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득권층' 이란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들까? 욕심 그득한 배나온 꼰대 아저씨들과 아줌마들이 모여서 크흐흐 하고 침흘리며 "다 내꺼야! 너희같은 약자들이 아무것도 못가지도록 우리가 다 빼았겠어!" 라고 말할 것 같은 느낌인가?
실제로 사람들이 '기득권층' 이라 말하는 부유층 인사들이나 재벌 그룹의 고위직들, 정치인들 내지 각 분야의 높은 사람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착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다들 인간적인 매력도 넘치고, 하나같이 생각도 깊고 때로 정이 많다는 생각마저 들지도 모른다. 높은 자리에 올라서도 그런 인간적인 매력을 유지하고 있어야 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 기득권층에 오를 수 있는 법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려진 탐욕스러운 사람들은, 그저 인물을 표현하기 위한 이미지에 불과하다.
이 사회가 거대한 기득권층의 횡포로 인해 숨쉬기 힘들만큼 경쟁적인 사회가 된 것 같지만, 그 역시 착각이다. 그냥 사회는 모든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기 할 일 하고 자기 가족과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갖고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다만 그렇게 각자 자신의 할 일만 하고 사는 사람들을 모아 놓으면, 때로는 개개인을 괴롭히는 거대한 악의 화신과 같은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긴 하다. 즉,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들 중 그 누구도 악마가 없지만, 평범한 사람들을 모아놓은 사회는 거대한 악마처럼 행동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를 인지하는 것이 개인과 사회에 대한 개념을 나누는 핵심인데, 우리나라는 유독 '사회'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 같다. 아마도 '사회주의' 라는 유사 개념에 대한 이념적 혐오 때문이 아니었을까.
부유하게 자란 사람들은 결코 이기적이지 않다. 오히려 여유가 있어 이타적인 성향을 가질 가능성이 더 높다. 요즘 MZ세대들이 '이기적'이라고 기성 세대들이 비난하는 경우가 있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MZ세대들은 오히려 그 어느 세대보다 '이타적'이다. 다들 여유롭게 자랐기 때문이다. 그 이타심이 지금 사회의 모순들에 의문을 가지고 공격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언뜻 보아 이기적으로 보일 뿐이다. MZ 이야기는 생략하고..
그러나 부유한 사람들이 모여 지극히 자연스러운 태도로 사는 것 자체만으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대단히 불편할 수 있다. 부유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자기들끼리 어울리고 자기들만의 그룹을 형성한 후 그냥 상식적인 선에서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볼 때는 '이기적인 기득권 집단의 이기적인 행동' 으로 보일 수 있다는 뜻이다. 자기들끼리 어울리는 것, 자기들만의 그룹을 형성하는 건, 원래 인간이라면 누구나 보이는 자연스런 행동양식에 불과하다. 자기들의 이권을 지키는 것? 어떻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 세상 누구나 자기 재산 지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는가.
하지만 겉에서 보면 그런 이기적인 기득권 집단이 모여 이 사회를 경쟁적이고, 비인간적인 세상으로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보통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온순하고, 평화적이며, 때로 인간적인 정이 클 수 있는 부유한 사람들이 악마적인 기득권 집단으로 보이게 된다는 의미다.
한 국가의 정책과 법률, 제도, 정치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사회적 모순이 심화되면, 그 때부터는 개개인의 속성과 상관 없이 서로가 서로를 혐오하고 증오하게 될 수 있다. 빈부 격차 문제, 부동산 문제, 경쟁적 입시 제도 문제 등 각종 사회 문제를 법과 제도 등등으로 해소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연합국 측에서 일본 정부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과정을 조사하면서 매우 놀랐다고 한다. 당시 일본은 그렇게 광범위한 전쟁을 벌일 수 있는 국가적 여력이 없었다. 사람만 많았을 뿐, 고질적인 자원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점차적으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일본인들의 성향이 결코 악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온순하고 남의 말을 잘 따르는 부드러운 성향에 가깝다고 했다.
단지, 당시 일본은 얼마 안되는 군부가 장악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이 군부들 역시 대단히 조직적이고 지능적인 부류들도 아니었다. 단지, 중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동남아를 점령해가는 과정에서 힘을 얻어 다들 뽕에 취한 것처럼 '할 수 있다!' 분위기에 휩쓸렸고, 그런 분위기를 누구 하나 멈출 생각도 없었으며, 애초에 정치에 관심 없는 일본 국민들은 별 생각없이 그런 분위기에 다같이 휩쓸린 끝에 그런 무리한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만약 그 시절 일본인들이 사회와 개인을 구분할 수 있을만큼 현명했다면, '우리가 대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거지? 정신 차리자' 고 말하는 지식인들도 여기저기 나왔을테고, 그런 의문에 수긍해서 정부의 행동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나왔을지 모른다. 하지만 역사에 가정은 없으니.
묻지마 범죄가 급증하고 있다는 건, 사회에 대한 증오가 늘어난다는 뜻이다. 이 말은 즉, 과거와 같이 사회와 개인을 구분하지 못한채 사회적 실체에 대한 막연한 분노를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회와 개인을 제대로 구분 못해 아직도 수십년 전 과거를 살아가는 북한이란 나라가 옆동네에 있다. 비록 지금 한국 사회가 다수의 한국인 개개인에게 비인간적인 삶을 강요하고는 있지만, 엄밀히 말해 그것은 특정 사회적 실체가 음모를 꾸미듯 행해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개인은 얼마든지 잠시 사회에서 물러나와 개인으로서의 온전한 삶에 머물러 볼 수 있다.
한국 사회에 비정상적인 부분이 많다 하더라도, 그 누구도 그런 비정상적인 현상을 정상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들 무기력한 개인이 되어 거대한 톱니바퀴의 일원으로 묵묵히 따라가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사회를 욕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개인이 정신을 차려야 한다. 사회는 어차피 알아서 굴러가는 것이고, 개인의 입장에서 자기 인생이 힘들다면, 자신의 인생을 구원해줄 사람은 자기 자신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