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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맘대로 Jul 01. 2023

기억과 주의 집중

나는 길눈이 매우 밝은 편이다. 외국 여행에서도 한 번 갔던 장소의 위치와 그 곳까지 가는 길을 정확히 기억해 수 년 후 다시 갈 때도 지도 없이 바로 찾아갈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를 따라간 곳은 기억하지 못할 때가 많다. 내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장소, 같이 간 사람에게 전적으로 의지해 따라간 곳은 머리 속에서 금방 사라진다.


기억엔 단기 기억과 장기 기억이 있다. 특정 단어를 외울 땐 그 단어의 모양, 의미, 그 단어를 입으로 발음할 때의 느낌, 감정 등등의 정보가 몸 속 여러 감각기관을 통해 머리 속에 들어온다. 그 후 이런 정보들은 전전두피질에 작업기억으로 잠시 머문다. 작업기억의 용량은 5~9단어 정도로 그 지속 기간은 10~15초밖에 안된다. 이것이 단기 기억이다. 


단기 기억이 장기기억으로 옮겨가기 위해선 주의 집중이 필요하다. 단기 기억으로 들어온 정보들이 의미 있는 것으로 느껴지면 우리는 자연스레 그 정보들에 주의를 집중하고, 그 결과 이 정보들은 뇌 속 해마라는 기관으로 옮겨진다. 해마는 이렇게 옮겨온 정보들을 패턴화해서 장기 기억으로 저장한다. 만약 뇌수술을 받거나 알츠하이머 질환 등으로 해마가 손상되면, 방금 일어난 일은 기억할 수 있어도 십 수초가 지나면 금새 그 기억은 사라진다. 새로운 정보와 감각, 감정을 오랫동안 기억할 수 없다는 의미다.


우리 뇌는 기억장소가 따로 없다. 기억의 내용을 한 세트로 묶어서 넣었다 빼는 서랍같은 저장 장소는 없다는 의미다. 단지 기억을 저장할 당시에 관여하는 여러 뇌 속 신경 세포들의 활성화 패턴을 저장할 뿐이다. 해마는 이 과정에서 프로그래머처럼 이 패턴 기억을 만들어낸다. 


어떤 사람과 같이 있을땐 그의 얼굴 이미지가 뇌 속 시각 피질을 활성화시키고 그의 목소리는 청각 피질을 활성화 시킨다. 그와 함께 있던 공간의 분위기나 냄새를 감지하는 신경 피질도 같이 활성화된다. 주의를 기울이면 그 사람과 함께 있을때 입력된 각종 정보들이 해마를 거쳐 장기 기억으로 저장된다. 나중에 그 사람을 떠올릴 땐 이전에 활성화된 시각, 청각, 그 외 몇 가지 신경 피질이 차례대로 활성화된다. 그 활성화 패턴이 기억으로 저장된 셈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매일 마주치는 것들이라 해도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못해 정확히 기억 못하는 것들이 많다. 스마트폰을 보지 않고서는 스마트폰 어디에 구멍들이 있는지 정확히 떠오르지 않을 수 있고, 지폐와 동전에 그려진 인물들이 어느 쪽을 바라보고 있는지, 숫자가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사는 아파트색이나 우리집을 표시하는 숫자가 무슨 색인지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같이 대화를 나눌 때 내가 방금 한 이야기를 금새 까먹은 사람에게는 왠지 모를 실망감이 들거나 친근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무의식적으로 상대가 내게 집중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마음이 불안정하면 다른 사람에게 집중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마음이 불안하면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기 어렵다.


한 번에 여러가지를 처리할 수 있는 멀티태스킹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두고 흔히 유능하다고 평가한다. 그런데 사실 뇌는 멀티태스킹에 최적화되어 있지도 않을 뿐더러, 동시에 이것저것 하다보면 어느 하나 주의를 집중할 수 없어 방금 작업하는 내용을 장기 기억으로 옮기기도 어렵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뭔가 열심히는 했는데 알고보면 머리 속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의학계열 학교에선 공부량이 엄청나게 많지만, 공부할 것이 그렇게 많다는 것은 실은 그 중 머리 속에 제대로 들어가는 것은 별로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적은 분량이라도 천천히 오랜 기간에 걸쳐 집중해서 파는 것만이 머리에 남는다. 그래서 의학계열 분야 누구든 막상 현업에서 일할 땐 자기가 배웠던 것 대부분을 써먹지 못하고 특정 분야에서만 그나마 일을 할 수 있다. 물론 공부했던 것들이 어느정도 개념화되어 그 다음 지식과 기술을 쌓을 때는 도움이 되겠지만.


기억의 원리만 보더라도 마음을 편히 먹고 불안을 없애는 것이 모든 일과 공부를 시작하기 전 가장 중요한 준비 상태인 것이 자명하다. 그래서 일과 공부 그 자체보다도 중요한 게 마음을 먼저 다스리는 것이다. 잠도 충분히 자고, 스트레스를 날리기 위해 취미나 오락 활동을 하는 것도 그래서 필요하다. 복지제도가 단순히 노동자들의 인권 향상이나 행복 증진 뿐 아니라 생산력 증진을 위해 필수적이듯,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한 모든 활동들 역시 일과 공부만큼이나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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