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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맘대로 Jul 01. 2023

플라시보 효과

"범불안장애와 우울증이 있으시네요. 누군가 늘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믿음을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부모님이 어린 시절부터 늘 아끼고 사랑을 주셨다는 기억을 처방해 드리죠. 아, 당신을 항상 포근하게 감싸줄 공동체에 소속되어있다는 소속감도 1일 3회 처방해 드리죠." 


불안과 우울을 치유할 확실한 처방이란 어쩌면 사랑, 훈훈한 과거의 기억, 소속감처럼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현실에선 그저 세로토닌이나 도파민 분비를 촉진시킨다고 알려진 화합물을 처방할 수 있을 뿐이다. 


플라시보 효과라는 용어가 있다. 이는 환자가 아무런 효능이 없는 약을 복용했을 때도 '치료제를 복용하고 있다' 라는 믿음으로 인해 환자 몸에서 자연적으로 발휘되는 치료 효과를 뜻한다. 약의 효과를 검증할 때는 이같은 플라시보 효과를 제외한 그 나머지의 효과를 진짜 효과로 보기 때문에, 이를 검증하기 위해 일부러 아무 효과가 없는 약을 일정 비율의 환자들에게 투여한다. 


진심을 연기하는 연기자가 불안과 우울을 겪고 있는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연기를 펼치거나, 유능한 최면술사가 과거에 당신이 부모님에게 듬뿍 사랑을 받았다고 세뇌 시키거나, 미리 짜여진 몰래카메라 팀이 공동체 같은 것을 만들어 당신이 오늘부터 우리의 영원한 멤버라고 속인다고 치자. 과연 이 대상자의 몸 속엔 어떤 변화가 생길까?


아마도 몸 속에서 세로토닌, 엔돌핀, 옥시토신 등등 마음을 안정시키는 체내 호르몬이 분비되어 실제로 불안과 우울을 가라앉혀줄 것이다. 물론 본인이 깜빡 속는다는 전제 하에. 마치 약의 임상 실험에서 플라시보 약을 먹은 피험자가 실제 치료제를 먹고 있다고 착각해 몸 속서 어느 정도 치료 효과가 나타나는 것처럼 말이다. 


플라시보 효과는 약의 관점에서 보면 말 그대로 아무 의미 없는 가짜를 지칭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현실에서 플라시보 효과는 매우 의미 있는 효과를 낼 때가 많다. 감기와 같은 질환은 치료제가 없고 그저 증상 완화제에 불과하지만,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고 처방을 받는다면 그 자체만으로 '누군가 내 몸 상태를 관리해주고 있다' 는 믿음, 혹은 내 몸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믿음이 생겨 몸 속에서 감기 바이러스와 싸우는 면역물질 생산이 늘어날 수 있다. 시험이나 중요한 직장 프로젝트 발표를 앞두고 '망할거야' 라고 좌절을 거듭하는 사람은 몸살이 날 수 있지만, '잘될거야' 라고 굳게 믿는 사람은 오히려 기대감과 흥분에 들 뜰 수도 있다. 


과거 다같이 교육 수준이 낮고 정보 접근성이 낮았던 시절, '만병 통치약' 이라고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약장수들이 꾸준히 약을 팔 수 있었던 것은 그 사람이 단순히 사기꾼 재능이 탁월해서만은 아니었을 거다. 실제로 그 약은 매우 높은 수준의 플라시보 효과를 냈을 가능성이 있다. 외부와 단절된 속에서 전염병 등으로 늘 불안에 시달려야 했던 과거엔 사람들이 어딘가에 '만병 통치약'이란 것이 실제로 존재했으면 좋겠다는 강한 바램이 있었을 것이고, 이런 바램은 약장수들의 허풍을 진심으로 믿게 만드는 데 기여하지 않았을까. 진시황도 어딘가에 불로장생의 약이 있다고 진심으로 믿었다고 하니까.


플라시보 효과는 '믿음'의 효과로 볼 수도 있다. 역사와 종교가 늘 함께 했던 것은 우리의 뇌 속 어딘가에 절대자에 대한 믿음의 영역이 있기 때문일 수 있다. 이 부분이 무엇인가로 채워져야 하는데, 사람마다 이 영역을 무언가 강하게 믿을만한 것으로 채워야 비로소 자아가 완성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알고보면 누구나 강하게 믿는 신념이 존재한다. "노력하면 이루어진다" "열심히 살면 반드시 좋은 일이 일어난다" 라는 신념도 사실 근거 없는 생각이지만, 많은 이들이 이같은 신념을 강하게 믿고자 한다. 종교는 그 신념을 굳건하게 만들어주는 근거로 작용하곤 한다. 


꼭 절대자에 믿음이 아니라고 해도 믿음 그 자체가 주는 힘은 무척 강하다. 다들 인생이 힘들다고 말하면서도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이유는 언젠가 상황이 나아질거라는 믿음 덕분이다. 그런 믿음이 없으면 실제로 체내 행복 호르몬이 줄어들고, 면역력이 약해져 쉽게 질병에 걸릴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상의 것이 아니라 실체가 있는 무엇일 수 있다. 다만 과학적으로 믿음의 실체를 분리해서 정량화시킬 수 없을 뿐이다. 


우리가 믿는 많은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 있다. 연인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을 수 있고, 내가 소속되어 있다고 믿는 공동체는 사람들의 약한 유대감에 의해 간신히 유지되거나 곧 사라져버릴 실체 없는 것일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정부, 국가라는 것도 엄밀히 따지면 실체가 없다. 훌륭한 업적을 통해 남들에게 인정과 존경을 받는 사람은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우러러보고 있다고 믿을 수 있지만, 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로 별로 관심이 없다. 세세하게 따지자면 우리는 모두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누구에게도 지속적인 관심을 받을 일 없이 홀로 외로이 살다 가는 존재다.


그러나 그런 진실을 되새기고 사는 것보다는 무언가에 홀린 듯 실재하지 않는 것도 실재한다고 강력히 믿는 것이 행복한 인생을 사는데 무척 도움이 된다. 가족과 친구는 영원하고, 내가 구입한 명품 브랜드의 가치는 영원하며, 내가 남긴 저작물은 영원히 남거나 이 세상에 어떤 식으로든 기여한다고 믿는 것은 안정된 일상을 사는데 있어 필수다. 내가 어떤 말을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무슨 일을 하든 멀리서 보면 아무런 의미 없는 사소한 것일지 모르지만, 그 모든 것이 세상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거라는 강한 믿음은 나 스스로에게 에너지를 부여해 늘 내 몸과 정신이 활기 넘치게 만든다. 


플라시보 효과는 적어도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만, 단지 그 효과와 수준을 자유롭게 통제하고 활용하기 힘들 뿐이다. 과학은 세상의 극히 일부만을 컨트롤 하는데 그친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 몸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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