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때 한 달동안 유럽 여행을 떠났다. 처음 런던에 도착했을땐 내 주변을 둘러싼, 동화 속 나라에 등장할 것만 같은 멋진 건축물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렇게 멋진 건축물들 속에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느낀지 일주일 후. 나는 더이상 건축물에 아무런 흥미도 갖지 않게 되었다. 새로운 여행자들과 만나 놀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호스텔에서는 수많은 다른 나라 여행자들을 만날 수 있었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당시엔 서로가 서로의 호기심 대상이었다. 나와 다른 인종, 다른 문화, 다른 역사 속에서 산 외국인들과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내가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는 신선한 느낌이 들었다.
당시 유럽을 여행했던 각국 여행자들은 모두 함께 어울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당시엔 스마트폰 없이 종이책 지도를 따라 여행을 해야 했던 때였다. 자연히 길가에서 여행자들과 만나면 그들이 어느 나라 사람이든 상관 없이 붙잡고 서로 정보 교류하는 일이 잦았고, 그러다 말이 잘 통해 함께 여행하는 일도 많았다. 숙소에서는 딱히 할 일이나 볼거리가 없었기 때문에 눈 앞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의 물꼬를 트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로부터 십 년 후. 다시 유럽을 찾았을때 이제 유럽 여행은 국내 전라도나 경상도 여행을 하는 것만큼 편리해졌다. 어디든 구글 지도로 찾아갈 수 있고, 실시간 버스 노선과 지하철 노선앱을 이용해 5분 10분 시간까지 맞춰가며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으며, 조금 복잡하거나 먼 것 같으면 우버 택시를 불러 포인트만 찍어주면 끝이었다. 밤늦게 도시에 떨어져도 아무 걱정할 게 없었다.
간간히 보이는 여행자들은 모두 손에 쥔 스마트폰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다녔고, 숙소에선 모두 각자의 나라에서 보던 영화와 드라마, 뉴스와 라디오 방송을 보고 들으며 시간을 때울 수 있었다. 또한 다들 자기가 사는 곳과 멀리 떨어진 외국에 와 있었지만 그들의 친구나 가족, 직장 동료들과 마치 그들이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래서 여행지에서 만난 다른 여행자들과 굳이 안면을 틀 필요도 없고, 여행 정보를 나눌 필요도 없었다. 여행은 그저 여행지에 가서 음식을 먹고 구경꺼리를 구경하는 것으로 표준화되었다.
모바일 기기 사용이 늘어나면서 언젠가부터 다들 현실 감각에 혼란을 느끼게 된 것 같다. 예전에는 내 눈 앞에 보이는 것만이 지금 이 순간 나의 현실이었는데, 이제는 스마트폰을 통해 나와 상관 없는 저 어딘가의 뉴스, 나와 만난적 없는 사람들의 생각, 멀리 떨어진 친구와 지인들까지를 내 현실로 봐야 하는건지 헷갈린다. 분명 나의 몸은 내 오감이 느끼는 영역까지를 현실로 인지하고 있을텐데, 나의 뇌는 스마트폰 속 텍스트와 이미지로 만들어낸 세계까지를 현실로 인지하는데서 묘한 불일치를 끊임없이 느낀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내가 있는 지금 이 순간의 공간을 느끼는 현실 감각은 후퇴하고, 저 멀리 어딘가에 있는 가상의 공간을 진짜 현실로 느낄 때도 있다. 메타버스는 이미 오래전부터 찾아와 있던 걸까. 내 앞에 있지 않은 저 멀리 누군가의 이야기에 기뻐하거나 분노하는 감정을 느끼는 건 내 오감을 속이는 일은 아닐까?
눈 앞에 있는 사람과도 다른 세계 다른 현실을 지내고 있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분명 같이 한 공간에 있는데도 이 공간에 존재하지 않는 각자 다른 사람들과의 단톡방에서 각자만이 아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일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몸은 여기 있지만 마음은 늘 어딘가에 있을 가상의 공간에 있다. 내 몸의 오감은 뇌의 인지와 점점 분리되는 듯하다.
어디에 있어도 나는 나만의 세계 속 사람들과 함께 하기에, 여행지에 가서도 그 지역 그 공간 그 순간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받아들일 기회도 놓칠 때가 많다. 바로 눈 앞에 있는 이색적인 음식조차 블로그에서 누가 먹어본 후기라는 프레임으로 맛을 본다. 내가 들어와 있는 건축물 내부는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이 유튜브에 올린 영상의 흐름에 맞춰 본다. 내 눈을 통해 들어온 시각적 이미지를 느끼는 건지 다른 사람이 만들어낸 이미지에 내 시각을 맞춰가는 건지 헷갈릴 정도다.
언뜻 편리한 세상을 사는 것 같지만 어딘가 불편하다. 이제는 내 뇌가 만들어낸 세계라는 필터를 거치지 않고는 있는 그대로 현실의 모든 것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만 같다. 눈 앞에 서 있는 새로운 사람도 있는 그대로 만나고 느낄 수 없다.
훗 날 언젠가 내 눈 앞의 세상만을 현실로 느끼고 인지하는 곳에서 살고 싶다는 바램이 있다. 하지만 바깥 세계가 궁금해서, 바깥 세계와 이어지지 않으면 불안하기 때문에 결국 그 바램은 이루어지기 어려울 듯 하다.
불과 십 수 년 전을 기준으로 봐도 지금 세상은 너무 신기한 세상이다. 하지만, 뒤로 돌아갈 수는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