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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맘대로 Dec 05. 2023

기술 발전의 이면

삶의 에센스가 사라지고 있다.

인류사는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은 세상으로 발전해 왔을까? 과거에 살았던 조상들보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더 나은 인생을 살고 있을까? 각각의 정의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무조건 더 나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원시시대 사람들은 끊임없이 생존의 위협을 받고 살았지만, 지금의 사람들이 누리지 못한 낭만을 느끼며 살았을 수 있다. 자연과 함께 공존하는 삶에서 누리는 행복을 우리는 모른다. 반면 문명 이후의 사람들은 좀 더 안전한 주거지와 먹을 것, 입을 것을 얻게 되었지만, 한편으로 끊임없는 투쟁과 잔혹한 전쟁을 겪어야 했다. 


모두가 과거보다 훨씬 더 안전하고 풍요로우며 편리한 삶을 살게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분명히 잃어버린 것이 있다. 특히 요즘처럼 5년, 10년 주기로 시대가 빠르게 변하는 상황에서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고 있는지 확인하기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얻는 것과 잃는 것 플러스 마이너스 해서 결과적으로 점점 더 모두의 행복이 증가하고 있으면 좋겠지만, 요즘 분위기를 보면 그 반대인 것 같다. 즉, 이전보다 더욱 편리하고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된 반면, 점점 더 불안하고, 인내심과 참을성도 없어지고, 소소한 즐거움도 사라지고 있는 느낌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각자 모두가 자신만의 삶의 에센스를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IT 기술과 모바일 네트워크, SNS의 발달, 전세계 구석구석 깔린 결제 시스템과 유통망의 발달은 세상을 좀 더 효율적이고, 예측 가능한 곳으로 만들고 있다. 또한 모든 것을 경제적, 시간적 가치를 기준으로 평가 가능한 세상이 되었는데, 이것은 단순히 상품 서비스 뿐 아니라 사람, 그리고 각자의 인생 그 자체에도 적용이 된다. 모든 것이 대상화가 되어버렸다는 의미다. 


과거 아이들은 동네에서, 학교에서 자유롭게 놀다가 서로 뭔가가 통한 순간 자연스럽게 친해지곤 했다. 친구네 집이 잘 살든 못 살든, 친구가 성격이 어떻고 뭘 잘하든 못하든 그냥 마음이 통하면 친해지고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아이 뿐 아니라 청소년, 성인이 되어서도 만남은 그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고, 그게 당연했다. 연인 관계 역시 소개팅이든 미팅이든 아니면 주변에서 만나든 마찬가지였다. 서로에 대해 객관화된 정보가 별로 없으니 자연스럽게 느낌이 통한 상대끼리 만나고, 서로를 알아가기 위해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 인간관계도 그닥 자연스럽다고 보기 어렵다. 각자의 사회적 신분과 속성을 규정할 수 있는 수많은 데이터들 - 집안 재산, 거주지와 형태, 학력, 직업, 그 외 객관화 시킬 수 있는 다양한 조건들 - 이 먼저고, 그런 데이터가 서로 맞으면 그 때부터 만남의 '효율화'가 시작된다. 어떻게 보면 매우 예측 가능하고, 합리적인 인간관계가 가능해진 셈이다. 반면 객관화시킬 데이터가 그닥 좋지 않은 사람들은 빠르게 '인맥 시장'에서 밀려난다. 


다시 말하지만 모든 것엔 장점과 단점이 있다. 예측 가능한 데이터를 맞춘 후의 만남이 비인간적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쓸데없는 시간 낭비를 줄이고, 인간관계에서의 효용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사업하는 사람들이나 인맥을 이용해 일을 하는 사람들에겐 더할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다. 인간관계에서의 실패 없는 삶을 바라는 사람들, 친구 관계나 연애, 결혼을 통해 삶의 수준이 어느 수준 이상으로 유지되길 바라는 사람들에게도 좋을 수 있다. 


인생의 진로에 있어선 어떨까? 내가 어린 시절, 세상에 있는 수많은 전공 분야에 대한 정보들은 아이들이나 학부모들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 시절엔 성인들도 대부분 그저 자기 분야 일만 잘 알 뿐, 다른 분야에 대해선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아이들은 후에 진학을 할 때도 자기 마음이 끌리는 곳, 자신의 상상력을 키울 수 있는 곳을 막연히 선택할 수 있었다. 어쩌면 잘 모르고 진로를 정했기에 후에 진로를 트는 일도 많았지만, 중요한 건 모두 각자만의 이유로 진로를 선택했다는 사실이었다. 지금처럼 '돈'이나 '워라밸' 같은 것만이 기준이 아니었고, 순수하게 본인의 취향과 꿈을 향해 간다는 마음으로 선택하는 아이들도 많았다. 물론 부모의 권유로 선택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진로 선택 과정이 그만큼 다양했다는 의미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직업이 그저 '돈' '워라밸' 정도로 평가되고 있고, 이것이 학생들의 진로 선택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적성' '취향' '꿈' 같은 것은 이미 진로 지도에서 사라져버린지 오래다. 물론 단어 자체는 그대로 남아 있지만, 어쩐지 단어의 의미가 달라져 버린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적성에 맞는, 돈 되는 일을 찾아라' '취향에 맞는, 돈 되는 일을 찾아라' '꿈을 키울 수 있는, 돈 되는 일을 찾아라' 같은 느낌? 


한 사람이 자기 적성과 취향을 발견하는 과정은 때로 무척 힘들고 무척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자기가 무슨 일을 할 때 충족감을 느끼는지 알기 위해선 상당히 돌아가는 과정이 필요할 수도 있다. 이는 뒤에 설명할, 욕구와 욕망을 충족시키는 심리적 원리와도 관련이 깊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비효율적인' 과정을 생략하고 그저 수치로 표현할 수 있는 몇 가지의 지표로 직업을 미리 결정해버릴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너무 많은 객관적인 정보가 조금이라도 주관적인 개인의 취향과 욕망을 차근차근 탐구할 기회를 처음부터 박탈해버린 셈이다. 


요즘은 한 사람의 인생이 태어난 후 얼마 되지 않아 마지막 순간까지 결정되어버리고 있는 느낌이 든다. 어느 지역, 어느 부모, 어느 정도 수준의 집안에서 태어났는지에 따라 이미 상당 부분이 결정되고, 아이가 자라면서 성인이 될 때까지 보여주는 각종 퍼포먼스에 따라 그 아이의 인생 경로, 인간관계를 쉽게 예측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사회가 각 개개인을 합리적, 효율적인 방식으로 빠르게 사회 속의 위치를 배분해주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이 모든 것이 결국 세상과 인생과 관련된 수많은 통계적 정보에 대한 접근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출산하지 않는 젊은이들이 늘어나는 것은, 자신들의 상황을 고려 했을때 태어날 아이가 살아갈 인생이 뻔히 보이기 때문이다.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의 운명이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 없는데, 이는 고대와 중세 신분제 사회를 떠올리게 한다. 연애와 결혼을 하지 않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데 이것은 이성에 대한 관심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사회적 지표가 정해준 자신의 상황이 좋지 않다고 지레 짐작한 후 욕구를 거세시켜버린 것에 다름 아니다. 이는 불황 시기 일본에서 먼저 나타난 현상이기도 하다. 


과거보다 점점 더 많은 학생들이 안정적인 길, 한 푼이라도 더 현금을 만질 수 있는 길을 선호하는 경향도 뚜렷해졌다고 한다. 단순히 선진국형 불황 초입의 형태로 볼 수도 있지만, 이제까지와는 그 양상이 좀 더 극단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미 현존하는 모든 진로에 대한 경제성 평가 정보가 완전 경쟁 시장의 상황처럼 퍼져버린 상황이다. 학생들은 자기가 새로운 길을 뚫거나 막연한 꿈과 희망을 갖기 보다는 그저 현실의 선택지 어딘가에서 효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 합리적인 삶을 위한 최선이라고 받아들이는 듯 하다. 


삶의 진정한 에센스는 그 때 그 때의 순간에 가진 강렬한 욕구와 욕망을 향해 나아갈 때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몸은 아직 현대 사회의 거대한 시스템을 잘 모른다. 여전히 그저 자기 내면의 욕구와 욕망을 채우며 나아가는 생물학적 존재에 머물러 있다. 어린 아이가 유아기 시절 부모의 사랑을 못받거나 안전에 대한 욕구를 채우지 못한 상태로 자라면 어른이 되어 평생동안 끊임없이 타인의 관심과 사랑에 목매는 성인으로 자랄 수 있다고 한다. 인생의 매 순간 자연스럽게 올라오는 욕구와 욕망을 그 때 그 때 채우지 못한 사람은 그 시기에만 누릴 수 있는 인생의 에센스를 맛보지 못하고 나이만 들어버리게 될 수 있다. 


자기 마음 속 욕구와 욕망을 따르다 보면 어설픈 희망과 꿈에 젖기도 하고, 실수를 하기도 한다. 때론 많이 돌아가야 하는 인생을 살게될 때도 있다. 하지만 순간 순간 삶의 에센스를 느끼며 산 사람에게 과연 인생의 결과라는게 의미 있을까? 모든 인생의 결과는 결국 죽음 뿐이다. 우리는 어느 시점에 가서 인생의 결과를 맞이하고, 그렇게 완성된 성공적인 결과를 그 이후 죽음에 이르기까지 마음껏 누리며 살기를 바라지만, 인생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매 순간이 끊임없이 제자리로 돌아온다. 매 순간 어제와 다른 새로운 욕구와 욕망이 솟아나는게 인생이라는 의미다. 하루하루 그것들을 채우며 삶의 에센스를 느끼는 과정 자체가 인생이며, 모든 것을 채워 더이상의 욕구와 욕망이 남아있지 않다면, 그 때 남은 건 죽음 뿐이다. 


사실, 모든 욕구와 욕망은 채운 즉시 그에 대한 환상이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어린 시절 아이가 간절히 원하는 장난감을 손에 쥐고 나면, 얼마 안가 싫증을 낸다. 그러면 애초에 장난감을 줄 필요가 없었을까? 장난감을 손에 쥐고 싫증을 내기까지의 과정, 거기에 바로 삶의 에센스가 담겨 있다. 그렇게 자기 욕구와 욕망을 작은 것부터 채워나가면서 아이는 성장한다. 아이가 더 커서 학창시절 친구와 마음에 드는 이성과 교제를 해봐야, 나중에 어른이 되면 그 때 만났던 학우들 대부분과 관계가 끊어진다. 그러면 처음부터 교제를 할 필요가 없었을까? 그 시절 마음 속에서 자연스레 우러나오는 만남에 대한 욕구를 채우며 아이는 또 그 다음 단계로 성장한다. 학창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는 시간은 아이 인생 결과에 별 영향이 없을지라도, 그 자체로 아이에게 소중한 인생의 한 조각이다. 


아이는 크면서, 성인이 된 이후에도, 그렇게 자기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욕구와 욕망을 채워나가며 삶의 에센스를 맛보고, 그 과정에서 삶 자체를 즐긴다. 결과적으로 어떤 성공적인 인물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삶의 과정을 즐기며 사는 게 인생이다. 그런데 지금의 사회는 그런 과정들이 '비효율적인 건 아닌지' '시간 낭비는 아닌지' 자체 검열하도록 만든다. 해보지도 않고, 도전하지도 않은 채로 이미 삶의 많은 것이 결정나 버렸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젊은 세대들이 직장을 쉽게 그만둔다는 이야기들이 많다. 은둔형 외톨이들도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이는 요즘 젊은이들이 나약해졌다거나, 예민하고 까다로워져서가 아니다. 어쩌면, 이미 자신도 모르게 정밀한 평가 기준을 들이대는 지금의 효율적 사회에 대한 작은 반발일지도 모른다. 사회가 제시하는 평가 기준의 틀에 일일이 강박적으로 맞추며 사느니 그냥 사회를 외면하고 사는 것이 마음 편하다는 그들 나름의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의미다. 위에 언급했듯, 완벽한 연애와 결혼이 아니면 애초에 시작도 안하고, 완벽한 조건이 아니면 아이도 낳지 않는다는 마음이 결국 지금 사회의 혼인율과 출산율을 떨어뜨리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일 수 있다. 


처음에 말했듯, 세상 모든 변화는 장점과 단점이 있다. 불확실성이 사라지는 대신 삶의 에센스도 같이 사라지고 있는 지금의 세상이 이전에 비해 더 낫다, 나쁘다 판단할 순 없다. 그만큼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을 수 있다.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에 반해 얻게된 것은 무엇인지 알려면 10년, 20년쯤 지나봐야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무엇을 잃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해두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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