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의석 Aug 02. 2021

한국사회에서 남들과 다르게 산다는 것

끝나지 않는 나 자신과의 쟁투

단톡이 또 한참 쌓여 있다. 부동산, 주식, 육아, 코로나. 아무개의 아파트 가격이 오르고, 어떤 이는 청약에 당첨이 되었다. 어떤 날은 백신을 맞을 거냐, 또 다른 날에는 어린 아이와 함께 갈 만한 콘도가 어디냐 묻는다. 잊을 만 하면 한 번씩 누군가 결혼을 하고, 이직을 하고, 새 차를 뽑는다.


삼십대의 마지막을 살고 있다. 만으로는 서른 일곱. 어느새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나이를 먹어버린 것 같다가도, 백 살을 산다고 생각해보면 이제 갓 1/3 지점을 넘어섰을 뿐이라는 걸 깨닫는다. 설령 80 전후에 생을 마감한다 하더라도 아직 절반도 채 살지 않았으니, 아직도 나에게는 제법 많은 시간이 남아 있는 셈이다.


문득 지난 삶을 돌아본다. 남들처럼 살 기회가 나에게도 없지 않았다. 아니, 많았다. 학부 졸업과 동시에 대학원에 가서 전문연구요원을 할 수 있었다. 그대로 박사까지 마쳤다면 미국으로 포닥을 가거나 삼성전자 혹은 하이닉스에 들어갔겠지. 공군 장교 전역 후 취직을 할 수도 있었다. 대기업에 갈 수도, 군 시절 특기를 살려 국정원에 갈 수도 있었으니 이것 역시 나쁘지 않아 보인다. 국제개발이란 허울 좋은 분야 대신 좀 더 실용적인 다른 학문을 공부했어도 괜찮았을 것 같다. 어쩌면 유학과 해외에서의 삶 대신 고시를 치는 데 에너지를 투입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순간에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영 내키지 않았다. 조직 생활을 좋아하지 않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같아지는' 것 같아서 싫었다.


그랬다면 후회했을까? 살아보지 않았기에 확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때는 그랬을 것이다. 가보지 않은 삶 - 내가 실제 걸어온 삶 - 을 늘 동경하며 현재에 만족하지 못했을 게 틀림없다.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는 건 현실세계에서나 평행세계에서나 마찬가지였겠구나 생각하니, 마음 한 켠에 묘한 위안과 씁쓸함이 공존한다. 시간이 더 지난 후에는 어땠을까? 계속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마음 한 구석에 꿈을 품은 채 노예처럼 지하철에 실려 출퇴근을 반복하고 있었을까, 아니면 나름 적응해서 적당히 평범하게 '잘' 살고 있었을까? 그도 아니면 소위 사회적으로 '성공한' 삶을 영위하고 있을까? 모르겠다. 아는 거라곤 그런 생각이 의미가 없다는 사실 뿐. 아주 잘 알고 있다. 내 나름대로는 매번 최선의 선택을 했다는 것을.


그래, 다르게 살고 싶었다. 평범한, 평범해 보이는 삶은 싫었다. 지루하고 재미없는 너무나 빤-한 길처럼 느껴졌다.


다르게 살고자 했던 노력의 대가는 혹독했다. 늘 힘겨웠고, 항상 불안했다. 이렇게 위태롭게 버티다 어느 한 순간, 단 한 번만 발을 헛디디면 바로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질 것 같았다. 그러다가도 언제나 솟아날 구멍은 나타났다. 어디선가 문 하나쯤은 열렸고, 못 이기는 척 그 흐름을 따랐다. 인생의 수많은 난제들은 지나고 나면 대부분 별 것 아니었다. 얼핏.. 그럭저럭 잘 살아온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만족스럽지 않았다. 이렇게 계속 사는 게 맞나 싶으면서도, 달리는 열차에 이미 올라탄 이상 그저 계속 가는 것 외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멈칫거리면서도 눈앞에 닥친 일들을 핑계로 의구심을 옆으로 밀어둔 채 못 본 척 외면했다. 더 이상 이 자리에 머무르고 싶지 않았건만, 그렇다고 감히 뛰어내릴 용기도 없었다.


'노오력'이 부족했던 걸까. 아니, '다르게' 살기엔 여전히 한국 사회가 적합한 공간이 아니다. 그걸 몰랐던 것이, 정확하게는 머리로만 대강 알았던 것이 첫 번째 문제다. 다르게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곳에서 다른 방식으로 살기를 원하지만, 동시에 남들과 같은 '성공'을 갈구하는 것. 이 구제받을 수 없는 역설이 근본적인 문제다.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여기는, 나와 다른 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배척하는 사회에서 '다르게 살기' 위한 용기를 내려면 현실부터 제대로 파악했어야 했다. 나는 알면서도 기꺼이 용기를 낸 범이 아니라, 멋 모르고 덤벼든 하룻강아지였다.


그 역설이 발원하는 곳이란 결국 내 마음이다. 두 번째 문제다. 저 높은 곳에 제멋대로 기준선을 그어놓고 그에 다다르지 못하는 자신을 책망하는 마음. 행복을 수식으로 나타내면 '가진 것/바라는 것'이라는데, 분모가 무한대에 가까우니 행복에 다다르기란 난망했다. 그러면서도 순진하게 그저 나의 일을 하면 내가 바라는 것들이 자연스럽게 주어질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리하여 나에게 삶이란, 불타는 모르도르로 향하는 호빗 프로도의 긴 여정과도 같았다. 목숨이 몇 개라도 모자랄 길 위의 위협보다도 더 두려운 건, 몸에 지닌 절대반지와도 같은, 손에 끼우기만 하면 나를 갉아먹으려 달려드는 내 마음이었다.


매일매일, 그것은 내게 타협하라 말한다. 정신 차리라고, 애처럼 굴지 말고 이제 '철 좀 들라' 한다. 안다. 현실에 발 디디고 일상을 살아내야 한다는 걸. 그 최소한의 책무를 거부하려는 게 아니다. 그렇지만 그 타협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어쩌면 바로 그 길이 낭떠러지일 수 있다. 더 이상 남들과 다른 삶도, 비슷한 삶도 아닌, 그렇다고 어떤 '성공'을 기대할 수도 없는, 그저 그런 색채 없는 삶.


이제까지와는 다른 선택을 할 것이다. 하지만 다음은 어디일까. 이미 바다로 나온 삶이다어디로 가야 좋을까. 항구에 정박한 배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다음 항해를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어쩌면 이런 '다른' 삶은 처음부터 내 그릇에 맞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대로 어영부영 조금 더 가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는 새 모두 소진되어 재가 되어버릴까 두렵다. 제대로 한 번 불타오른 적도 없이. 그럼에도 어떻게든 다시 불을 붙여 봐야 할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