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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주의에 대한 생각

by rextoys

역사적으로 어떻게 국가가 형성되고 유지, 발전 및 쇠퇴하였는지는 개인에게 별로 중요한 이슈가 아니다. 개인의 입장에서 국가란 태어나 보니 우연히 소속된 공동체일 뿐이니까. 그 국가가 한 개인에게 이익이 될 수도, 피해만 끼칠 수도 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속한 국가를 쉽게 바꾸지 못하니 좋으나 싫으나 자기가 국가에 머물 수밖에 없다.


통치자, 혹은 한 국가로부터 큰 이익을 얻고 사는 사람들 입장에선 국가에 충성하지 않는 사람들이 무임승차자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무임 승차자들을 골라내서 추방할 방법도 없을 뿐더러, 어쩌면 과반 이상의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일 가능성도 높기 때문에 딱히 뭘 할 수도 없다. 다만 더 많은 사람들이 국가에 충성케 하기 위해 통치자와 그 주변 사람들은 대국민 교육이란 정책을 시행하곤 한다.


국가는 엄밀히 말해 폭력을 독점한 집단이라 볼 수 있다. 개인을 외적으로부터 보호하고, 한 국가 안의 사람들이 서로 물리적 폭력으로 죽고 죽이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하는 것, 이것이 국가의 가장 원초적인 존재 이유가 된다. 이런 기능을 상실한 국가는 개인의 입장에서 볼 때 있으나 없으나한 존재가 된다. 물론 그 상황에서도 개인은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으니, 첫번째는 망해가지만 자기가 속한 국가를 바로 세우기 위해 국가에 도움을 주는 것이고 두번째는 원래 국가를 떠나 다른 국가로 망명하는 것이다. 두 가지 선택 중 어떤 것이 더 바람직하느냐는 물음은 별 의미가 없다. 나중에 망해가던 국가가 바로 서게 된다면 첫번째를 선택했던 사람들은 애국자가 되고 두번째를 선택했던 사람들은 매국노가 된다. 그러나 이는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한 개인이 어떻게 국가 미래를 알 수 있겠는가.


조선 후기 친일파들의 경우도 엄밀히 따지면 같은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망해가는 상황에서 러시아와 일본이 들어왔을때 개인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당시 거의 모든 민중들이 먹고 살기 힘든 상황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과연 조선이란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명분이 귀에 들어왔을까? 그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강한 나라에 붙어야 한다는 생각이 더 크게 들지 않았을까?


여기에 그런 것은 기회주의자들의 행태이고 기회주의자는 결국 주변인들을 함정에 빠뜨리니 처단해야 한다는 반박이 나올 수 있다. 그런데 실은 기회주의자라는 것은 오늘날로 치면 정세를 빠르게 읽고 대처하는 경제인들 중 상당수가 해당될 수 있다. 그 뿐인가. 학창시절 반에서 왕따를 당하는 친구와 처음에 친했다가 슬슬 거리를 둔 아이들, 폭력 성향의 교사에게 반항하지 못했던 학우들, 직장 등의 사회 생활에서 마주하게 된 부당한 일에 나서지 않은 사람들은 기회주의적인 사람들에 비해 뭐가 더 낫다고 할 수 있나. 똑같이 피해 보는 것을 두려워하고 조금이라도 자기에게 더 유리한 행동을 선택한 것에 있어서는 비슷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일파를 옹호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과거 일제 강점기 시절 친일 활동을 했던 인사들을 색출하고 교과서에 싣는 등 과거사 단죄를 할 뿐 아니라 후대에도 교육 자료로 남겨야 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런데 이 때 '필요하다'라는 것은 바로 현재의 한국이란 국가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일 뿐 과거 친일파들이 악에 해당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즉, 과거사 청산은 윤리적으로 옳은 것이 아니라 그저 지금의 한국 국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판단이 설 경우 해야할 일이라는 의미이다. 위에서 말했듯, 그 당시 조선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친일파가 될 수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당시 친일파로 낙인찍힌 사람들의 후손들이 억울하지 않을까? 억울할지 모르지만 그 숫자는 소수다. 국가란 그렇게 유지되는 법이다. 소수의 억울한 사람들을 모두 사정 봐 줄 필요가 없다. 현재의 한국이란 국가의 체제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억울한 사람들을 만들어 낼 필요도 있다. 항상 중요한 것은 현재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들이니까.


정리하자면 과거 친일파였던 사람들을 찾아내서 기록에 남겨 역사적 단죄를 하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 친일파들을 악인이라는 식으로 가치 판단을 할 수는 없다. 그리고 현재 친일파의 후손들은 억울하겠지만 어쩔 수 없다. 이 세 가지 명제가 서로서로 모순을 일으키는 것 아니냐고?


정말 중요한 대전제를 빠뜨렸다. 원래 세상은 합리적인 곳이 아니다. 그럴 필요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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