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슬로우의 욕구 이론은 많은 비판을 받고 있지만, 적어도 그가 세운 개념은 큰 틀에선 어느 정도 인정 받고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의 욕구엔 단계가 있다는 것. 다만 매슬로우가 모든 사람의 욕구를 단계별로 정형화했던 것과 달리, 현대 심리학은 사람마다 추구하는 욕구가 서로 다르다고 보는듯 하다. 사람은 생각보다 훨씬 더 다양한 모습으로 태어나고 있으니까.
욕구는 결핍을, 욕망은 그 결핍을 해소하기 위한 구체적인 상태를 바라는 것을 뜻한다. 어린시절 위험에 처했던 적이 있는 사람은 안전에 대한 욕구를 채우기 위해 자신을 지켜줄 돈이나 안전한 주변 환경을 욕망한다. 욕구가 명확하면 욕망을 짐작할 수 있지만, 거꾸로 욕망을 통해 욕구를 추측하기란 쉽지 않다. 권력에 대한 욕망이 애정 결핍인지, 불안과 공포인지, 단순히 쾌감을 느끼고 싶은 욕구 때문인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돈에 대한 욕망 역시 마찬가지다.
'연지'라는 사람이 있다. 연지는 여행을 무척 자주 다녔다. 대화 대부분을 과거에 자신이 어디를 다녀왔는지, 앞으로 어디를 갈 건지에 대한 주제로 채웠다. 그러나 여행 이야기를 하는 연지의 얼굴 표정은 그녀의 말처럼 유쾌하거나 행복해보이지 않았다. 그보다는 자기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행을 굳이 꺼내드는 느낌? 늘 어딘가 채워지지 않은 듯한 느낌. 세계일주를 꿈꾸던 그녀는 결국 일 년 가까이 세계여행을 떠났으나, 돌아온 후의 얼굴 표정엔 만족 보다는 허탈함, 피로감이 더 많이 묻어났다.
여행을 자주갔던 연지의 실제 욕구는 애정, 안정 등이었고 사실 그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는 행복한 가정 생활을 욕망하는 것이 좀 더 적확한 욕망이었겠지만.. 현실에서 몇 번 좌절을 겪고 난 후 마음의 문을 닫아 버려서였을까, 그것을 대체할만한 욕망을 찾은 것이 여행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쨌든 여행은 누구에게나 많은 것을 잊게 해주는 삶의 활력소일 테니까.
욕구는 대체될 수 없다. 어린 시절 애정, 안전, 편안함, 배고픔, 배설 등등의 욕구 충족에 심한 결핍을 겪은 사람은 나이 들어서 그 시절의 결핍된 욕구를 채워줄 무언가를 끊임없이 욕망하며 산다. 고타마 싯다르타도 어린 시절 뭔가 채워지지 않은 결핍이 그를 평생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찾도록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유독 예민하고 똑똑하게 태어났기에 남들 보기에 '아니 쟤는 왜 저런 걸 놓고 고민한대?' 라는 소리를 계속 들었겠지만.
욕구의 결핍은 어린 시절 발생하지만, 그 욕구를 채우기 위한 욕망을 추구하는 것은 성인 이후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바로 이 시간적 불일치로 인해 인생엔 끊임없이 고뇌와 고통이 찾아온다. 욕구 - 욕망 간에 잘못된 짝짓기가 된 경우도 많아서 (여행을 자주 갔지만 여행을 진심으로 원했던 것은 아닌 지인들처럼) 이러한 괴로움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현실은 냉정할 때가 많다.
'내가 무슨 일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는 경우도 바로 이 욕구-욕망의 잘못 짝짓기에 해당한다. 일을 통해 보통 이상의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은 지극히 소수다.(있긴 있다) 특별한 재능을 갖고 태어났거나, 자신의 성향과 우연히 직업적 특성이 잘 맞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하는데, 재밌는 것은 자기 일이 좋다는 사람은 무슨 일을 시켜도 대체로 만족한다는 점이다. '내가 무슨 일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는 사람은 실제로는 일의 종류가 고민이 아니라.. 일로 채울 수 없는 내면의 결핍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은 더 재미난 직업을 갖는다 해도 채울 수 없는 종류의 결핍이다. 따라서 일단 일에 대한 고민은 할 필요가 없다.
'내가 뭘 할 때 행복하지' '무슨 일을 해야 더 즐거울까' 고민하며 이런저런 다양한 취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겉에서 보기에 꽤 여유롭고 풍요로운 인생을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저기 여행도 가고, 맛집도 많이 가고, 골프 승마 바이크 뭐 뭐 뭐 뭐 엄청 하는 모습을 보면 주변 사람들은 한껏 부러움에 사로잡힌다. 특히 인스타에 그런 사진들을 가득 올리는 사람들을 보면 보통 사람들은 쳇바퀴처럼 도는 자기 인생에 자괴감까지 들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욕구-욕망의 어설픈 짝짓기에 불과하다. 일단 '다양한', '인스타에 올리는' 부터가 자연스러운 인간의 뇌 속 흐름과 다르다. 인간은 그렇게 다양한 취미 생활로 일상을 꽉 채우며 행복하고 즐겁도록, 그걸 사람들에게 자랑하며 마음이 채워지도록 만들어져 있지 않다. 역설적으로 그런 모습은 그 어떤 것으로도 마음이 채워지지 않아 공허함을 자주 느낄때 나타난다. 신기하겠지만.. 애초에 인간의 뇌가 그렇게 생겨 먹었다. 그러니 하루 종일 일 생각, 애인 생각, 집에 가서 할 게임 생각, 아이 생각에 몰두하며 일상을 대충대충 사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연스러운 감정 흐름 속에서 그저 자기 삶을 잘 살고 있는 셈이다.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뭐하고 놀지, 어떻게 살아야 할 지 고민이 된다면.. 고민 끝에 나온 선택지들 모두 썩 맘에 들지 않는다면.. 아마 핵심은 일, 놀이나 취미, 삶의 방식 그 어디에도 없을 가능성이 높다. 결핍된 욕구가 무엇인지, 과연 내가 추구하는 욕망은 무엇인지.. 그 둘이 잘 짝지어져 있긴 한지.. 근원적인 것부터가 문제일 테니까. 욕구는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