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치전원 학생 시절 학번 담당 교수님, 레지던트 선배들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가진 적이 있다. 그 때 자리엔 미혼 여자 선배들이 몇 있었다. 술과 밥을 함께 먹다 결혼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교수님은 대뜸 '아내는 음식 잘하는 여자가 최고지' 라고 말했고,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여선배들의 표정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교수님은 음식을 잘하는 게 부인의 제일 가는 덕목이라며 썰을 푸셨고, 자리에 앉아 있던 몇 남학생들은 괜히 민망해하며 교수님 말에 동의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음식 잘하는 여자가 아내로서 최고다 - 이 말은 분명 듣는 사람이 누구든 - 당사자의 부인이 들어도 기분 나쁠만한 느낌의 말인 것이 분명하다. 아내를 밥하는 아줌마 취급하는 뉘앙스가 담겨 있다고 느낄만도 하니까. 그러나 우선 감정적으로 보기 이전에,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 역시 그 말 표면의 의미로써만 그 말을 쓴 게 아닌 것이라고 생각한다. 알고보면 그런 표현을 통해 어떤 성향과 성격, 혹은 특기와 재능을 설명하려고 했을텐데, 그게 투박하게 나온 것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음식을 잘하는 사람, 특히 가족을 위한 음식을 잘하는 사람은 여성이든 남성이든 대단히 귀한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돈을 벌기 위해 식당에서 요리를 하는 것과 집밥을 잘해서 가족들에게 음식을 잘한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매우 다르다. 전자는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수입을 얻기 위한 직업적 능력을 개발한 끝에 받을 수 있는 평가고, 후자는 애초에 스스로 남을 생각하는 마음 - 특히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을 위하는 마음 - 을 갖지 않는 사람은 결코 받을 수 없는 평가다.
즉 직업인으로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가족을 잘 먹이기 위해 음식을 잘하려면, 우선 본인이 그만큼 따뜻한 마음, 진심어린 마음을 갖고 있어야 한다. 여기에 더해 센스와 성실함, 정성, 예술적 감성도 필수다. 요리는 하면 할수록 더 깊은 맛을 낼 기술이 늘고 세상 수많은 재료와 무한한 방법론으로 계속해서 새로운 영역의 탐구를 할 수 있는 분야라는 점에서 하나의 예술 영역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오랫동안 먹고 살기 바쁜 시대여서 그 가치를 별로 인정받지 못했을 뿐이다. 애초에 타고난 센스와 예술적 감각이 없으면 요리를 잘 할 수도 없다. 그리고 음식은 요리만 달랑 한다고 끝이 아니라, 담아내는 그릇에 대한 교양 지식, 다른 사람이 무엇을 먹고 싶어하며 각자의 취향이 어떤지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고도 바로 알아낼 수 있는 타고난 공감력 등등 여러가지 재능이 필요한 영역이다. 남겨진 설겆이와 뒷정리는 덤이다. 그게 귀찮으면 애초에 요리를 시작할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음식을 잘하는 여자 / 남자' 는, 직업인으로서가 아니라 가족이나 친한 지인들에게 그런 평을 들을 정도면, '마음이 따뜻해서 남을 배려하고 공감하는 마음이 깊을 뿐 아니라 예술적 센스와 타고난 손감각, 성실성을 갖춘' 사람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음식을 잘하는 아내가 최고다' 라는 말은 사실은 마치 '잘생긴 남자' '아름다운 여자' '타고난 재능이 있는 능력있는 사람' 이 최고라고 말하는 것과 동일한 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오랫동안 이런 성향을 고급스럽게 표현할 어휘가 부족하고 (실은 지금도 한 단어로 표현할 수가 없다. '가정적' 이라는 말은 어딘가 약하다) 오랫동안 집밥 잘하는 = 그냥 사회 생활 안하고 집에서 내조나 하는 듯한 뉘앙스로 살짝 무시 받아온 것이 문제였을 뿐이다. 음식을 잘하는 사람의 매력은 여자 / 남자를 가리지 않는다. 남자로서 주변인들에게 음식 잘한다는 평을 받는 사람들을 보면 결코 기술적인 부분만 잘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위하는 따뜻한 마음을 품을 줄 모르는 사람은 가까운 사람에게 그런 평가를 받을 수 없다.
오랜 세월동안 줄세우기, 경쟁에만 익숙한 사회에서는 이처럼 분명 사람들의 어떤 특수한 매력이나 재능, 남들보다 뛰어난 특기를 나타내려고 했으나 그다지 좋지 않은 뉘앙스로 변질되어버린 표현들이 남아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일상에서도 사람들이 어떻다고 말할 때 '과묵한 사람' '재미있는 사람' 처럼 언뜻 들어서는 의미가 모호한 표현을 쓴다. 과묵한 사람이라는 것은 정말로 늘 말이 없다기 보다는 덤벙대지 않고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일테고,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말은 밝은 심성을 가진 사람을 뜻하는 것일테다. 그러나 단어, 언어 자체에만 집중하다보면 그 말 뒤에 숨겨진 본질적 의미가 가려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