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말 콜롬버스의 아메리카 발견 이후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강국들은 전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식민지의 효과를 경제학적 관점에서 간단히 설명하자면, 저임금, 저비용으로 높은 가치의 생산물들을 얻는 효과를 뜻한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생산성 높은 고부가가치 산업을 여러개 갖고 있는 것과 같다. 그로 인해 한 때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영국등 유럽 강국들은 큰 부를 일궈낼 수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 경제에 의존했던 유럽 국가들은 각 식민지들이 독립하면서부터 경제 발전 동력의 상당 부분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우리나라가 그동안 빠르게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저임금, 저비용 생산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식민지 경제와 비슷한 셈이다. 가정 주부들은 사실상 무급으로 집안일을 했고, 수많은 노동자들이 저임금으로 긴 노동 시간을 견디며 직장을 위해 온 몸을 다 바쳤다. 주5일 근무, 주 52시간 근무 등 노동 시간을 줄이는 정책이 나올 때마다 국가 경제 망한다며 난리난리가 났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착취적인 경제 구조가 지속되지 않을 경우 전체 생산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같은 저임금 착취형 경제 구조가 가능했을까? 물론 개발 도상국의 산업 구조 특성도 있지만, 다른 개발도상국과 한국이 특히 차이가 나는 부분이 하나 있다. 바로 '뿌리 깊은 공동체주의 문화' 이다. 모든 조직과 모임을 가족 구성원처럼 생각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같은 문화가 바로 한국식 공동체주의 문화의 본질이다.
한국식 공동체주의 문화 속에서, 사람들은 '친한 사람' '아는 사람' 을 통해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서비스를 이용한다. 친구끼리, 동료끼리 자금을 융통한다든지 고급 정보를 무료로 교환하거나 경쟁 없이 거래 계약을 체결하는 것 등등이 여기에 속한다. 또한 기업 등의 공동체 조직을 위해 개개인이 자기 몸을 갈아 넣는 것이 합리화된다. 공동체가 잘나가야 개인이 잘나갈 수 있다는 논리가 통하기 때문이다. 이는 고속 경제 발전을 이뤘던 70~90년대에 잠깐 가능했던 현상이었다. 이 시기는 직장에 헌신한 만큼 정년이 보장된다는 믿음이 통했던 시기였다.
가족과 친척 공동체를 위해 각 집의 주부들은 무급으로 자녀 양육 서비스와 집안일, 친척 모임 관리 등등의 업무를 처리했다. 이런 일들은 모두 효율적인 가족 공동체의 유지 및 관리를 위해 매우 중요한 업무들이었다. 주부들의 음식 솜씨마저 가족 구성원들의 사기를 진작시켜 구성원 전체의 생산성 향상에 도움을 줄 수 있었지만, 이 역시 사실상 무료로 행해진 일이었다.
가장은 돈을 최대한 많이 벌기 위해 본인의 인생을 희생시켜가면서 직장 입장에서 가장 효율적이고 생산성 높은 업무를 택했고, 자녀들 역시 자기 적성 보다는 사회적 입장에서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될 인재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얼마 전까지도 교육계에서 학생들을 '인적자원' 취급 했다. 심지어 지금도 고학력 학생들을 이공계로 유인하기 위한 유인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말이 언론에서 아무런 비판 없이 나오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에 정상적인 비용 지불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이른바 '가격의 정상화' 이다.
직장의 매출 향상을 위해 개개인을 갈아넣는 구조가 더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될만큼 사람들의 의식 수준이 높아지게 되었다. 주5일, 주52시간을 넘어 이제는 주4일 근무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아직도 논란이 많은 최저임금 인상 역시, 그 효과에 대한 논의가 끝나기도 전에 이미 시작된 생산 인구 감소로 향후 계속해서 인상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최저임금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일자리 임금 역시 마찬가지다.
직장에서 구성원들의 공동체의식 함양은 협업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하지만 더이상 직장을 평생 직장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줄어들면서, 이처럼 공동체의식을 고취시키는 각종 활동들 자체가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는 곧 조직 내부의 갈등 상승을 일으키고, 이러한 갈등은 다시 생산 비용으로 전가된다. 이를테면 업무 분장 및 협력 과정 실패 등 조직의 여러 문제들이 결국 제품과 서비스 가격 상승으로 이어진다는 의미다.
주부들이 무급으로 했던 수많은 일들 역시 제대로 비용을 치루게 되었다. 외식이 늘어나는 것은 식비 상승을 의미하고, 간편식과 배달식 증가는 비용 지출 대비 영양 하락을 의미한다. 가족-친척 공동체 조직 관리가 소홀해지면서 가정이 사람들의 정신 건강에 도움을 주지 못하면 이는 사회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근로자의 사기 감소로 이어진다.
근로자들은 점점 국가나 기업이 요구하는 생산성, 효율성 높은 업무 보다는 개개인의 취향에 맞는 업무를 찾게 되었다. 또한 학생들은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되는 분야에 가서 착취 당하며 사는 것보다, 소위 워라밸 높은 직업이나 자기 적성과 취향을 고려한 분야에 진입하길 원한다. 이러한 현상들은 결국 국가 경제의 관점에서 볼 때 비용이 증가하되 생산성과 고부가가치는 떨어지는 일로 이어지고 있다.
이 모든 변화들이 근 10년 내, 특히 최근 5년 내에 빠르게 진행되어 버렸다. 전세계적인 물가가 오른 데엔 코로나 기간동안 풀린 돈도 한 몫 하지만, 한 번 올라간 물가가 다시 내릴 것 같지도 않다. 그 이유는 이처럼 과거에 지불해야 했지만 무료로 이용 가능했던 재화들에 전부 가격표가 붙어 버렸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출산율이 중요한 이유, 인구 감소가 독이 되는 이유는, 우리나라에 고비용 고부가가치 산업이 없기 때문이다. 세계 1위라는 메모리 반도체 분야마저도 저비용 저임금으로 유지된다. 한국만큼의 저비용 저임금으로 생산할 수 있는 국가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세계 1위를 차지했다는 의미다. 결국 우리나라 언론이나 정치권에서 계속해서 출산율을 강조하는 이유는, 저임금으로 일해줄 노동자들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과거 제국주의 유럽국가들이 세계 곳곳의 식민지를 기반으로 경제를 유지해왔던 것과 마찬가지다.
일본의 경우, 우리보다 훨씬 전부터 고령화, 인구 감소, 장기 경기침체를 겪어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정이 괜찮은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닦아온 경제 식민지 건설 덕분이다. 우리나라 역시 전후 대일 무역 수지에서 늘 적자였다. 동남아를 비롯해 전세계 개발도상국 곳곳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일본은 이같은 경제전략을 통해 국민들의 부는 증가하지 않지만 최소한 국가의 부는 유지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어왔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이런 식의 대비가 되어있진 않다.
알고보면 한국이 한 번은 겪어야 할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왠만한 선진국들이 200~300년에 걸쳐 이룬 근대화를 단기간에 겪느라 생긴 부작용일 수 있다는 뜻이다. 출산율이 점점 더 떨어지고, 부동산이 멈출줄 모르고 상승하고, 의료계 등 국가 경제 향상에 도움 안되는 분야로 점점 더 많은 인재들이 몰리고, 무역 적자 지속으로 경제가 한 번은 작살 나봐야.. 그 다음 좀 더 좋은 방향으로 사람들의 아이디어가 모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