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데없이 남에게 시비 걸거나, 남을 통제하려고 하거나, 남에게 상처 주는데 골몰하는 사람들을 진상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여기서 '남'은 모든 사람을 뜻하지 않는다. 진상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진상은 호구가 있어야만 드러난다. 즉, 진상이 진상질 하는 것은 호구가 있기 때문이며, 진상질은 오로지 호구에게만 통한다.
때로 진상은 호구가 만들기도 한다. 겉보기에 착하고 성실하고 남에게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을 것 같아 보이는 사람도 알고보면 어딘가 약한 부분이 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약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데, 이 때 이를 취미나 운동, 일 등 건전한 방법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채우려는 욕구가 슬금슬금 피어오를 수 있다. 그런데 눈 앞에 호구가 있다? 자기도 모르게 호구를 붙잡고 진상질하며 마음을 채우는 소비형 인간으로 변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체 호구와 진상은 어떤 사람들인가. 둘은 두 가지 면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
1)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중요한 생존 무기가 결핍되었다고 느낀다는 것
2)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 무언가에 강박적으로 의존하고자 한다는 것.
결국 호구와 진상은, 같은 결핍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다. 다만 그 결핍을 어떻게 채우는가, 여기에서 차이가 난다. 진상은 결핍을 채우기 위해 의존하는 대상이 주로 인간 외적인 것에 있다. 돈이라든가, 일에서의 성취, 권력, 자리와 같은. 진상에게 호구는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용할 수 있는 도구다. 즉 더 많은 돈을 얻고, 더 많은 업무 성과를 내고, 더 높은 권력과 자리를 얻는 과정에서 심적, 물적으로 착취할 대상으로 본다는 의미다.
반면 호구는 바로 그 진상 자체에게 의존한다. 호구는 스스로 자립할 생각이나 자신감이 없다. 그러면서 자기 생존을 지탱해줄 중요한 부분의 결핍을 어디선가 채워야 한다고 느낀다. 이 때 자신과 심적으로 통하는 진상에게 의존하게 된다. 진상이 자신을 이용해 성취를 이루는 것을 보며, 그로 인해 자신도 도움 받을 거라는 기대를 하면서.
전체 그림을 보면 호구는... 반드시 피해자라고 볼 수는 없다. 호구와 진상은 세트라는 말은, 실은 호구를 비판하기 위한 말이다. 호구가 호구인 이유는 자기 스스로를 진상에게 갖다 바치기 때문이다. 호구의 마음 근저에 두려움과 욕심, 그리고 어리석음이 있다.
두려움. 진상을 거절하거나 의존할 대상이 사라지면 홀로 설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
욕심. 진상에게 의존하면 떡고물을 받아 먹을 수 있을 거란 욕심.
어리석음. 인간은 결국 홀로 서야 한다는 진실을 외면하는 어리석음.
나의 인사권과 고과권을 쥔 직장 상사가 있다고 하자. 집에서는 나만 바라보는 가족이 있다. 그런데 직장 상사가 나에게 심한 욕설을 하고 나를 무척 괴롭힌다. 내가 일을 못한댄다. 분명 내 잘못이 아닌 것도 내 잘못으로 뒤집어 씌운다. 나는 상사의 표정을 늘 살핀다. 상사 표정에 웃음이 가득하면 그 날은 마음이 편안해진다.....
전형적인 호구-진상 세트 상황이다. 호구는 자신의 운명을 쥔 상사와, 집안을 부양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다. 호구가 그렇게 과도한 책임감을 짊어진 것... 그게 과연 우연일까? 호구의 두려움을 진상이 눈치 챈거다. 눈치 챈 이유는 진상도 같은 두려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호구는 이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한다 : " 직장 안다녀봤어? 어휴, 상사 평가가 내 미래를 좌우하는거 몰라? " " 책임감 없냐? 가족 부양하는 거 당연한 의무 아냐? 애는 굶냐? "
여기서부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대꾸할 말이 없어진다. 그 직장을 꼭 다녀야 할까? 그 상사를 역으로 괴롭히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기대감 넘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가족을 부양해야 할까? 애가 굶든 말든 그게 과연 내 책임일까?.... 이런 말엔 아마 바로 부정적인 감정이 솟구쳐 오를 거다.
그 감정이 꼭 정답이라는 오류를 범하지 말자. 그런 감정을 안느끼는 사람도 있으니까.
오래전에 대학 친구 한 명이 유명한 교수가 있는 대학원 연구실에 갔다. 그 연구실은 그야말로 정치판이었다. 연구실에는 대략 세 파벌이 있었고, 각 파벌은 각자 따로 식사를 하고 서로의 파벌을 공격했으며 서로 더 많은 교수의 관심을 얻기 위해 온갖 중상모략을 꾸몄다.
그 안에서 내 친구는 끊임없이 소속을 밝히라는 각 파벌의 수장들에게 압박을 받았다. 교수님의 지도 하에 그 중 한 수장 (박사과정) 밑에서 일과 연구를 하게 되었는데.. 편의상 이 사람을 '범'이라고 하겠다.
범은 내 친구를 종 부리듯 일을 시켰다. 내 친구는 범을 거스를 수 없었는데, 내 친구의 평가 하나하나가 모두 범을 통해 교수에게 다이렉트로 보고되기 때문이었다. 당시 범은 매우 잘나가는 사람이었고, 교수는 그런 범을 무척 신뢰하고 있었다.
나중에 친구는 너무나 힘들어하며 범이 참 나쁜 사람이라고 토로하곤 했는데.. 친구는 그 연구실의 교수를 진심으로 존경했었다. 그래서 그 교수가 범에게 휘둘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교수가 범에게 휘둘린 게 아니라, 교수가 범을 이용해 그 밑의 학생들을 통제하고 있었던 것 뿐이다. 또한 그 연구실이 세 파벌로 갈라져 서로 치고 받고 싸운 이유는... 그 교수가 < 유명한 > 교수였기 때문이다. 그 교수는 박사 과정의 학생을 다른 좋은 대학에 '꽂아줄'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는 의미다. 학계에서 나름 방귀 좀 뀌는 사람이란 소리다. 그런 사람이 범에게 휘둘렸다? 택도 없는 소리다. 그렇게 범이 욕을 다 뒤집어 쓰고 교수는 은막 뒤의 조종자로 남는 것, 그게 바로 통치술 아닌가.
'유명한 교수' 연구실에서 '유명한 교수'가 닦아놓은 고속도로를 타고 싶다는 학생들의 욕망.. 그 욕망을 이용한 '유명한 교수'... 그 연구실 내부에 호구와 진상 세트가 여럿 생겨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래도 그게 좋으면 가서 견디거나 하루라도 빨리 진상의 위치에 올라설 기대를 하든가, 아니면 포기하고 나가든가. 친구는 현명하게도 박사 과정 중간에 포기하고 나갔다.
분위기 좋고 교수가 학생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대학원 연구실, 많이 있다. 단, 그 연구실을 나온 후 지도교수에게 득 볼 게 하나 없다는 것이 차이점일 뿐.
진상에 시달리다 잘못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 사람들은 진상만을 욕한다. 물론 호구를 이용하는 진상은 윤리적 관점에서 비난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호구는 자기 자신에게 잘못했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할 필요가 있다. 호구는 다른 누구에게도 피해를 끼치진 않았지만,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자신의 부모에게 가장 큰 죄를 지은 셈이다.
미래가 걱정되서, 먹고 살 길이 막힐까봐, 자신에게 부여된 책임을 감당하지 못해서 놓지 못했다 - 이는 지극히 그 호구 자신의 문제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세상엔 가족도 내팽개치고 무책임하게 일을 벗어 던지고 미래가 어떻게 되든 말든 나몰라라 하고 사는 사람들 많다. 그게 자살보다 더 나쁜가? 나쁘다면 누구에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가족을 내팽개친다고 정말로 그 사람의 가족이 쫄쫄 굶어 죽을까? 무책임하게 일을 벗어 던진다고 그 일과 관련된 사람들이 심각한 피해를 입어 생을 마감할 정도일까? 미래가 어떻게 되든 말든 신경 끈다고 실제로 그에게 어두운 미래만이 기다리고 있을까?
상상하는 최악의 일은 보통 일어나지 않는다. 그 상상에 사로잡혀 있지 않는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