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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석 Aug 18. 2021

노마드라는 이름의 고독한 영혼

자발적인 길 위의 삶

사진처럼 강렬하게 남아 있는 기억이 있다. 두 눈에 담았던 시각적 풍경부터 그 순간의 질감과 냄새, 그 공간이 내던 소리까지, 고스란히 뇌세포 안에 박제되어 있는 삶의 순간들. 


석사 학위를 위해 영국 땅에 처음 발을 딛던 그 날도 그랬다. 비행기 옆으로 다닥다닥 붙은 작은 창 아래엔 하얀 구름이 드문드문 자리를 잡았고, 그 아래 유럽 교외 특유의 아기자기한 지붕들이 여백을 채웠다. 덜컹, 신대륙에 닻을 내리듯 비행기가 묵직하게 내려앉으며 진한 바퀴 자국을 남겼다. 활주로 옆으로 늘어선 들판은 타원형 창문 1/3 높이 즈음에 짧은 지평선을 만들어냈다. 영국도 유럽도, 새로운 장소로의 착륙마저도 처음은 아니었건만 그 날의 느낌은 달랐다. 낯선 도시에 안전하게 도착했음을 알리는 기장의 멘트. 벨트를 풀어도 좋다는 안내음이 띵, 하고 뒤따랐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사람, 새로운 공부. 완전히 새로운 삶의 시작을 의미했다. 노마드로서의 삶을.


그 날 이후, 내가 머무는 길 위의 모든 곳이 집이 되었다. 




노매드랜드. 


No Mad Land? 미치지 않은 땅이라는 뜻인가. 아니면 미치지 않은 자들의 땅이거나. 그래,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나쁘지 않은 제목인 것 같다. 왠지 모르게 쿠엔틴 타란티노의 B급 위트나 마틴 스코세이지의 장엄한 서사가 그려질 것 같은 느낌도 든다.


그게 아니란다. 이래서 뭐든지 적당히 아는 게 가장 위험하다.




스포가 안 되는 선에서 영화를 한 줄 요약하면, 남편과 안정적 직업을 잃은 중년 여성 '펀'(Fun이 아니라 Fern이다)이 밴을 몰고 다니며 노마드의 삶을 사는 이야기이다. 다큐의 내음이 짙게 배어나는 이 로드무비는 내 마음에 인상적인 장면을 둘 남겼다. 영화 초반 마트에서 만난 지인의 딸이 homeless가 된 것이냐 묻자 아니야, 단지 (물리적 공간으로서 사람들이 집이라 부르는) 집이 없는 거란다(I'm just houseless)라고 답하는 펀. 그리고 유목민 생활을 접은 후 아들 내외의 집에 들어가게 된 데이브(Dave)의 초청으로 함께 식사를 하고 그 집에 묵게 되는데, 침대에서 제대로 잠들지 못하고 자신의 밴으로 돌아와 잠을 청하고야 마는 펀.



인터넷을 대강 둘러보니 국내외를 막론하고 많은 이들에게 인상 깊게 남은 장면인 듯 했다. 영화가 스크린을 타고 흐르는 내내 펀에게 있어 밴은 곧 집인데, 이 때의 집이란 앞서 언급한 두 장면에서도 볼 수 있듯이 물리적 house가 아닌 정서적 공간으로서의 home을 의미한다. 


영화 속 많은 노마드는 home 이전에 house가 없으며 그럴 만한 돈도, 직업도 없는 상태이지만, 그런 물질적 결핍만으로 그들이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다른 장소로 이주하면서 생활하는 건 아니다. 펀이 단기 알바를 전전하고, 매일 밤 추위에 떨며 잠들고, 밴에서 용변을 포함한 일상의 모든 것을 해결하는 삶을 이어가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그녀가 돌아가야만 하는 공간(home)이 없기 때문이며, 돌아가고 싶은 곳이 없다는 건 곧 그 공간을 함께 채울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이 경우 노마드란 곧 정서적 결핍의 다른 이름이자 그 결과이며, 펀에게 있어서는 상당 부분 남편의 부재에서 기인한다. 펀이라고 해서 따뜻하고 안락한 집에 몸을 누이고 싶지 않을 리는 없다. 그런 삶이 안전하고 편하다는 것을 몰라서 하늘과 바람과 별을 친구 삼아 길 위의 생활을 유지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건 단지 우리가 통상 '집'이라고 여기는 구조물이, 자신이 머물 만한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차마'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펀과 달리 데이브가 아들 집에서 발 뻗고 편히 잘 수 있게 된 이유도 동일한 맥락에 있다. 둘의 차이는 각자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는 누군가의 존재 여부다. 데이브는 자신이 지붕 밑에서 잘 수 있을 거라 생각지 못했다 고백한다. 그러나 그건 본인 스스로 아늑한 삶을 거부해서가 아니라, 아들이 자신을 거부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들과의 화해가 마음에 텅 비어 있던 자리를 메워준 덕분에 도시의 생활이 불편하지 않다. 어디에서건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비가 새지 않는 천장, 아늑한 침대, 편안한 화장실의 문제가 아니기에.


데이브의 아들 부부가 그를 다시 가족으로 받아들여 준 것처럼 펀에게도 그녀를 맞아줄 '가족'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함께 살자는 언니의 제안을 거부하고 다시 길 위의 삶에 몸을 내맡긴다. 아쉽게도 언니의 존재는 남편의 부재를 대체할 수도, 펀의 결핍을 채워주지도 못한다. 몸이 불편해도 어쩔 도리가 없다. 가족이라는 소속과 연대는 중요하지만, 가족이라고 다 같은 가족은 아니니까. 그러니 펀에게 있어 노마드란 어느 정도는 자발적인 선택이다. 죽은 남편과의 정서적 화해, 즉 상실을 온전히 받아들인 이후에야 비로소 지붕 아래 생활이 가능할 것이다. 





나는 노마드의 자유로움을 기꺼이 사랑하였지만, 그것을 내 삶으로 온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정착하지 않고 이곳저곳 떠도는 생활을 자랑이라도 되는 양 SNS에 올리고, 한때는 역마살 운운하며 마치 그게 세계화 시대 지식인의 숙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허세를 부렸다. 어설픈 쿨내만 진동했을 뿐이다. 나는 정착하지 않는 게 아니라 정착하지 못하는 것에 불과했다. 진짜 마음은 인스타그램 해쉬태그를 바삐 찾는 손가락과 따로 놀았다. 어느샌가 그저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나의 오랜 유랑은 돌아갈 집이 없다는 점에서 비자발적 이주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남아 있던 선택지를 스스로 불태워버렸다는 점에서 자의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 결과는 자발적인 고립이었다.


자발성의 뿌리가 결핍에 있다는 사실, 그 받아들이기 힘든 잔인한 역설을 떠올릴 때면 여전히 마음이 아프다. 오랫동안 결핍을 채우려 아등바등하였으나 결코 채워지지 않았다. 밑 빠진 독에 주구장창 물을 퍼부어댔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배에 구멍이 뚫렸는데 구멍을 막을 생각은 하지 않고 물만 퍼내기 바빴다.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다. 한 손으로는 구멍을 막고, 다른 한 손으로 물을 퍼내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한 가지만 하기에도 양 손이 버거웠다. 구멍을 막는 동안 배가 가라앉아 버릴까 두려웠다. 가끔은 내가 가진 두려움의 근원이 궁금하다. 나 자신의 많은 부분을 이해하게 되었지만 이 뿌리 깊은 불안과 결핍의 정체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다만 이제는 구멍을 먼저 막을 것이다. 물을 붓는 대신 깨지고 금이 간 부분을 먼저 메울 것이다. 내가 알게 된 게 있다면 결핍이란 채워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없으면 없는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그렇게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바람이 많이 부는 밤의 이 나약한 투정 역시, 여전히 길 위에 있는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고픈 마음이다. 그리하여 나는 노마드의 삶에 작별을 고하려 한다. 이 역시 스스로의 의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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