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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맘대로 Aug 06. 2023

결국 인생은 다들 거기서 거기

사회 증오에 의한 묻지마 살인 범죄는 예전부터 일본에서 만연했다. 이같은 범죄는 공동체 상실, 개개인의 고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인리히 법칙을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에서 이런 범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은 결국 한국 사회도 공동체가 사라지고 고립된 개개인이 늘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런 범죄는 단순히 범죄자 처단과 예방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세계 1위의 저출산과 자살 통계와 함께,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문제라는 뜻이다. 


유치원 이전부터 시작된 끝없는 비교와 경쟁을 거쳐 성인이 된 한국인들은, 사회 역시 끝없는 생존 경쟁의 장이라는 것을 알고 좌절한다. 이제는 모바일 네트워크와 SNS의 발달로 아이들부터 그런 한국의 현실을 안다. 어딜 가나 경쟁이 치열하고, 경쟁에서 낙오된 사람들은 어디론가 치워진다. 남은 사람들은 그렇게 도태된 사람들을 비웃으며 자신의 상황을 안심하지만, 언제 또 도태될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린다. 


한국이란 국가가 그렇게 생존해왔다. 생존을 위해선 여유를 부리거나 비효율을 감내할 수 없다. 모든 자원과 인력을 효율적으로 몰아넣어 그 중 가장 성과가 좋은 것만 남기고 나머지를 손절해야 한다. 생존이란 목표는 그 자체가 여유가 없는 목표임을 의미한다. 6.25 이후 그렇게 수십년을 보내면서 도태된 개인들이 입다물고 죽어 지냈는데, 여기에 모바일 시대가 열리면서 그동안 그렇게 입다물고 지냈던 개인들이 응축했던 분노가 폭발하기 시작한 거다. 모바일 기기의 발전은 그 누구도 자신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낼 수 있는 시대를 열었지만, 그동안 누적된 사회의 모순이 그렇게 자기 목소리를 내려는 의지를 가진 개개인들에 의해 폭발할 수 있는 시대의 문 또한 열었다. 


개인적인 경험을 덧붙이면, 고등학교 때까진 별 일이 없었다. 워낙 온순한 애들이 모여있는 동네였기도 했고. 그런데 대학에 가면서, 정말 희한한 일들을 겪게 된다. 


그 당시 우리 학과 사람들은 전부 그냥 말 그대로 다들 평범하게 생기고, 평범한 성격에 그냥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공부는 잘했을테니 다들 인내심과 참을성은 높았을지언정. 여자들 남자들 전부 지극히 평범한 외모의 평범한 사람들이었을 뿐이다.


1학년때는 다들 잘 지낸 것 같은데, 2학년에 올라가면서 이상하게 학과 내부에서 사람들 사이에 반목이 생기기 시작했다. 반목이 생긴 이유는 따지고 보면 비교와 경쟁이었다. 지극히 평범한 외모의 여학생과 남학생이 서로의 외모를 무시한다. 사실 우리 과엔 뭐 특별히 예쁜 여학생도, 잘생긴 남학생도 없었다. 고만고만한 머리를 가진 학생들이 서로의 머리를 무시한다. 역시나 우리 과엔 특별히 머리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시간이 한참 지난 후 지금 보면, 다들 그냥 사회의 평범한 사람으로 다들 평범하게 살고 있을 뿐이다. 그 누구도 특별히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다. 아마 다들, 왜 그 때 그렇게 서로 비교하고 경쟁하고 무시했는지 웃음이 날지도 모르겠다. 왜냐면.. 정말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다들 지극히 평범하게 살고 있을 뿐이거든! 게다가 지금은 다들 나이가 들어서, 다들 더이상 뭐 이렇다할 매력도 없는 평범한 아저씨 아줌마들일 뿐이다. 


한국 사회는 사회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앞으로도 계속 구성원들을 비교 시키고, 경쟁 시키고, 도태시키는 역할을 수행할지 모른다. 이런 현실은 한국의 지정학적 현실을 고려할 때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개개인이 똑바로 각자 자기 인생을 잘 챙기고 살아야 한다. 사회적 자아와 개인적 자아를 분리시키는 능력에 대한 요구도 점점 커질 수 있다. 


인스타를 비롯한 SNS와 유튜브엔 신나게 인생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 보이지만, 그것은 전부 가짜다. 자신을 그렇게 보여주는데 에너지를 많이 쓰는 사람들은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 인간의 모습은 모두 다르지만, 결국 행복과 즐거움을 결정하는 것은 뇌 속 행복 회로의 작동 방식에 달려 있다. 지루한 인생이 지속되면 그만큼 작은 것에도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는 뇌로 변하고, 강렬한 쾌감을 즐기는 인생이 지속되면 그만큼 다른 모든 것에 허무감과 지루함을 느끼는 뇌로 변할 뿐이다. 그런 고로 절대로 누구의 인생도 그렇게 대단할 수도, 혹은 처참할 수도 없다. 그냥 모두가 비슷비슷한 인생을 살다 갈 뿐이다. 


하지만 특별히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그게 바로 강박이다. 한편으로 한국 사회가 심어준 강박일 수도 있다. 경쟁에서 도태되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 더 잘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강박, 기준 이상이 되지 않으면 인생이 무의미하다는 강박,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끝이라는 강박.. 이런 강박은 아무리 겉으로 화려해보이는 인생조차 처절할 정도로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 강박은 뇌 속 행복 회로 자체를 왜곡 시켜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게 '화학적으로' 바꿔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점점 일을 하지 않고 집에 머물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이 말은, 바꿔 생각해보면 그렇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집에만 있어도 살만 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자체가 축복일 수 있다. 부모가 먹여 살리고 있든 뭐 어쨌든. 과거엔 하기 싫은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오늘 내일의 생계 자체가 위협을 받지 않았나. 


그런데 언론은 그걸 '대단히 큰 문제가 발생' 한 것으로 호들갑을 떤다. 기자들이 자기는 일 관두고 싶은데 욕심 때문에 못관두고 있어 질투나서 그런 기사를 써갈긴 걸까? 


일하기 싫어 집에 머무는 그 청년들을 밖으로 빼내올 방법은 하나다. 그 청년들을 신주 단지 모시듯 하는 일자리가 나오면 된다. 그 전까지 그 청년들은 나올 필요가 없다. 어차피 그들은 손해 볼 게 없다. 부모 덕으로 마음 편히 집에서 지내고 가끔 운동도 하고 그렇게 살면 된다. 


우리는 아직도 국가주의적 국가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 경제가 나락으로 치닫고, 국가의 존립이 위협에 처하면 어떨까? 뭘 어때. 난민이 되서 다른 나라로 이주해서 살면 그만이지. 그것도 하나의 인생이다. 전쟁이 나면 어떨까? 실은 국가 내부에 분노가 쌓이면 오히려 전쟁으로 그런 긴장을 푸는 것도 누군가에겐 좋을 수 있다.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점은 문제겠지만, 어차피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고, 사람은 결국 자기 인생 각자 알아서 살다 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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