 주변의 공격도 많이 받았지만,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룬 셈이다.
다만 이 친구 역시 많이 특이하다. 가끔은 짜증이 날 정도로 집요한 구석이 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별 것 아닌 문제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집요하게 파고들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과 자주 갈등을 빚곤 했다. 또한 자기 생각이 가장 옳다는 믿음에 빠져있는 듯 했고, 자신이 가장 중요한 사람이고 싶다는 욕망을 거침없이 내보이곤 했다. 그런 그 친구가 가끔은 무척 불편했다.
앞의 친구와 마찬가지로, 이 친구를 그렇게 훌륭한 교수로 성장시켰던 것은 이 친구가 가진 기이할 정도의 집요함, 그리고 남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강력한 욕망이었다. 누구나 어느 정도는 집요함과 함께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을 가질 수 있겠지만, 아마 왠만한 사람도 이 친구만큼은 아닐 거다. 옆에만 있어도 그 기운이 강렬하게 느껴질 정도니까. 그런 집요함과 욕망은 이 친구가 끝까지 자기 꿈을 포기하지 않고 달려가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고, 그 친구의 연구 능력과 결합해 그 친구를 결국 성공의 반열에 올릴 수 있었다.
현실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잘 타협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다지 욕망이 강하지도 않고, 뭘 꼭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은 허무하다고 느끼며, 그냥 가족들 친구들 지인들과 그 날 그 날 잘 지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평범한 사람들은 욕망이 강하고 특이한 사람보다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별다른 충돌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행복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타인과의 원만한 인간관계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연구 결과다. 다만 그런 ‘평범한 사람’들은 대부분 사회적으로 성공하기가 쉽지 않다. 이유는 간단하다. 늘 사회적 성공의 자리는 한정되어 있고,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자신의 일상을 포기하고 오로지 일에만 집중할만큼 강렬한 욕망과 특이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충분히 많이 있으니까. 설렁설렁 인생을 평범하게 일상의 행복을 누리며 잔잔하게 사는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성공할 욕심을 갖는다면 그것은 어쩌면 과욕일지도 모른다.
실은 불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소소한 일상의 작은 즐거움에 쉽게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에게 얼마 안되는 사회적 성공이라는 자리까지 넘겨 주는 것은 말이다. 강렬한 욕망과 특이한 성향을 가진 사람은 보통의 사람들보다 행복을 느끼기 쉽지 않다. 자기 자신을 깎아먹으면서까지 엄청난 노력과 고생을 하고 많은 시간을 투입해야 얻을 수 있는 사회적 성공이란 자리를 얻어야만 비로소 만족의 감정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사람들이 직장에서 상사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직장 조직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 직장을 만들고 운영하는 주체들 - 기업가, 정치인, 기타 사회적 지도층 등등 - 이 그만큼 특이하고 강력한 욕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아래 사람들에게 비인간적일만큼 무리한 일을 시킨다.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다. 기업가, 정치인, 사회적 지도층들은 그렇게 살아왔다. 그렇게 살아야 자신의 욕망을 이룰 수 있다고 믿고 있고, 또한 그렇게 해야 전쟁과도 같은 이 세상 속에서 자신이 이끄는 조직이 살아남는다는 것도 알기 때문이다. 왜냐면 현실 세계에서는 자신들만큼 강력한 욕망과 특이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사회의 상층을 형성해서 세상을 이끌고 있으니까. 결과적으로 그런 그들의 특이하고 강렬한 욕망이 오늘날 살아남은 국가들과 조직들을 존재하게 만든 일등 공신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다들 남의 일처럼 여기지만, 우리나라의 경제력이 침체되고 나라가 기울면 우리에게도 전쟁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우리가 경제 성장을 멈추고 하강을 시작하는 순간 우리나라의 국방비 지출은 큰 폭으로 줄어들게 된다. 국방비 감소는 이웃 나라 - 중국, 일본, 북한 등 - 가 우리를 침략할 기회를 만든다. 세상은 결코 평화로운 곳이 아니다. 우리가 미국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경제 성장과 우리의 위치가 미국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다면 아래 사람들을 닥달하고 비인간적인 업무를 강요하는 소위 윗사람들의 말은 무조건 들어야 하는가? 자본주의 초기 사회였던 영국, 식민지 건설로 인해 세계대전에 휩싸인 유럽을 보면 그렇다고 볼 수도 없다. 독재체제와 공산주의, 군사정권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봤는지를 떠올려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 소수 엘리트들만 따르자면 세계는 끝없는 지옥으로 갈 뿐이다.
그래서 정치에서도 균형이 필요하다. 극우, 보수, 진보, 극좌, 중도… 모두가 필요하다. 그것은 다양성과도 관련 있다. 사람들은 극우와 극좌파를 보며 욕하고 그들은 서로를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적으로 여기지만, 단언컨데 극우나 극좌가 사라지는 날은 인류가 멸망하는 날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 메커니즘을 자세히 기술할 수는 없다. 다만 인간종을 이제까지 생존하게 만든 다양성이 끝나는 날이기 때문이라고 해두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자기 자신을 아는 것, 자기 욕망을 아는것, 자기가 처한 상황, 자신이 가진 조건을 아는 것은 인생을 사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런 자신의 모습으로 살 때 이 사회 속에서 최적의 삶을 살기 위해 어느 위치에 서서 어느 것을 견딜 것인가에 대해서도 치열하게 고민하고 싸워야 한다.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산다는 것은 그 모든 과정을 포함한다. 그것이 싫다면, 모 티비 프로그램에 나온 사람들처럼 자연을 찾아 홀로 산 속에 들어가 자급자족하는 삶을 택할 수도 있다. 아니, 그 사람들 역시 그 모든 과정을 거친 후 도저히 사회와 부대끼며 살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은 후에 그런 선택을 한 것일 수 있다. 그들 역시 진심으로 자기 자신을 알고 그에 맞게 사는 사람들 중 하나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을 누리며 힘들이지 않고 적당히 사는 것은 매우 행복한 삶이다. 실은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이 누리는 삶이기도 하다. 그런데 거기서 욕심을 부리면 삶이 괴로워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살면서 남의 명령을 받지 않고 자기 멋대로 편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당연히 돈을 벌기 위해 내가 싫지만 남이 원하는 일을 지시 받으면서 해야 하고, 어느 정도 자산을 모으면 그 자산을 유지하기 위해 또다시 노력을 해야 한다.
내게 재능이 있어도, 머리가 좋아도, 남보다 특수하게 잘하는 무엇인가가 있어도, 나를 괴롭게 할만큼 강렬한 욕망과 남들과 다른 특이한 점이 없으면 남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없다. 그 부분은 인정해야 한다. 그런 강렬한 욕망과 특이한 점이 없는 덕분에 쉽게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거다.
자기 인생에 당장 만족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지금의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자기가 가진 모든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면 된다. 다만 남보다 더 뛰어나거나 더 많은 것을 얻어야 한다는 욕심은 버려야 한다. 그리고 일 때문에 가끔씩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당연한 거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면, 지금의 삶이 괴로워져도 된다는 각오를 가져야 한다. 어쩌면 채우기 힘든 더 큰 욕망을 가져야 하고, 다른 사람과 유리될만큼 특이한 생각과 행동을 과감히 해야 한다. 그것이 스스로를 외롭게 만들지라도 말이다. 그렇게 해서 자기 자신의 삶을 바꾸기 위해 장기간 스스로를 갉아먹을 정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더 나이가 들게되면, 어쩌면 평범한 사람들이나 더 큰 욕망을 갖고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사람이나 모두 비슷해질지도 모른다. 죽을 때가 다가올수록 삶이 얼마나 허무한지, 이룬다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 모두가 깨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리부터 그런 상황을 가정하고 지금부터 전부 내려놓을 필요도 없다. 그건 마치 어차피 죽을 거 맛있는 밥을 뭐하러 먹느냐는 말과 같다. 정답은 없고, 선택만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