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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석 Oct 16. 2021

'애주가'에서 '환자'로

여지껏 받아들이지 못한 나의 후천적 정체성

6년 전 해외파견을 위한 신체검사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유명 축구 선수들이 팀을 옮길 때 "메디컬 테스트만 남겨 놓은 상태"라고 뜨는 기사가 사실상 이적이 확정되었다는 의미와 동일하게 쓰이듯, 기업이나 기관 채용 시 신체검사라고 하면 통상 면접까지 통과한 상태에서 의례적으로 치르는 것이다. 그 단계에서 탈락했다는 건 굉장히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실제 검진결과는 혈압, 콜레스테롤을 포함해 여러 면에서 상당히 심각했다. 신장에 관리가 필요할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아직 닥치지 않은 미래의 일이었다. 불과 1년 반 전 조직검사에서 대학병원 의사는 특별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아직은 약을 먹어도 되지 않을 것 같다며 정기적으로 검사만 해보자고 했다.


인터넷에서 신장 전문의를 뒤졌다. 대학병원보다는 은퇴 후 개인병원을 차린 명의가 낫다고 판단했다. 신장에 초점을 맞춘 검사 결과, 신기능이 많이 떨어져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생각보다 많이, 굉장히 많이. 의사는 이대로 진행되면 몇 해 지나지 않아 투석을 하게 될 수도 있다고 하였다. 투석이라... 당시 나는 33세, 만으로는 31세에 불과했다. 이마에 땀이 맺혔다. 어느 무더웠던 여름,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감도는 진료실이었다.


당장 투석을 필요로 하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사회적 사망선고를 받은 느낌이었다. 그뿐인가, 투석 다음에는 이식이다. 언제 내 순서가 돌아올지 모르는 기약 없는 기다림 속에 삶을 연명하는 내 모습이 그려졌다. 그것이 곧 죽음과 동의어는 아닐지라도, 물리적이고 실제적인 '죽음'과 그리 머지않은 모습인 것만은 확실했다. 극한의 공포가 나를 덮쳤다. 정말 무서웠다. 죽음, 죽음, 매일 일어나는, 태어나는 것만큼 당연하며 어쩌면 흔하다고도 할 수 있을 그것. 그 '언젠가'라는 것이 언젠가는 오고야 말겠지만, 실제 닥치기 전까지는 남의 일같게만 느껴지는 그것. 지금은 그 모습 역시 누군가의 '삶'이고, 그 모든 삶이 딱히 다르거나 이상하거나 틀리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지만, 그 당시의 나는 너무 젊고 어렸다. 그 나이에 자신의 물리적·사회적 죽음이 피부로 와닿는 경험을 해 본 이가 얼마나 될까. 눈앞에 놓인 현실은 감당하기에 너무 버거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의사는 신장 기능을 회복시켜주는 약은 없다고 했다. 더 나빠지지 않게, 나빠지는 속도를 최대한 늦추는 게 최선이라고 했다. '현상 유지'를 위한 약은 물론 매일 먹어야 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앞으로 죽을 때까지 몇 십년 동안 매일 약을 달고 살아야 한다니, 상상만으로 끔찍했다. 나의 일부가 영구적으로 고장난 기분이었다. 영양사는 나에게 여러 장의 프린트물을 건네주며 피해야 하는 음식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 가이드라인에 따라 식재료를 거르면 남는 게 거의 없었다. 이걸 지키면서 대체 뭘 먹을 수 있는 거지?


평소 가리는 음식이 없던 내게 저염, 저단백, 저칼륨 식단을 유지한다는 건 고통 그 자체였다. 맵고 짠 모든 음식은 0순위로 피해야 했고, 육류와 유제품은 물론 채소와 과일 섭취량까지도 엄격하게 통제해야 했다. 자극적인 음식이 많은 한국에서는 집 밖에서 먹을 수 있는 메뉴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소주, 맥주, 위스키, 막걸리, 종류를 가리지 않고 즐기던 술까지 끊었다. 지금까지의 삶에서 내가 가장 사랑했던, '애주가'라는 나의 정체성을 이제는 떠나보내야만 했다. 그것도 평생.


그러나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대로 투석까지 가도록, 그리고 더 나빠져 결국 이식을 기다려야만 하는 처지로 나 자신을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그 상황만은 피해야 했다. 어떻게든 현재 수치를 유지해야만 했다. 직접 식사를 챙겨 먹고 2개월마다 검사를 하며 관리를 해나갔다. 내가 가장 좋아하던 음식들과 멀어지는 시간이었다. 간장게장, 묵은지돼지김치찜, 매운 닭갈비와 볶음밥, 제육볶음, 돈까스와 튀김, 각종 찌개와 탕, 그리고 삼겹살에 소주까지. 우유, 요거트, 초콜렛, 아이스크림, 그리고 달콤하게 입에서 녹는 아이스크림까지.


술자리에서는 술을 마실 수 없었고, 친구를 만나도 카페에서 커피만 마셨다. 유일하게 사수한 것이 커피였다. 유제품을 먹으면 안 되어서 라떼 포함 다른 음료는 피해야 했지만, 나는 원래 아메리카노 류의 블랙커피만 마셔왔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른 한의원에서는 커피도 피하는 게 좋겠다 했지만, 음식이며 술이며 갑자기 다 끊고 있는 마당에 커피까지 내칠 수는 없었다. 마지막 남은 삶의 기호품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했던 신세계백화점 강남점(고속터미널 위치) 지하 식당가의 풍경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정확히는 그 때의 냄새들이다. 온갖 음식들이 맛깔스런 자태를 뽐냈다. 시각적인 자극이야 눈을 돌리면 그만이지만, 후각은 그럴 수 없다. 숨을 곳이 없었다. 내가 애초에 경험해보지 못했던 맛이었다면야 몰라도, 그 식감을 나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넓은 공간에 서 있던 나의 모습은 재즈와 클래식 선율 아래 죽어나가는 사람들을 비추는 오징어게임의 한 장면과도 같았다. 백화점의 밝은 조명과 바삐 지나가는 사람들, 그 사이사이 놓인 음식들이 오직 나만 느낄 수 있던 잔인함을 증폭시켰다.




인간의 적응력이 대단하다는 클리셰는 닳고 닳도록 들어왔지만, 정말 불가능한 것은 없을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며 새로운 식습관에 익숙해지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고, 의사의 우려와는 달리 일을 하며 사회생활을 해나갈 수도 있었다. 강렬하게 원하던 저 음식들도, 사랑해 마지않던 술도 별로 생각나지 않는다. 사실 그렇게 된 지도 오래 되었다. 이 정도의 강력한 통제를 나 자신에게 가할 수 있으리라고는, 나조차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20대 내내 나는 내가 독하지 못하다고, 끈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틀렸다. 그럴 만한 대상을 찾지 못했을 따름이다. 그리고 이제는 의사가 이 정도로 관리할 수 있는 사람은 열 명 중 한둘도 되지 않는다며 나를 성공사례라 부른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그 감사함을 체감하며 삶을 대하지는 않는다. 괜찮다는 건 좋아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더 나빠지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그 수준을 유지하는 것조차 어렵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나, 그게 나의 삶에 어떤 만족감이나 진정한 감사함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여전히 여러 어려움이 많다.


우선 나는 '먹는 즐거움'을 잃었다. 여러 시행착오를 겪어 가며 식단관리 초기보다는 음식의 폭을 어느 정도 넓히는 데 성공했지만, 피해야 하는 음식이 훨씬 많다. 사실 진짜 문제는 특정 메뉴를 먹고 안 먹고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이걸 먹어도 되나, 먹는다면 어떤 영향이 있을까, 안 좋아지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참아야 할까, 아니면 한 번만 눈 딱 감고 먹고 나서 또 한동안 먹지 말까, 거의 매 끼니마다 이런 고민을 하는 데 들이는 정신적 에너지가 진짜 큰 문제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하지 않을 고민이다.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이라면 조금 다르겠지만, 그래 봐야 그 사람들에게는 생존이 걸린 사안은 아니지 않나. 게다가 맛있는 음식을 먹음으로써 얻는 즐거움을 모조리 포기해야 한다는 건, 그만큼 다른 곳에서 비슷한 양의 즐거움을 채워야 겨우 다시 '0'으로 맞출 수 있다는 뜻이다. 대체 어디서 부족한 즐거움을 상쇄하고, 나아가 만족감을 가져다주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며 삶의 어려운 난관을 헤쳐나갈 힘을 얻을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쉽게 피로를 느낀다. 조금만 뭘 해도 지치고, 별 것 하지도 않았는데 피곤하다. 잠도 많이 자야 한다. 요즘은 최소 8시간은 자야 하루를 정상적으로 보낼 수 있는 것 같다. 그보다 적게 잔 날은 오후만 되면 어김없이 피곤하고 졸리다. 낮잠을 잔다면 괜찮지만, 그렇지 않은 하루를 보내면 다음날 아침부터 일어나기가 힘들다. 단지 하루 조금 무리했을 뿐인데, 그것도 건강한 사람에겐 전혀 무리가 아닌 수준인데 말이다. 비슷한 연배의 다른 사람들처럼 시간을 아끼고 때로는 잠을 줄여서라도 더 노력하고 뭔가를 해야겠다 생각하면서도, 할 수 없다. 정말 물리적으로 힘이 들어서 못 한다. 운동을 꾸준히 하지만 이것도 지나치게 하면 탈이 난다. 조금만 무리하면 몸이 감당을 못 하는 탓에 한동안 적당한 밸런스를 찾지 못해 애를 먹었다.




이쯤 되면 그냥 내 건강 수준에 맞게 적당히 만족하고, 이렇게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살 수 있다면 좋겠는데, 나는 아직 이 정체성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무엇보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렇지 않아보이기 때문이다. 얼핏 봐서는 건강해보이고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조금은 역설적이게도, 내가 관리를 잘 해온 덕분이기도 하다. 나 스스로도 내가 문제가 없는 것처럼 인지하고 있다. 약은 여전히 매일 먹고 있지만 6년 정도 지나면 그저 삶의 일부가 된다. 식단 관리 역시 가끔은 식사를 직접 챙기다 보면 짜증이 불쑥 치솟을 때는 있지만 - 가끔 집에서 삼시세끼 차리다 보면 말그대로 하루가 다 간다 - 그래도 완전히 습관이 되어서 익숙하다.


이렇게 살다 보면 내가 조금만 방심하거나, 약간 무리하거나, 살짝 잘못되어도 더 이상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처할 수 있다는 '환자'라는 사실을 잊게 된다. 실제로 잊고 살고 있다. 내가 건강하며 남들처럼 할 수 있다는, 아니 나라는 사람은 그 이상 해내야만 한다는 나의 자아는, 만성 신장병 환자라는 불가항력적 핸디캡을 안고 있는 나의 육신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내가 안고 있는 불안정의 근본적인 원인 역시 이 부조화에서 비롯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늘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무언가 더 해야만 할 것만 같은 강박에 휩싸이며, 그럼에도 그러지 못하는 내 육체적 상황을 탓하고, 결국 그걸 극복해내지 못하는 나 자신을 책망하기를 반복한다. 그건 아무리 강한 정신적 의지로도 극복할 수 없는 것임에도. 이 모든 걸 머리로는 알아도 마음으로는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왜일까? 진정으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길임을 알면서도. 그리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 지점에서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시작이란 걸 해볼 수 있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직관적으로 하면서도. 그 정체성의 수용이 나는 아직 어렵다.


어쩌면, 차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망가지면 나 자신의 가치도 떨어질까봐, 아무도 나를 거들떠보지 않을까봐, 사회적으로 뒤처지고 고립될까봐, 그 누구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을까봐. 아, 그랬구나. 이 비루한 외로움과 어린 아이같은 연약한 두려움이 진짜 내 감정이구나. 나는 그저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았나보다. 그래서 그렇게 독하게 버텼던 거구나. 혼자가 되기 싫어서.


고생했어, 잘했어, 정말 수고 많았어.


이것뿐이다, 내가 나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라는 게. 괜찮아, 괜찮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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