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의 시대

나마저 나를 외면하면

by 치의약사 PENBL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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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바일 네트워크 기술이 지금처럼 혁신적으로 발전하기 전, 즉 SNS나 소셜 미디어로 전 세계 사람들의 인생을 지금처럼 들여다볼 수 없었던 시절에는 누구에게나 세상과 미래가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만큼 그 때는 누구나 자신의 미래를 마음껏 상상해 볼 수 있었다. 어떤 진로를 선택하든 그 분야에서 어떤 일을 하며 어떤 사람들과 어울릴지 가늠하기 어려웠기에, 어떤 길로 가든 미래에 가슴 뛰는 일들이 펼쳐지리라 믿을 수 있었다. 또한 친구, 연인, 배우자로 누구를 만날지, 누군가와 결혼한다면 어떤 인생이 펼쳐질지, 아이를 갖는다면 그 아이는 어떻게 자랄지 역시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먼저 각 분야에 진출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알 수 없었을뿐더러, 전 세계 인생 선배들의 경험담을 듣거나 그들의 일상을 볼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는 빈자리를 상상으로 채우기 마련이다. 오늘 무언가를 열심히 하면 언젠가 보상이 따를 것을 꿈꾸며.


그러나 이제는 그런 상상의 나래를 펴기가 녹록지 않다. 소셜 미디어나 SNS로 전 세계 수많은 사람의 인생을 엿볼 수 있는 데다 모든 직업 세계도 미리 내다볼 수 있고, 각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도 훤히 꿰뚫어 보게 되었다. 결혼해 가족을 꾸린 수많은 사람의 모습도, 남들과 조금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도 목격하게 된 것이다. 물론 꾸며진 모습도 많겠지만, 아무리 꾸며내도 콘텐츠 총량이 늘어나면 그 속에 공통으로 담긴 삶의 진실도 자연스레 포착되기 마련이다. 그 공통된 삶의 진실은 단순하다 - 세상에 대단한 인생이란 없으며, 누구나 사는 모습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것. 이러한 삶의 진실에 다가갈수록 공허함은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오른다. 아직도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삶은 그 진실을 외면한 채 저 어딘가에 있을 더 멋지고 화려한 인생을 향해 달리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천 년 인류 역사에서 우리 조상들이 밝혀낸 삶의 진실은, 결국 인간은 생물이라는 굴레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가 느끼는 즐거움과 쾌감, 고통과 슬픔은 모두 뇌신경세포의 반응일 뿐이다. 따라서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에게 주어진 뇌 회로의 한계를 뛰어넘기란 요원하다. 이런 생물학적 지식이 없어도, 사람들은 이제 전 세계 수많은 사람의 삶을 엿보며 무의식중에 절감한다. 다들 자신에게 주어진 생물학적 한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대단해 보였던 삶, 누구보다 멋져 보였던 삶도 알고 보면 그저 미디어가 만들어낸 허상임을 간파하는 것이다. 정보가 제한되어 주변 사람들의 모습만 볼 수 있었던 과거와는 다르다.


그럼에도 사회는 여전히 개인에게 저 너머에 더 대단한 무언가가 있으니 몸을 바쳐 타인의 인정을 갈구하며 살아야 한다고, 지금 당신의 인생은 보잘것없으니 노력해서 벗어나야 한다고 채찍질한다. 사회에 구체적인 실체는 없지만, 만약 이를 거대한 유기체라고 가정한다면 계속 진화하고 발전하기 위해 개인에게 그런 목표의식을 주입하는 것은 당연한 생존 본능이다. 사회는 개개인이 모여 이루어지므로, 더 편리하고 풍요로운 세상에서 살려면 모두가 그런 최면에 빠져 사는 것이 결과적으로 이득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개인은 이미 너무 명민해졌고, 세상과 삶의 진실을 깨달은 사람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이러한 괴리감이 결국 지금을 공허의 시대로 몰아넣는 근본 이유다.


과거 수많은 사람이 국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시대가 있었다. 지금 기준으로는 미련해 보일지 몰라도, 적어도 그 시절 그렇게 희생한 사람들의 마음은 오히려 가슴 벅찬 충만감으로 가득했을 테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는 믿음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면 그 희생이 얼마나 숭고하게 다가오겠는가? 오래전 영화 매트릭스에서 빨간 약과 파란 약을 선택하는 장면이 바로 이러한 역설을 은유했다. 지금도 중동의 여러 국가에서 수많은 사람이 자신이 믿는 종교를 위해 기꺼이 순교를 택한다고 한다. 사후 세계가 그 종교의 교리대로 펼쳐질지는 중요하지 않다.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순교를 택한 사람들을 불행하다고 단정하는 태도는 오만이다. 적어도 그들은 살아있는 동안 종교에 헌신하며 큰 자부심과 뿌듯함을 느꼈을 테니까. 목숨을 바칠 정도로 강렬히 믿는 대상이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예전에는 막중한 책임을 짊어지는 자리를 선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직장에서 승진해 더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 국가 공무원처럼 나라를 위해 일하는 자리에서 더 높은 위치에 오르는 것, 선생님처럼 누군가를 지도하고 이끄는 자리 등이었다. 그러나 점점 많은 사람이 어차피 높이 올라봐야 책임만 가중될 뿐 삶의 질이 나아질 게 없다고 생각을 전환하는 중이다. 예전에는 어쨌든 높은 자리에 오르면 사회의 시선이 달라져서 선망의 대상이 되었지만, 지금은 그냥 그런 길이 마음에 드는구나 하고 치부될 따름이다. 실속주의가 만연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삶의 진실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모임의 장, 가족을 이끄는 가장, 직장 팀의 리더, 누군가를 가르치는 사람,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총괄 책임을 맡는 일 모두 과거보다 명예나 인정 욕구를 채우는 수단으로서 효용이 떨어졌다. 최근 사회 정의나 사랑, 우정, 명예 같은 무형의 가치보다 물질 가치를 추구하는 경향이 짙어진 것은 이런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무의식중에 더 많은 사람이 삶의 진실을 깨달을수록 실물 가치 외에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는 그만큼 더 허무하고 덧없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예전에는 특정 분야에서 실력을 갈고닦으면 본인도 뿌듯했지만 주변의 인정도 만족감의 큰 몫을 차지했다. 더 높고 책임 있는 자리는 그만큼 더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고, 그 역시 개인의 만족감을 한껏 고취했다. 자기희생을 해서라도 제자나 후배, 하급자를 위해 어려운 과업을 해내면 물질 보상 외에 정신 보상도 크게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시대는 저물었기에, 사람들은 더 이상 그런 이를 딱히 존경하거나 우러러보지 않으며 그저 '감투를 좋아하는 사람' 정도로 치부하곤 한다.


과거 명절엔 친척들이 모여 집안 어르신들과 함께 조상을 모시며 모두가 핏줄로 연결된 혈연관계임을 확인하고, 조상 대부터 이어져 온 가문의 일원으로서 서로 소속감을 다지곤 했다. 그러나 점점 명절 친척 모임은 형식적인 의례로 퇴색하면서, 이제는 오히려 조상 잘 둔 가문은 서로 모여 비교하며 스트레스 받기보다 각자 알아서 해외여행을 떠난다는 우스갯소리마저 도는 실정이다. 여전히 화목한 집안도 많지만, 분명한 건 공동체 일원으로서 개인의 정체성이 과거보다 옅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모든 시대 변화는 되돌릴 수 없고, 딱히 더 좋은 쪽이나 나쁜 쪽으로 나아간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그저 도도하게 흘러갈 따름이다. AI와 피지컬 AI, 그 이후의 기술이 계속 개발될수록 이런 경향은 더욱 심화할 가능성이 높은데, 이 모든 변화 뒤엔 결국 모든 사람이 본질에 좀 더 가까워져 과거보다 누구나 더 쉽게 삶과 세상의 진실에 다가가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한편, 무엇보다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과 세상에 미칠 영향력이 막대해지는 현실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개개인의 주체성이 더 강화되고 보장되는 방향으로 진화한다는 의미다.


이것은 누군가에겐 축복일 수 있지만, 과도기에는 모두에게 공허감을 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지금을 그 과도기로 본다면, 세상은 공허의 시대를 통과하고 있는 셈이다. 공허한 이유는 과거에 가치 있다고 믿어 많은 이가 매달렸던 대상들이 허무하게 빛을 잃어가기 때문이다. 과거에 수많은 사람이 명예, 자리, 누군가의 인정, 정의, 사랑, 우정 같은 무형의 가치를 위해 분투했지만, 그 가치들은 빠르게 소멸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허무함을 느끼는 사람이 늘어났는데, 이는 단순히 나이 지긋한 이들에게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즉 비교적 나이 어린 사람 중에도 애초에 그런 무형의 가치를 추구하는 유전·기질 성향을 가진 이가 충분히 많아, 이는 단순히 특정 세대에만 적용되지 않고 전체 세대에게 동시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관점을 바꾸면 어떤 사람들에겐 축복의 시대가 열렸다고 볼 수도 있다. 과거의 유물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며, 타인을 가치 기준으로 삼아 모방하는 일이 정답으로 여겨지던 시대가 저물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취향은 다른 사람들과 사뭇 다를 수 있다. '나'의 입맛은 남들보다 소박할 수도 있고, 남들과 달리 고급스러운 취미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남들 보기에 아무리 하찮아 보여도 나를 충만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이제는 마음껏 누려도 무방하다.


내 머릿속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지루함, 환희와 고통의 버튼을 꿰뚫고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다. 부모님이나 형제자매, 자식 그 누구도 완벽하게 내 뇌 속 회로 조작법을 해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지금 시대는 개인이 나이와 성별, 사회 지위나 과거에 자신을 옭아맸던 여러 조건과 상관없이 무엇이든 선택하고 시도할 수 있는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개인이 선택하고 시도할 수 있는 선택지는 그만큼 다채로워질 것이다. 이런 시대에 적응하는 가장 좋은 길은 역시 지난 수천 년 동안 내려온 삶의 지혜와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에게서 비롯된 단순한 진리 한마디, 즉 나 자신을 알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라는 가르침이다. 나마저 나를 외면하고 남들 기준과 시선에 시달리면 공허감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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