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우리나라에서 학술적 토론과 정치 논쟁은 일상적인 모임에서 사실상 금기나 다름 없었다. 언론과 지식인들이 탄압받던 독재정권 시절을 거쳐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지루하고 답답한 대화 주제라는 측면이 컸다. 사람들이 모여서 대화를 나누는 것은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서로의 감정을 공감하기 위한 자리인데 뭣하러 그런 지루한 주제들을 대화 소재로 삼느냐는 거다.
시대가 크게 바뀌었다. 요즘은 어느 모임에 가나 심심치 않게 정치, 경제를 비롯한 다양한 인문학적 주제로 이야기가 오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방송이나 유튜브, 넷플릭스 같은 OTT 서비스에서도 각종 시사 다큐멘터리와 학술적인 이야기들을 다루는 프로그램들이 수두룩하다. 지식과 학술적 이야기로 가득한 유튜버가 수십만에서 백만 이상의 구독자를 확보하기도 한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고개를 끄덕거리게 만드는 부분이 있다. 사람들이 모임에서 토론하는 주제들은 궁극적으로는 돈 이야기다. 돈 이야기를 위해 역사, 사회, 경제, 정치, 각종 철학과 인문학을 모두 끌어들인다. 유튜브 등 OTT, 공영방송 속 지식 학술 프로들 역시 돈 이야기가 제일 많고 그 다음에 많은 것은 범죄 이야기, 가정 파탄이나 개인의 심리적 고통과 관련된 이야기다. 알고보면 돈과 범죄, 개인사 이야기를 하기 위해 세상 학문들을 다 끌어들인 것 같다.
스마트폰으로 각종 영화, 드라마를 즐기고 게임도 하며 수많은 사람들의 일상을 유튜브로 엿보는 세상. 컨텐츠 제작자들은 조금이라도 더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더욱 더 자극적인 컨텐츠로 승부를 걸게 되고, 점점 사람들은 그런 강력한 도파민 자극 컨텐츠에 익숙해져가고 있다. 이제는 틱톡이나 유튜브 쇼츠 처럼 짧고 굵게 흥미를 주는 영상에 익숙해져 조금이라도 길고 지루한 영상은 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영화와 드라마 역시 어떻게 하면 좀 더 사람들의 분노를 자극할까에 골몰하는 티가 팍팍 난다. 시사 교양 프로도 주제만 시사 교양이지 어떻게 하면 이걸 자극적인 이야기와 영상에 버무려 흥분되는 컨텐츠로 만들까 고민한 흔적이 가득하다. 유튜브 지식 채널 영상들의 제목은 '이거 하나만 보면 궁금증 해결!' '~에 관한 모든 것! 이 영상 하나로 끝!' 과 같이 말도 안되는 제목들로 이용자들의 시선을 끌려고 난리다.
스마트폰 이용 증가와 모바일 생태계 발전으로 인해 이처럼 자극적인 컨텐츠들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더이상 진득하게 오랜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서 읽어야 하는 책으로부터 관심을 거두고 있다. 소설도 읽기 편한 웹소설이 인기를 끌고 있고, 지식 전달 책들 역시 < 쉽고 재미있게 > 라는 수식어가 대세가 되고 있다. 영상 컨텐츠 뿐 아니라 모든 미디어 컨텐츠들이 전부 뇌를 달콤하게 자극하는 형태로 바뀌고 있다는 의미다.
이런 현상이 과연 장기적으로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느정도 예측을 할 수는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봐야 안다. 원시 인류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뇌를 지닌 현대 인류의 뇌가 도파민 자극 시대에 현명하게 적응할 수 있을지는 누구도 모른다.
다만 최근 들어 '마약' 이용자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부분에서 힌트를 조금 얻을 수 있다. 인간의 뇌는 자극에 금방 적응해 동일한 자극에 대한 반응이 둔감해지는 특성을 갖고 있다. 지금처럼 온갖 종류의 강한 자극이 넘치는 시대엔 인간의 쾌감 중추도 만성적으로 둔화될 수 있다. 점점 더 참을성이나 인내심도 사라져서 긴 시간 노력과 비용이 들어가는 일에는 관심을 거둘 수 있다. 출산율이 내려가는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점점 사람들은 한 명의 파트너와 자식을 두고 길고 긴 시간 서로 맞춰가며 책임감 있게 살기 보다는 단기간 만나 섹스만 즐기는 관계를 더 선호하게 된다.
더더욱 강렬한 자극에 목말라 하는 시대에 마약 관련 기사가 늘어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람들의 집단적인 수요는 공급자들이 발빠르게 움직여 손쉽게 수요를 채워줄 상품을 위한 기술 개발을 촉진시킨다. 최근 태국에서 대마 합법화 이후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곳곳에 마약 침투가 늘고 있다고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태국의 대마 합법화가 아니라고 본다. 전세계적으로 좀 더 강렬하고 말초적인 자극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는 것이 주요한 이유라는 뜻이다. 앞으로도 마약은 좀 더 간편하고 법망을 쉽게 피할 수 있는 형태로 점점 더 광범위하게 사람들의 일상 곳곳에 침투하게 될 것 같다.
마약의 확산은 그저 어떤 '신호'에 불과하다. 스마트폰으로 접하는 컨텐츠들에 중독되는 것이 마약에 중독된 것과 비슷하다는 연구도 나온 바 있다. 어쩌면 앞으로 마약 중독에서 벗어나는 것 이상으로 컨텐츠 중독에서 벗어나는 일이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게 될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자꾸만 더 중독적인 자극에 빠져드는 것에서 의식적으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일부러라도 지루하고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는 유익한 활동들을 꾸준히 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