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어떤 교수가 조직 연구를 한다고 해서 프로필을 찾아본 적이 있는데, 조직 생활을 한 번도 안한 사람이더라. 아니 어떻게 조직 연구를 하지? 내심 궁금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오히려 조직 생활을 안해봤기 때문에 조직을 경험한 사람과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누구나 크고 작은 조직에 있다보면,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조직의 어떤 생리를 알게 된다. 조직의 생리를 설명하기 위한 요소들을 꼽아보면 남보다 더 높은 지위에 오르려는 개개인들의 욕망, 조직에 대한 충성과 그로 인해 채우려는 개인적인 욕망, 조직을 이용하는 각자의 방식, 책임을 최소로 지려는 거의 모든 사람들의 본능, 눈에 보이지 않는 조직 문화 등등 여러가지가 있다. 그런데 이 모든 복잡한 요소를 따져서 설명하느니, 어떻게 보면 그냥 외부에서 무심하게 객관적인 데이터로만 (학술적으로) 조직을 파악하는 게 조직 문제 해결에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동안 경험한 바로 조직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조직을 하나의 생명체로 보고 이 거대한 생명체가 생존을 위해 어떻게 각 구성요소들이 소통하고 움직이는지 보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자신이 일하는 조직의 문제점들이 왜 생기고 있는지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있다.
'나'라는 생명체가 있다고 하자. 나는 입으로는 '성공할거야' 외친다. 하지만 내 몸과 머리는 안다. 나는 별로 뛰어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근근히 먹고 사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걸. 그래서 내 머리 속에 대단한 아이디어나 근면함이 있어도, 굳이 노력하려들지 않는다.(뛰어난 인재, 참신한 아이디어 방치)
왜냐면 그렇게 리스크를 거는 것도 귀찮고, 근근히 저공비행만 하는 게 내 몸에 무리가 안가기 때문이다.(안정만 추구하는 꼰대 상사) 그래도 어느 정도 보상은 있어야 하기에, 달고 지방기 많은 음식도 먹는다.(눈 앞의 매출만 보는 경영진들) 그래도 한 번 몸 좀 만들어볼까 하고 열심히 운동해 보지만 (갑자기 삘 받아서 새로운 프로젝트 추진) 이내 곧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적당한 운동으로 바꾼다. (새 프로젝트 접고 그냥 하던 프로젝트 조금 바꿔서 진행) 그런데 신기하게 이렇게 사니 오히려 별 무리 없이 오랫동안 몸에 문제도 안일으키고 지낼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사회 속 나의 위치를 깨닫고, 세상이 각박해도 다들 살 길은 마련되어 있다는 걸 알게된다. 그래서 점점 더 무리하지 않고 그냥 편안히 하던 습성대로 사는 길을 선택한다.(보수적이고 한심한 조직 문화를 가진 기업인데 이상하게 오래 가는 기업)
원시 시대부터 원핵 세포 진핵 세포들과 같이 모든 생명체들은 서로 지지고 볶고 싸우다 한데 뭉쳐 더 큰 생물을 이루는 것이 생존에 더 유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세상 모든 생명체들이 수없이 많은 세포들로 이루어져 있듯, 고등 생물들 역시 장기적인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같이 모여 더 큰 생명체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더 큰 생명체를 만드는 건 이제 좀 힘드니, 독립된 개체로 모여서 더 큰 생명체처럼 움직이자 - 그렇게 탄생한 것이 조직이라고 볼 수도 있다.
어라, 그럼 조직 생활을 굉장히 싫어하는, 개인주의적인 사람들은 뭐지?
그런 사람들은, 엄밀히는 조직으로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지금 사회의 효율적인 조직 체제에 안맞을 뿐이다. 최소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추구해야 생존할 수 있는 극강의 경쟁 사회에서는, 조직도 그에 맞게 빡세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개인주의적인 성향, 인간관계 스트레스가 큰 사람들은 그런 지금의 조직에 적응을 못할 뿐이지, 분명 그들이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조직 형태도 언젠가는 만들어질 수 있다. 어쩌면 어딘가에서 그런 조직 형태가 조용히 만들어고 있거나 실험을 겪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의 조직 문화가 답답한 이유는, 우리나라가 처한 경제 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천연 자원도 관광 자원도 없고 땅도 좁은 나라에 주변에 강대국들이 많은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수출 밖에 답이 없다. 그런데 리스크를 걸만큼 여유롭지도 않다. 그러니 무슨 상품과 서비스를 팔든, 빨리 팔아 먹을 수 있는 것을 만들어야만 살 수 있다. 결국 마진과 가격을 낮게 잡고 사람을 갈아 넣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길이 된 거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봤더니, 오호라.. 기술혁신 뭐 그런거 모르겠고 그냥 사람 갈아 넣으니까 다 되네? 싶은 거다. 아마 관련 데이터도 이미 있지 않을까? 1) 장기적으로 기술에 투자해서 성공한 사례 2) 그냥 엉망진창이어도 사람 투입해서 이리저리 굴려보니 그래도 매출이 꾸준히 나오는 사례 - 비교해 보니 2)가 압도적으로 많은 거. 가장 좋은 성공 공식이 된 거고, 마치 성공의 꿈을 접고 저공비행 하는 삶을 유지하는 것이 낫다는 걸 깨달은 개인처럼, 기업도 그렇게 움직이는 곳이 많은 거다. 그러니 무슨 인재를 잘 활용하고 조직 문화를 챙기고 그럴 필요가 없어진 셈.
그렇다면 언제쯤 우리도 꽤 괜찮은 조직 문화가 퍼질 수 있을까? 이미 몇몇 기업들은 그런 조직 문화를 만들었을 수 있지만, 생각처럼 잘 안알려지고 있는 걸수도 있다. 난세에 영웅이 나온다고, 그런 조직 문화가 빛을 발하는 상황이 터졌을 때 그런 기업이 한 번 크게 쭉쭉 성장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성공 사례를 분석해보니 조직 문화가 그렇다드라, 하는 연구들이 퍼지고.
아무래도 지금은 때가 이르지 않나 싶지만, 나는 곧 좋은 때가 올거라고 생각한다. 저출산 여파가 닥쳐와서 실제로 위기가 오면, 결국 어떤 식으로든 변할 수밖에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