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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석 May 12. 2021

가면을 벗고 싶다

지긋지긋한 자기 검열의 질주를 멈출 수 있을까

근래 모임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일종의 강의형 공적 모임이라고 해야겠다 (방역수칙 준수). 커리큘럼에 따라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를 나눈다. 기본 주제는 음악이지만 '음악'이라는 장르의 스펙트럼이 워낙 넓다 보니 대화는 책과 영화, 여행 등을 아우르며 다양한 모습으로 확장되었다. 모든 이야기에는 그 사람 자신이 살아오며 겪은 일과 그 과정에 알알이 박힌 여러 생각이 녹아있다. 코로나 시대에 이렇게나마 사람을 만나고 담소를 나눌 수 있다는 게 참 좋은 경험이자 감사한 일이다. 즐거웠다, 내가 가면을 쓰고 있었다는 점만 빼면. 


나는 음악적 취향이 강하지 않다. 개인적인 호불호야 당연히 있지만, 그때그때 내키는 음악을 듣는 정도지 좋은 노래나 마음에 드는 가수가 있다고 해서 더 찾아 듣거나 빠져들지는 않는다. 어릴 때부터 주로 잘 알려진 가요를 듣곤 했다. 그래서였는지 성인이 되어서도 팝보다는 한국 노래를 많이 찾았고, 그마저도 점점 듣지 않게 되었다. 중고등학교 때는 친구들이 좋아하던 팝이나 일본 노래를 따라 들어보고, 영국에서 공부를 할 때는 친하게 지내던 동생의 영향으로 브릿팝 플레이리스트를 만들기도 했지만, 길게 보면 일시적인 관심이었다. 요즘은 가사가 없거나 적은 음악을, 그 중에서도 재즈를 즐겨 듣는다.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은 내가 들어보지 못했던 노래 제목과 가수 이름을 자연스럽게 꺼내곤 했다. 대부분 미국과 유럽의 음악이었다. 익숙해보였다. 저런 가수가 있었구나, 저런 곡이 있었구나, 이야깃거리가 되는 음악들은 여러 색깔을 지녔고, 그 다양함만큼이나 그들의 삶 역시 다채로웠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내가 공부하고 일해 온 분야 혹은 내가 주로 만나고 이야기나눴던 사람들, 나이 먹을수록 그 정해진 경계를 벗어나는 게 쉽지 않다. 시간을 보내는 방법, 주로 읽는 책과 보는 영상, 사람들과의 대화 방식에 이르기까지, 차곡차곡 쌓여진 삶의 시간만큼 나라는 사람에게는 일종의 '패턴'이란 게 있다. 내게 익숙한 그 어떤 집합에도 속하지 않는 이야기들, 나와는 다른 삶을 살고 다른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는 게 참 오랜만이었다. 


예전에는 이런 낯선 모임 역시 기꺼이 즐겼다. 달라진 게 있다면 '낯섦'을 받아들이는 나 자신이다. 어느 순간 얼굴 절반을 가린 마스크 안에 감춰 둔 몇 겹의 가면을 의식하게 되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나의 비좁은 음악 세계(이것도 '세계'라고 한다면)가 보였다. 다들 음악에 대해, 다양한 노래와 가수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데 나도 뭐라도 아는 척 해야 하는 거 아닐까, 이런 타이밍에 이런 곡을 이야기하면 좀 있어보일까? 가면 하나. 이런 이야기를 하면 이상하게 보이려나, 쓸데없이 나대는 것처럼 보이겠지? 가면 둘. 이런 모임에 참여하기에는 이제 나이를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은데? 가면 셋. 찬찬히 톺아보니 내 마음 깊은 곳에는 이 모임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다들 날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지? 여기에 약간의 열등감이 감칠 맛 나는 조미료 역할을 한다.


물론 예전에도 가면을 썼다. 항상 썼던 것 같다. 갖은 '척'을 하면서 살아 왔다. 쿨한 척, 있는 척, 멋있는 척, 그리고 괜찮은 척. 나는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편이다. 어려서부터 무언가를 계속 증명해내야 하는 삶을 살아왔다.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었을 게다. 그리고 오랫동안 나는 그 목적을 달성해 왔다. 어쩌면 그래왔기 때문에 늘 두려웠던 걸지도 모른다. 내 욕망과 외로움을 들킬까봐. 내가 나답지 않은 (과연 나다운 건 뭔가 싶다만) 모습을 보이면 다들 떠나갈까봐. 


사실 이런 마음을 브런치에 적는 것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얼굴을 마주 보지 않는 온라인 세상, 나라는 사람에 대한 정보라고는 프로필에 적힌 몇 단어에 불과한 곳인데도. 물론 글에는 글쓴이의 인격이 배어난다. 나도 다른 작가의 글을 읽으면 대강 어떤 사람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으니까, 아마 다른 분들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 느낌이란 게 극히 제한적이다. 더구나 내 글은 아직 조회수도 얼마 나오지 않는다. 내가 아무리 고민하고 써봤자 이 글을 읽는 사람은 물론 내 글을 읽고 나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사람도 몇 없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마음 한 켠에 들어찬 두려운 마음을 지울 수 없다. 어느 정도 솔직해야 할까, 어디까지 솔직하게 써도 괜찮을까, 이 글을 보고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브런치라는 제한된 공적 공간, 여기에서조차 나는 가면을 쓴다.


이런 가면이라면 얼마든지 쓸 텐데!


살면서 가면을 아예 쓰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 그다지 바람직하지도 않아 보인다. 특히 사회생활에서는 적당히 가려야 좋을 때도 많아서, 알맞은 두께의 가면은 요긴하게 쓰이기도 한다. 이게 꼭 은유적 의미에만 해당하는 건 아니다 보니, 코로나가 시작된 이후 가끔은 마스크를 쓰는 게 차라리 편할 때도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가릴 때는 가려야 한다. 때와 장소에 맞춰 적절하게.


하지만 내 안의 목소리가 부르짖는다. 가면을 벗어던지고 싶다고. 과연, 마음 놓고 가면을 벗어도 괜찮은 사람들이 내게 몇이나 될까? 갑갑함이 커질수록 가면을 쓰지 않아도 되는 관계를 갈구하지만, 그런 게 정말 있기나 한 건지도 알 수 없다. 심지어 오랜 친구들도 예외는 아니다. 무심하게 오가는 카톡창을 보며 시간의 흐름과 함께 달라져 버린 우리들의 현재와 마주할 때면, 예전에는 쓰지 않았고 써야 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던 가면의 차가운 촉감이 내 뺨을 문득 시리게 하는 것이다. 


나도 사람인데.. 때로는 어리광 피우고 싶고, 땡깡도 부리고 싶고, 다른 사람 눈을 의식하지 않고 노래하며 춤추고 싶고, 만취해서 진상짓도 해보고 싶고, 울고 싶을 땐 펑펑 울고도 싶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어색해서 못 한다. 눈을 의식하는 것도 있겠지만, 내가 이상해서 못 할 것 같다. 졸라 슬프다.


오래 전 페이스북에 썼던 글의 일부다.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나는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다. 보아하니 어지간해서는 앞으로도 비슷할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니 살짝 또 슬퍼지려고 한다.


물음표가 여럿 떠오른다. 가면을 벗으면 그게 진짜 나인가? 나는 몇 개의, 혹은 몇 겹의 가면을 쓰고 있을까? 온전한 내 모습이란 건 과연 무엇일까? 그런 게 있긴 있는 건가? 잘 모르겠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이 뿜어내는 질문에 나는 모르겠다, 고 답한다. 이쯤 되면 진정한 나를 오랫동안 잊은 건지, 그러다 영영 잃어버린 건지, 그도 아니면 아예 참된 나로 살아온 적이 있기나 한 건지조차 알기 어렵다.


모든 게 흐릿한 가운데 확실한 한 가지가 있다. 지긋지긋한 자기 검열의 질주를 멈춰 세워야한다는 것. 그러니 어쨌든 가면을 벗어내야겠다. 하나, 그리고 다음, 또 다음. 현재의 내 얼굴과 다시는 만나게 되지 못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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