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 할머니를 따라 종종 작은 이모네 놀러가곤 했다. 서울에 있던 우리집에서 안양 이모댁으로 갈 땐 버스를 이용했는데, 이모댁으로 가는 버스엔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전체가 분홍색으로 칠해져 있고 후면 라이트가 콩알만한 버스였다. 또 한 버스는 군데군데 은색으로 칠해져 있고 그 은색면에 서너 개의 줄이 길게 그어져 있는 버스로, 후면 라이트가 꽤 컸다. 나는 은색 버스를 ‘뒤로 가는 버스’ 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언젠가 은색 버스에서 내려 그 버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버스가 갑자기 후면 라이트를 키며 후진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모댁에 갈 때마다 할머니에게 꼭 ‘뒤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자고 칭얼거렸다. 할머니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시면서 ‘응 그래 그래’ 하셨지만 대부분 할머니는 분홍 버스를 타셨다. 언젠가는 울면서 ‘뒤로 가는 버스’를 꼭 타야 한다고 악을 썼지만 할머니는 여전히 분홍 버스에 나를 억지로 끌고 태우셨다. 할머니는 분명 ‘대체 뒤로 가는 버스를 타자는게 무슨 말이여?’ 하고 황당해 하셨으리라.
한참 시간이 지난 후 성인이 되고 나서 그 때의 기억이 떠올라서야 나는 알게 되었다. 분홍 버스는 그냥 시내 버스, 은색 버스는 좌석 버스 였다는 것을..털털털 거리고 앉기도 힘든 시내 버스를 타다가 어쩌다 한 번 좌석 버스를 타서 편안히 앉아 간적이 있는데, 그 때의 그 편안한 느낌이 너무 좋았나 보다. 그 좌석 버스가 왜 후진했는진 모르겠다만 (종점이었나?) 나는 그 당시 시내 버스는 너무 후져서 후진도 못하지만 좌석 버스는 후진을 할만큼 발달한 차였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어릴때 나는 버스와 같은 큰 차에 관심이 많았다. 집에 있던 책들을 보다가 우연히 자동차와 관련된 책을 보게 되었는데, 그 속엔 외국의 버스나 트럭, 전차와 탱크의 사진들이 가득했다. 사진 속 큰 차들을 운전하는 상상을 하며 시간을 보낼 때도 많았다. 세계에서 가장 긴 트럭이었나? 하여간 굉장히 긴 트럭 사진이 있었는데 그 트럭을 운전하다가 핸들을 꺾으면 어떻게 움직일까, 옆에 안부딪히고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뭐 이딴 고민을 한참동안 하기도 했다.
버스를 타면 꼭 앞자리에 앉아 버스 운전사들이 운전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곤 했다. 핸들을 시원시원하게 돌려도 차가 옆으로는 조금씩만 움직인다는 사실이 참 신기했다. 그러다 아버지가 운전하는 작은 차를 보면 너무 실망스러웠다. 작은 차는 핸들 돌리는 것도 별로 멋있지도 않고.. 안에도 좁아서 멀미 나기 일쑤였고.. 여러모로 불편했다.
나이가 들어 성인이 되어서도 승용차에는 별 관심이 안생겼다. 대학시절에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차는 버스와 지하철, 기차였다. 사람들이 북적대는 것도 좋았지만, 혹 차량 내부에 사람이 없으면 그 넓은 공간을 나혼자 쓰는 것 같아 괜히 기분이 업되곤 했다.
지인들 중 외제차를 산 사람들이 꽤 많지만, 그들이 자기 차 자랑을 할 때면 나는 대체 어떤 포인트에서 리액션을 보여줘야 할 지 난감했는데, 난 대체 눈 앞의 이 차들이 다른 차들과 뭐가 다르고 뭐가 좋은지 도무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차는 다음의 두 가지다.
1) 타고 있지 않은 차
2) 목표 지점까지 더 빨리 갈 수 있는 차
1)과 2)는 비슷한 소리다. 나에게 차라는 것은 A 포인트에서 B 포인트까지 최대한 빨리 갈 수 있는 어떤 수단이고 (2) 목표 지점에 빨리 도착할 수록 차를 타고 있지 않은 상황 (1)에 더 빨리 도달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차를 좋아하는 친구가 자기가 산 차들 이야기를 하면서 신나게 차 이야기를 하는 걸 들어준 적이 있다. BMW는 좀 가벼운 느낌이고 아우디는 완전 쉣이며 역시 벤츠가 제일 좋다는 둥 소음기 떼니까 스포츠카 같다는 둥 차 안에 우퍼가 빵빵해서 어쩌고..
나는 최대한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전혀 흥미가 안가는 것에 관심을 가지려 노력하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차에 우퍼가 있는게 좋나? 그냥 내려서 들으면 안되나? 뭐 어쩔 수 없이 운전으로 먹고 사는 택시 기사나 트럭 운전수라면 모를까…
실은 또래들 모두 차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나는 차에 대해 내가 잘 모르는 흥미 포인트가 따로 숨어 있었나? 싶어 차에 관련된 정보들을 검색해 보기도 했다.
그런데 이게 어떤 느낌이냐면.. 여름에 공원에서 잠자리를 잡고 노는 아이들이 자기가 잡은 잠자리가 얼마나 대단한지 서로 자랑하며.. 색깔이 하얗고 빨갛고… 뭐 크기가 크네 작네 말하는 내용을 멍하니 듣고 있는 느낌? 저게 대체 왜 중요하지? 같은.
차를 한 번 바꿔볼까? 하고 이것저것 검색해 본적도 있다. 그런데 뭐가 이렇게 복잡해? K3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5랑 7도 있었어? 그랜져가 원래 아반떼랑 비슷하게 생긴 건가? 하이브리드는 휘발유도 넣고 전기도 충전하면 엄청 번거로운 거 아닌가? 테슬라가 실제로 돌아다니는 차였어? (이건 충격이었는게, 나는 테슬라가 우리나라에 없는 줄 알았기에, 한국인들이 테슬라 주식을 샀다는 것 자체가 버블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근데 에쿠스는 언제 사라졌대?
그러다 외제차를 찾다보니 내 맘에 젤 드는 건 렉서스였다. 그런데 연비가 왜 안좋지? 원래 안좋나? 찾아보니 외제차들은 다 연비가 안좋더라. 그럼 소변 자주 마려운 오줌싸개처럼 주유소도 자주 가야 되는 건가? 그러고 보니 아우디도 꽤 예뻤다. 벤츠와 BMW는 하도 많이 봐서 그런가 별로인데 사람들이 왜 이렇게 좋아하지?…. 아, 그러고 보니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차를 그나마 좋아하는구나.. 라고 깨닫게 되었다.
맘에 든다는 것도 실은 가기 싫은 병원 중 제일 가고 싶은 병원 찾는 느낌이었다. 기왕 병원에 가야 한다면 크고 멋진 삼성 병원이나 분당서울대병원에 가는게 좋겠다, 하는 느낌. 일차적으로 병원은 가지 않는게 제일이다.
그렇게 검색하다 시들해져서 차에 대해선 다시 잊고 있었다. 그러다 일이 좀 있어 지방으로 내려갈 일이 생겼다. 서울역으로 가서 KTX를 타는데… 승강장에 차가 들어오니 괜히 가슴이 두근두근.. 열차에 올라 넓찍한 의자에 기대 눕듯이 앉으니 뙇! 알겠더라. 이거다. 이게 바로 내가 좋아하는 ‘차’라는 거다. 비행기보다 더 좋다. 비행기는 일등석 아니면 자리도 좁고 창문 밖으로는 구름만 보이고 기내식은 맛대가리도 없으니까. (기차도 실은 KTX보다 예전 무궁화 열차가 좋았는데)
어릴때 내가 ‘뒤로가는 버스’를 좋아했던 이유는, 편했기 때문이었다. 편하게 앉아 차창 밖으로 생전 처음 보는 시내 장면들이 휙휙 지나가는 게 얼마나 재밌었겠는가. 동네에서 텔레비젼을 처음 들여 놨다는 이웃집 김씨네 안방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화면에 나오는 ‘대한 늬우스’ 방송을 숨죽이며 바라봤을 옛날 어느 시골 마을 사람들처럼?
핵심은 ‘편하게’ 였다. 분홍 버스도 같은 노선을 따라 갔지만 나는 그 불편한 버스 안에선 아무것도 즐길 수가 없었다.
편하게 넓은 공간에서, 가끔 창 밖도 보고.. 음악도 듣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편하게 목적지까지 나를 태워주는 차.. 나는 그런 차가 좋다. 너무 북적이지 않아 넓은 공간감을 느낄 수 있는 지하철이나 거의 누워서 갈 수 있는 기차도. 차를 좋아한다기 보다는 그냥 넓고 편한 공간이 좋은 것 뿐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