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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이 모든 것이 처음이다

인생은 미리 연습 이런거 없다

by rextoys

요즘 개인의 깊은 속마음을 다루는 방송이 많다. 이런 방송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부분이 바로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생긴 결핍에 대한 내용이다. 부모가 충분한 사랑을 주지 못해서, 부모가 좋은 양육 환경을 제공하지 않아서 나에게 결핍이 생겼다는 이야기들. 그런 이야기들이 한 개인의 상처를 다루는 데 있어 중요하게 살펴봐야 할 과거 사실인 것은 맞다.


하지만 알고보면 이 땅위의 모든 부모들에게 출산과 양육은 모두 처음이었다. 첫째를 낳은 어머니 그 누구도 예비 출산 시뮬레이션 코스웍을 거치지 않았다. 아이를 낳는 것은 그녀가 처음 겪는 일이었다. 둘째를 낳을 때는 좀 익숙할 수 있지만, 사실 둘째를 낳을때의 자기 몸의 반응, 두 번째 출산을 할 때 느껴지는 온갖 종류의 감각적 경험도 역시 처음일 수밖에 없다.


아이를 키우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 어떤 부모들도 미리 학생때 몇 년동안의 양육 코스웍 교육 따위를 받은 적이 없다. 게다가 세상 모든 아이들은 모두 서로 다른 유전자와 기질을 갖고 태어난다. 부모들은 그렇게 서로 다르게 태어난 아이들을 각자 처음으로 키워본다. 어떻게 키워야 할지 물론 이론이 가득하지만, 세상에 이론대로 되는 것은 거의 없다는 것 역시 엄연한 사실이다.


부모가 키우는 아이는 매일, 매년 처음 보는 모습으로 성장한다. 그 누구도 아이가 일 년 후 정확히 어떤 모습일지, 무엇에 관심을 갖고 어떤 것을 하고 싶어할지 예측하기 어렵다. 그런데 부모 역시 마찬가지다. 부모 나이가 서른이라면, 서른이라는 나이는 그 부모가 처음 겪는 나이다. 서른 다섯일때, 마흔일때, 부모는 처음으로 그 나이를 경험한다. 각각의 나이를 먹었을때마다 나타나는 신체적 변화와 몸의 호르몬 변화 등등은 부모 본인들에게도 매우 낯선 경험이다. 물론 여기에 대한 이야기들을 주위 사람들로부터 수도 없이 들었겠지만, 해당 나이가 되보기 전에는 끝까지 알 수 없는 감각적 경험들이 가득하다.


바깥 세상은 어떨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오늘 하루는 인류 역사상 처음 겪어보는 하루다. 내일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하물며 한 달, 일 년 후를 예측한다? 그런 예측을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부지기수로 많지만, 그들 중 누구의 말이 맞을지도 알 수 없거니와, 혹 큰 그림에서 맞추는 사람이 있다 해도 그가 이 세상 전부의 미래를 세세하게 예측했을리는 없다.


우리는 이처럼 매일 새로운 하루를 겪지만, 매일 모든 것을 낯설게 느끼면 우리의 뇌신경은 과부하가 걸리고 만다. 그래서 우리의 뇌는 적당히 과거의 기억과 교육받은 내용을 바탕으로, 현재가 고정되어 있고 미래도 대충 예측 가능한 것처럼 맘 편하게 생각해 버린다. 한동안은 그런 식의 생각이 현실에 잘 적용이 된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자신이 겪는 현실이 머리 속에서 인식한 현실과 크게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세상의 변화가 클수록, 일상의 변화가 클수록 그 간극은 점점 커지는데, 이로 인해 어딘지 모르게 불안감, 인지부조화와 같은 불편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런 세상에서 부모는 아이를 키우며 쉽게 불안해지고, 힘들어할 수 있다.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상황에 여러번 마주칠 수도 있다. 지극히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로 인해 아이에게 소홀히 할수도 있다. 그 때문에 아이에게 결핍이 생기고, 상처가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부모가 못나서가 아니라, 부모 모두 그저 불완전한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일 뿐이다.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 정확히는 우리 뇌가 편하게 있고 싶어하느라 -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우리 자신도 계속해서 변한다. 새로운 사회적 갈등이 발생할 때, 가만히 보면 갈등의 주체들 모두 허공에 대고 헛발질을 하는 꼴을 연출하곤 한다. 서로가 서로를 때리지만, 갈등의 원인은 갈등 관계에 있는 그 누구에게서도 찾기 힘들다. 정치적 지지가 다른 사람들, 페미니즘과 반페미니즘, 세대간 갈등, 빈부 갈등 모두 그런 속성을 갖고 있다. 갈등의 원인은 각자가 공격하는 상대방에게 있지 않다. 그냥 세상이 변했지만 법과 제도, 사람들이 빠르게 거기에 적응하지 못한데에 진짜 원인이 있다.


주변 사람들과의 개인적인 갈등도 마찬가지다. 오래 알면서 우정을 주고 받았던 친구가 갑자기 변한 것은 그 친구가 잘못해서가 아니다. 누구도 밝혀내기 힘든 무슨 문제인가가 그 사이에 생긴거다. 그 문제는 어쩌면 이 세상의 거대한 변화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걸 개인에게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치는지 그 메커니즘을 쉽게 밝혀내지 못할 뿐이다.


부모든 친구든 지인이든 누구든 과거의 실수를 짚으며 비난하고 공격하는 것은 그래서 좀 치사하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 카카오톡에 실수로 남긴 과거의 말실수를 현재 시점에서 꼬투리 잡아 계속 비난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실수를 비난하고 싶으면, 차라리 지금 당장의 말과 행동을 비난하는 것이 그나마 합리적이다. 그런데 지금 당장의 말과 행동이 과연 실수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그 결과를 미리 알아야 한다. 결국 미래에 가서 결과를 보고 올 수 있는 사람에게만 현재의 누군가를 비난할 자격이 주어지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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