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기 자녀를 사랑한다는 말은 사실일까? 자녀를 학대하는 부모들, 심지어 버리는 부모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세상엔 자기 자녀를 사랑하는 '착한' 부모와 그렇지 않은 '나쁜' 부모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만약 그렇다면 착한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아무래도 정서적으로 더 안정되고 지원도 많이 받았을테니 긴 인류의 역사 속에서 나쁜 부모의 유전자는 모두 사라졌어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자녀를 정서적이든 물리적이든 학대하는 부모들이 사라지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 뿐일까. 겉으로는 자녀를 위하면서 자녀의 사회적 성공을 바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동료나 친구 자녀들과의 비교에서 기죽지 않기 위해, 자기 자신의 자존감을 위해 자녀를 사실상 학대 수준으로 교육하는 부모들도 많다. 이 모든 현상은 그런 부모들이 이기적이고 못돼먹어서일까?
그보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대가족 혹은 그 이상의 마을 공동체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부모 자녀 사이의 갈등이 충분히 희석될 여지가 많았다고 보는 것이 더 맞지 않나 싶다. 하루종일 아기와 둘이 있는 부모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 짜증 한 번 안내고 아이의 모든 요청과 칭얼거림을 받아주고 아이 컨디션에 맞게 움직이는 부모가 소수일 수 있다. 그런데 대가족 체제, 즉 할아버지 할머니 큰아버지 작은 아버지 큰이모 작은이모 큰고모 작은 고모 등등이 함께 살거나 근거리에 모여 사는 경우라면 전혀 상황이 달라진다. 어른이 아이를 케어하지 않아도 먼저 태어난 친척 형이나 오빠, 언니나 누나가 아이들을 케어할 수 있고, 부모에게 혼나는 아이를 조부모나 친척 어른들이 위로해 줄 수도 있다. 교육 역시 지금처럼 부모 홀로 지는 부담이 아니라 친척 모두가 공동으로 제각기 전문 분야(?)에서 스승 역할을 할 수 있다. 또한 애초에 큰 공동체 속에서 위아래 옆 사람들과 원활하게 지내는 경험을 통해 인간관계를 배우며 자란 아이들은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되어서도 자기 아이를 사람들 속에서 자라도록 안심하고 풀어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핵가족의 역사는 긴 인류 역사, 그것도 원시시대까지 생각하면 거의 수십만년의 기간 중 고작 수십년에 불과하다. 과거 의료나 위생 개념, 피임이 없었던 시절 영아 사망률이 50% 넘었다는 기록만 들먹이며 현대의 아이들이 옛날보다 더 월등히 좋은 환경에서 자라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외적으로는 그럴 수 있어도 내적으로는 어떨지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영아 사망률은 가족 공동체 문화와는 상관 없는 과학 기술 발전과 관련이 있는 것이고, 아이들의 정신 건강은 가족 문화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한다’는 말이 사실인지 묻는 순간, 우리는 사랑을 너무 단일한 감정으로 가정하는지도 모른다. 사랑은 보호 본능일 수도, 소유감일 수도, 불안과 통제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다. 그래서 어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면서도, 그 사랑을 아이에게 이로운 방식으로 표현하지 못한다.
더구나 진화가 걸러내는 것은 ‘착함/나쁨’이 아니라 특정 환경에서의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성향이다. 과잉 경계와 통제, 감정 조절의 취약함 같은 성향은 공동체가 완충해주던 시대엔 큰 문제로 드러나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고립된 핵가족 양육에서는 그 성향이 아이에게 직접적인 폭력과 압박으로 전환되기 쉽다. 공동체는 부모의 감정이 곧바로 아이의 세계 전체가 되는 것을 막아주는 완충 장치였고, 아이에게는 부모 외의 애착 대상과 중재자가 있었다.
물론 이것이 폭력의 책임을 구조에 떠넘기자는 뜻은 아니다. 어떤 폭력은 어떤 맥락에서도 폭력이다. 다만 ‘나쁜 부모’라는 설명만으로는 왜 같은 문제가 반복되는지, 무엇이 예방에 효과적인지에 대한 단서를 놓치기 쉽다. 핵가족을 되돌릴 수 없다면, 공동체가 했던 완충 기능을 어떤 방식으로든 되살리는 것이 더 현실적인 해답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