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를 키워 믿을만한 녀석으로 바꾸기
평생을 가족, 친구, 혹은 친한 지인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도, 누구나 언젠가는 극심한 고독과 외로움을 맞닥뜨릴 수 있다. 이는 < 인생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것 > 이라는 지극히 단순하고도 명료한 진리와 마주한 순간에 찾아온다. 우리는 학창시절을 지나 스무살이 되면 성인이 되고 직장에서 돈을 벌기 시작하면, 결혼하면, 아이를 낳으면 진정한 어른이 된다고 알고 있지만, 우리의 몸은 그런 사회적 시간표를 따르지 않는다. 어떤 이는 늙어가는 어른의 몸에 갇힌 아이의 마음으로 사느라 힘겨워할 수도 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독립된 자아로 살 준비를 갖춘다는 의미와 같다. 자기 인생이 그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자기만의 고유한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 타인의 욕망과 내 욕망이 다르다는 것, 누군가의 인정과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에서 벗어나는 것, 이것이 곧 어른이 된다는 말의 의미다. 결국 홀로서기를 뜻한다. 홀로서기가 되어야 비로소 스스로 자신을 만족시킬 줄 아는 삶이 시작된다.
누구나 자기 내부에 초라하고 연약한 자아를 갖고 있다. 그 자아는 나와 동일시되기도 하지만 때로 분리되어 제3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자신의 초라한 자아가 성장하기 위해선 그 초라한 자아의 욕구를 채워주고 그 녀석이 진심으로 바라는 것들을 해줘야 한다. 대개는 부모나 주위 어른이 그 역할을 하게 되지만, 운이 나빠 그런 경험을 하지 못한 채로 자란다면, 몸은 성장하나 내면의 초라한 자아는 성장하지 않은 상태로 머무르게 된다.
이 초라한 자아는 자기 자신이기도 하고, 나를 평가해주고 인정해줄 제3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내가 느끼기에 이 녀석이 너무 초라하기 때문에, 나는 다른 데서 인정과 평가를 갈구하기 시작한다. 더 대단해보이고, 더 잘난 사람이 나를 인정해주고 좋게 평가해주길 바란다. 그렇게 타인의 인정욕구를 원동력으로 삼아 한동안은 그런대로 삶을 유지해 나간다. 그 과정에서 타인의 욕망, 사회적 인정이 더 중요한 요소가 되기 때문에 오히려 사회적 성취 면에선 이득일 수 있다. 타인의 욕망을 채워준다는 것은 곧 연인과 배우자의 욕망을 위해 산다는 의미도 되고 주변 친구와 지인들, 직장 사람들의 욕망을 위해 산다는 의미도 되기 때문에 꽤 좋은 평가를 받으며 살 수 있다.
하지만 그 사이에 나의 초라한 자아는 전혀 성장하지 못한다. 오히려 몸이 늙어가며 더욱 쇠퇴해질 수도 있다. 나이 들어 어느 순간 더이상 타인의 인정과 평가가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자신의 삶에 회의감과 공허감이 느껴진다. 그 순간, 비로소 자기 내면의 초라한 자아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 초라한 녀석은 뭐였지...? 아, 내가 별볼일 없다고 여긴 녀석이구만. 늘 이런 녀석따위에게 인정받고 싶진 않았지. 딱 봐도 초라하고 볼품 없으니까.'
그런데 어딘가 이상하다. 이 초라한 녀석은 실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하나의 길은 그냥 원래 살던대로 계속해서 타인의 인정과 평가를 갈구하며 사는 길이다. 또 하나의 길은...바로 홀로서기를 위한 여정의 길이다.
초라한 내 자아를 잘 들여다보면, 그 녀석이 간절히 원하는 것, 마음 깊이 갈구하는 욕구가 있다. 그런 것들이 내가 이때까지 추구해왔던 것들과 너무 달라서 놀랄 수도 있다. 나는 분명 물질적인 가치 - 명품, 외제차, 좋은 집 등등 - 가 내가 원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 초라한 자아 녀석은 전혀 아닌 것 같다. 이 녀석은 정말 별 거 아니라 생각했던 것을 좋아한다. 남들과의 따뜻한 감정 교류, 특정 학문에 대해 깊이 파고들어 앎의 영역을 넓히는 것, 어떤 기술에 완전히 숙달하는 것,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 등등. 주변 사람에게 인기를 얻고 인정을 받는 것을 원하는 줄 알았는데, 내가 인정받고 싶은 사람은 내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다른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 때의 인정이란 것도 알고보면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 생각, 아이디어를 공감 받는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고.
이 과정에서 자신의 바로 그 초라한 자아를 만족시켜주기 위해서는, 그렇게 엄청난 자원이나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된다. 다만 지금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노력이 필요한데 - 그런 노력이란 내가 여태껏 귀찮아 하고 쓸데없다고 여겼던 것들, 즉 지루한 공부나 여러 종류의 배움, 운동 등이거나 자존심 상할 일들 - 남들에게 내가 먼저 다가가고 마음을 여는 것 등이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그렇게 조금씩 자신의 초라한 자아를 만족시켜본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면 그 녀석이 어느새 훌쩍 성장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알던 그 볼품 없는 녀석은 사라지고, 웬 믿음직한 녀석이 눈 앞에 우뚝 서 있다. 점점 더 재미를 붙여 자기 자아를 키우다보면, 어느새 그 녀석은 내가 진심으로 대단하다고 느낄 정도로 크게 자라 있다.
그제서야 깨닫는다. 이제는 타인의 인정을 갈구할 필요 없어졌다는 것을. 나를 인정해주는 더욱 믿음직스러운 녀석 - 바로 내가 키운 나 자신이라는 그 녀석 - 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 때부터는 인간관계도 편안해진다. 누가 날 배신하든 뒷통수를 치든 속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내가 믿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내 편이 내 안에 있으니까.
자기 자아가 탄탄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알아본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따르기 시작한다. 하지만 의존하진 않는다. 보통 의존성 높은 사람이 똑같이 의존성 높은 사람에게 의존하게 된다. 의존성 높은 사람은 자아가 탄탄한 사람에게 의존할 수 없다는 것을 금새 알아챈다. 자신과 다른 세계를 산다는 것을 느낀다. 자아가 탄탄한 사람을 따르는 사람들은 의존성에서 벗어나 홀로서기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유유상종의 원리는 여기에도 적용된다. 인간 관계는 정교한 과학이다. 한 치의 어긋남도 있을 수 없다.
내가 만약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했다거나, 속았다거나, 누가 내 뒤통수를 쳤다고 느낀다면 - 그래서 내 인생이 망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일단, 사실은 사실이다. 홀로서기에 실패해 의존적인 사람은 똑같이 의존적인 사람을 속이고, 배신하고, 뒤통수 친다. 그래서 피해자라는 사실 자체가 변하진 않는다. 아마 법적으로 따져봐도 피해자일 수 있다. 그러나 피해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 뿐이다.
홀로서기에 성공하고 나면, 이제껏 자기가 추구했던 것과 전혀 다른 것을 추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간 살면서 내가 중요하다고 여긴 것엔 더이상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타인의 인정과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이제는 내가 진심으로 추구하는 욕망을 알게 되고, 나 자신에게 인정받기 위해, 스스로를 만족시키기 위해 살 방법을 찾게 된다. 분명 홀로 - 서 있는데, 더이상 외롭지 않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외로웠는데.. 신기하다고 느낀다.
외로움, 고독이란 감정은 결국..혼자 있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단지 내가 나를 만족시키지 않고 있을때 내 몸이 외치는 절규였음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