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느낌은 생존의 문제

by rextoys

잠시 원시시대로 돌아가보자. 넓은 초원이 펼쳐진 가운데 오렌지와 포도, 밤송이 같은 과일들이 매달려 있는 나무들도 풍성하다. 여기, '센스' 란 이름을 가진 원시인과 '굼든이' 라는 이름을 가진 원시인이 있다. '센스'라는 녀석은 무척 예민하다. 설명할 수 없는 느낌들이 계속 머리 속에 떠오르는 능력을 갖고 있다. '굼든이'는 오감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한다. 눈치도 없고 직감 능력도 없이 그저 느긋할 뿐이다.


센스와 굼든이는 나무 열매를 채집하러 돌아다닌다. 그들 앞에 주렁주렁 과일들이 매달린 나무들이 나타났다. 나무 위로 올라가 따기만 하면 그만이다. 굼든이는 서둘러 나무로 향한다. 바로 그 때, 센스가 굼든이를 저지한다. "뭔가 이상해."


굼든이는 뭐가 이상하냐며 센스의 말을 무시하고 나무 위로 오른다. 센스는 그런 굼든이를 두고 이상한 느낌을 피해 좀 더 편안한 느낌이 드는 곳을 향해 떠난다. 센스가 떠난 후.. 과일나무 주위에 숨어있던 맹수들이 슬쩍슬쩍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과일 채취에 여념이 없는 굼든이를 향해 한 걸음씩 발을 옮긴다...


그동안 중요하게 고려하기엔 그저 사치스러운 것으로 여겼던 < 느낌 >. 그런데 최근 뇌과학과 진화심리학에서는 이 '느낌'이란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어쩌면 '느낌'이라는 것은 우리 조상들의 생존을 확보할 수 있었던 진화적 응축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위 사례처럼 느낌 하나로 생존이 갈릴 수 있었던 상황을 상상해보면, 오감 외의 직감을 느낄 능력이 없었던 굼든이는 결국 자손을 남기지 못했을테고, 우리 인류는 모두 직감 능력이 발달한 센스의 자손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아니 그런데 지금이 원시시대도 아니고, 그 시절에나 통하던 그런 직감 능력이 현대에 와서 뭐가 중요하겠느냐고?


"잘은 모르겠는게, 그 사람 뭔가 느낌이 이상했어."

그 느낌을 알아채지 못했다면, 알고보니 싸이코패스였던 그 사람에게 언젠가 살해당할 수도 있다. 과거보다 지금 세상이 비교할 수 없을만큼 안전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인적 드문 스산한 지역에서의 묻지마 폭행 및 살인 사건은 꾸준히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그 뿐인가?


사기꾼에게 거액의 사기를 당하는 순간을 떠올려 본 피해자들은, 그 순간 뭔가 이상한 낌새를 차렸지만 무시했던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곤 한다. 평소 느낌의 중요성을 인지했더라면, 향후 그 사람의 인생의 방향을 가를 정도의 큰 사기 피해도 막을 수 있었을거다.


느낌은 우리 의식 하부에서 만들어져 올라온다. 뇌에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지만 자체적으로 수없이 많은 데이터를 검색 및 처리한 후 결론을 내려 느낌이라는 형식으로 포장해 올리는 메커니즘이 존재하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느낌을 받을때, 그 느낌이 어떤 과정을 통해 생성된 것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아무리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불가능할 수 있다. 의식과 분리되어 처리되는 것들도 많기 때문이다.


느낌은 실제로 우리 의식 수준에서 따지고 계산한 결과보다 우리 미래를 결정하는 데 있어 더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다. 친구나 연인을 만나고 배우자를 결정하거나 진로와 직장을 결정할 때 수많은 고민 끝에 내린 결정 보다 그냥 마음 속 느낌을 따라가는 것이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더 적합한 미래로 이끌 수 있다는 거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적합한 미래' 라는 것은 물질적, 경제적, 사회적 기준에서 더 좋은 결과는 아닐 수 있다. 인간의 유전자는 현대 문명과 사회를 인지할 만큼 진화하진 못했으니까. 다만 마음의 관점에서 좀 더 편안하고, 좀 더 만족스러운 길로 이끈다는 의미에 더 가깝다고 하겠다.


느낌대로 따라간다면 아무것도 하기 싫은데 어떡하냐고? 그럼 지금은 모든 것을 놓고 집에서 계속 쉬는 것이 설명할 수 없는 몸과 정신의 무언가를 충전하기 위해 꼭 필요한 상황일 수도 있다. 사람이 집에만 있지 말고 나가서 뭐든 해야 한다는 말은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이 아니니까. 혹 지금 왜인지 모르게 어딘가 쑤시고 우울하고 괴롭다면, 그리고 그 이유를 모른다면, 마냥 집에서 쉬어야 할 때 쉬지 못해서인 것이 진짜 이유일지 모른다. 경제적 어려움을 감수하고 그렇게 쉴지 아닐지에 대해서는 물론 그 누구도 어떻게 해줄 수 없는 본인만의 문제로 남겠지만.


어떤 것을 '좋아한다' 라는 느낌은 의식으로도 느끼는 것들이다. '저 음식이 맛있어 보인다' '저 사람이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이런 느낌은 애초에 고민할 필요가 없는 느낌들이다. 중요하게 따져봐야 할 부분은 바로 '뭔가 쎄한' 느낌이다.


'뭔가 쎄한' 느낌은 그냥 나오는 게 아니다. 우리 뇌의 하부 깊숙한 곳에서 수많은 데이터를 돌려본 후 나온 강력한 예측이다. 이 느낌을 무시하면 큰 코 다친다. 그런데 그 큰 코를 어떤 식으로 언제 다칠지 알 수 없다. 세상의 인과관계는 때로 분석의 수준을 넘어선다. 쎄하지만 이득이 되는 결정을 했을때, 실제로 계산대로 이득을 계속 보고 있을 수도 있다. 이득은 계속 보는데 어딘가 보이지 않는 감정적 손해를 끊임없이 받으면서 그로 인한 공허감과 외로움, 우울감이 축적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 역시 쉽지 않다.


어떤 일을 추진할때, 여러 사람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고 책임 의식이 느껴질수록 아무리 '쎄한 느낌'이 들어도 그 순간 일을 멈추고 포기하기가 쉽지 않다. 그로 인해 주변인들에 대한 개인적 명성에 큰 손해를 입거나 커다란 경제적 피해를 입을지 모른다는 압박감이 들면 더욱 그렇다. 헌데 이는 집안 사람들 모두가 바라는 결혼으로 본인만 빼고 모두가 이익을 본 후 끝에 가서 결국 불행한 이혼으로 끝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누구에게나 불운은 찾아오고 인생에 한 번은 피해를 입어야 한다면, 복구 가능한 피해 수준으로 끝내는게 그나마 낫다.

개인적으로 돌이켜 보면...다른건 몰라도 특히 진로와 직업, 사람 관련해서는 '쎄한 느낌' 만큼 정확한 게 없었던 것 같다. 아직도 설명이 안되는 것들이 많지만.. 느낌, 특히 '쎄한 느낌'이라는 녀석이 얼마나 중요한 삶의 동반자인지 아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것...

keyword
작가의 이전글소득 수준과 행복 사이 관계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