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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석 Jun 09. 2021

삶과 죽음의 아웃소싱

아웃소싱 권하는 사회

장례식에는 정말 불가피한 사유가 있지 않은 한 참석하려고 한다. 기쁜 일에는 대개 이미 축하할 사람들이 많기에 나 하나 빠진다 하여 그리 티가 나지도 않겠으나, 슬픈 일이 생기면 그 상실과 아픔을 나눠질 사람이 충분하다 하여도 나 하나쯤 더 얹어주어야 할 것만 같다. 흰 벽지로 둘러싸인 방에 흰 종이를 덮은 채 일사분란하게 늘어선 횟집 테이블이 주는 메마름 때문인지는 몰라도, 사람이 들어차지 않은 장례식장에 들어설 때면 왜인지 더 가슴이 저리다. 그래서 나는 바글바글, 시끌시끌한 장례식장이 좋다 ('좋다'는 표현이 허락된다면). 이게 결혼식에는 봉투만 보내더라도, 부고에는 가급적 응하는 이유다.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의 생전 다양한 모습과는 달리 누군가를 영원히 보내는 일은 천편일률적인 양상을 보인다. 이 시대의 '죽음'이란, 철저하게 분업화된 비지니스다. 사람들은 더 이상 각자의 집에서 생을 마감하지 않는다. 비단 죽음이 찾아오는 그 순간만을 이르는 것도 아니다. 몸이 아플 때부터 발인 이후 고인을 떠나보내는 그 모든 과정이 마무리되기까지, 장례 절차란 모든 톱니바퀴가 촘촘히 맞물려 빈틈없이 돌아가는 공장을 떠올리게 한다.


병원 또는 요양원의 입원실에서 장례식장으로 이 세상의 마지막 무대가 옮겨지고 나면, 병원과 계약을 맺은 급식업체가 전국 어디에서나 동일한 메뉴를 내놓는다. 전, 무침, 떡, 과일, 그리고 육개장 한 그릇. 삼일장을 마친 다음부터는 상조회사의 영역이다. 실려나가는 관을 따라 화장터로 향한다. 은행이나 주민센터에서 그랬듯이 전광판에 지나가는 번호를 보며 순서를 기다린다. 납골당 혹은 수목 아래 고인을 모시면 모든 절차가 마무리된다. 이제 정산의 시간이다. 3일간 오갔던 손님들이 낸 부의금으로 병원에 입원비와 장례식장 비용을, 급식업체에는 식대를, 상조회사에는 운구 및 화장 비용 등을 지불한다. 한반도 이남 어디에서나 같은 풍경을 만날 수 있다. 돌아간 이와 남겨진 이의 면면을 제외하고 모든 것이 동일한 이 거대한 산업은 마치 24시간 쉴 새 없이 돌아가며 완성품을 조립하는 컨베이어 벨트 같기도 하다. 자본주의와 편의주의의 산물인 이 차갑고 냉정한 생태계 안에 따뜻하게 남아 있는 게 있다면 떠나는 이의 마지막 온기를 담은 작은 나무상자 뿐이다. 대체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모든 대한민국 사람들이 동일한 과정을 반복하는가? 


어디 장례 뿐일까. 대한민국의 많은 것들이, 어쩌면 거의 모든 것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비지니스가 된 지 오래다. 특히 결혼식은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식장을 알아보고, 식대를 추려본다. 사진을 찍고, 드레스 '투어'를 하고, 그 사이 짬을 내어 종로와 청담동을 돌며 예물도 봐야 한다. 결혼식 당일에는 아침 일찍 미리 예약해 둔 샵에 가서 머리와 화장을 준비한다. 스드메(스튜디오, 드레스, 메이크업)라는 단어는 이제 고유명사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게 끝이 아니다. 형식적인 예식을 번갯불에 콩 볶듯 마치고 나면 정신 없이 신혼여행을, 아니아니, 고갱님 정산부터 하셔야죠, 축의금을 왜 받았는데요. 이 모든 과정을 혼자 하려니 죽을 맛이라 중간에서 조율해주는 코디네이터(웨딩플래너)가 존재하고, 그도 모자랐는지 아예 웨딩'박람회'라는 걸 공공연히 개최한다. 이쯤 해서 박람회란 본디 무엇이었는지 사전적 의미를 확인해 본다.


박람회 (명사) 생산물의 개량ㆍ발전 및 산업의 진흥을 꾀하기 위하여 농업, 상업, 공업 따위에 관한 온갖 물품을 모아 벌여 놓고 판매, 선전, 우열 심사를 하는 전람회.


결혼을 둘러싼 모든 일이 거대한 '산업'임을 증명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단어가 있을까. 혹시나 싶어 '상조박람회'도 한 번 검색해 본다. 이런 건 듣도보도 못했는데, 설마 이런 박람회가 있지는 않겠지? 엔터를 누르기 무섭게 뜨는 '상조·장례문화 박람회'. 아직 순수성을 잃지 않은 나 자신에게 축하를 건네야 할 것 같다. 내친 김에 하나 더. '돌잔치박람회'. 와우, 어김이 없잖아, 경조사 3대장 만세다. 누군가의 출생부터 제 2의 인생 혹은 삶의 새로운 시작을 거친 뒤 그 사람을 떠나보내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한 인간의 삶에서 기념할 만한 주요 이벤트가, 그리고 그것들을 대하는 방식이 이토록 닮았다는 사실. 탄생도, 결혼도, 죽음도, 모두 개량과 발전이 필요한 '생산물'이자 판매와 선전, 그리고 우열을 가려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 인간의 전 생애에 걸쳐 돈과 형식의 굴레를 벗어날 도리는 없는 걸까.


다시 묻고 싶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우리 모두는 이 동일한 과정을 반복하는가? 




아웃소싱이란 통상 기업이 업무의 일부를 제3자에게 위탁해 처리하는 것을 이르지만, 그 본질은 '돈을 주고 시간을 사는 것'이다. 보통 우리들 대부분은 시간을 내주는 대신 돈을 받지만, 궁극적으로 더 귀한 재화는 시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아웃소싱 자체가 꼭 나쁜 건 아니다. 기업 뿐 아니라 개인에게도, 여건이 허락하는 한 돈을 주고 시간을 사는 편이 낫다. 그게 오늘날 모두가 경제적 자유를 부르짖는 이유 아니던가?


하지만 삶과 죽음의 영역마저 굳이 이렇게 아웃소싱할 일인가 하면, 그렇다고 대답하기에는 못내 서글퍼진다. 예전처럼 태어난 첫 해 동안 건강하게 살아남은 것을 기념할 필요가 없다면 차라리 안 하면 될 일이고, 그럼에도 첫 생일을 기념하고 싶다면 조금은 가볍고 행복한 마음으로 할 수는 없는 걸까? 평생을 함께 할 동반자와의 새로운 삶의 순간을, 왜 우리 모두는 그렇게 미뤄둔 숙제 처리하듯 하나하나 '해결'해나가기 바쁜 걸까? 한 사람이 영영 우리 곁을 떠나는 순간, 고인과 함께 한 시간을 떠올리며 그 사람과의 마지막을 차분히 보듬을 수는 없을까? 그게 남은 우리에게도 더 나은 삶의 의미를 건넬 것 같은데.


고용, 노동, 생산, 소비, 여가... 모든 것을 떠넘기는, 가히 아웃소싱 권하는 사회다. 그렇게 인생의 숙제를 해결하고 해치우며 살면 우리에겐 무엇이 남을까. 잠시 멈추었다가도, 또 그렇게 하루를 산다. 바쁨이 마치 너와 나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마냥. 


생과 사의 모든 순간을 직접 챙기자는 건 당연히 아니다. 외부 도움 없이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은 세상이다. 하지만 삶의 주요 이정표마저 아무 고민 없이 사회와 자본의 논리에 순응하기보다는, 각자에게 중요한 의미를 한 번쯤은 꼭꼭 씹어 삼켜 소화시킬 정도의 시간은 허락했으면 한다. 온몸으로 기뻐하고, 온 마음으로 슬퍼했으면 한다.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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