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마른 땅 아래 가족이라는 이름의 씨앗이 있었네
부모님은 각자의 일과 삶이 있고, 자기만의 주관이 뚜렷한 분들이다. 어릴 때부터 우리 가족은 '따로 또 같이'였다. 함께 밥을 먹고 여행을 가기도 하지만, 두 분 모두 각자의 친구분들과 혹은 혼자서 여행을 가거나 자신이 원하는 무언가를 개별적으로 하기도 했다. 이런 걸 보고 자란 덕에 일찍부터 부모님으로부터 벗어나 독립적인 자아를 형성할 수 있었으나, 반대로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끈끈함과 안정감을 느끼기란 매우 어려웠다. 나에게 가족은 가장 가까우면서 먼 사람들이었으며, 내키는 대로 편하게 이야기하거나 지칠 때면 언제든지 기댈 수 있는 대상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선생님이셨는데, 나를 아들보다는 학생 대하듯 할 때가 많았다. 칭찬보다는 혼이 난 기억이 많다. 극단적인 예이기는 한데, 열 살인가 열한 살 무렵 한 번은 숙제를 안 하고 (처)자다가 쫓겨날 뻔 하기도 했다. 10대 내내 나의 주된 관심사는 보통의 남자아이들처럼 스포츠, 게임, 만화 등이었고, 어머니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주로 싫어하셨다. 나는 항상 뒷구멍을 찾았다. 어머니가 숨긴 패밀리 게임팩을 몰래 찾아 하다가 집에 돌아오실 때쯤 다시 감춰놓는다거나, 매일 한두 권씩 만화책을 빌려 조심스레 읽는다거나, 새벽에 불 꺼놓고 스피커 소리를 죽인 채 컴퓨터 게임에 몰두한다거나.
어쩌다 한 번씩 어머니에게 나의 관심사나 고민, 하고 싶은 것, 또는 잘 모르겠는 것 등을 물어보면 (그게 뭔지도 기억나지 않지만), 진지하게 들어주고 공감하기보다 주로 '왜 너는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느냐'는 식의 반응이 돌아왔다. 대부분의 문제에 있어 자신만의 답이 확고한 사람이었던 어머니는 그런 생각을 토대로 본인의 학교에서 학생들 훈육하듯 나를 대했다. 어른이 보기에 정답이 빤히 보이는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대화가 반복될수록, 어린 아이는 점점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나 사이에 개입하려 하지 않았다. 항상 사람을 만나며 바쁘게 지내는 분이다 보니 함께 무언가를 한 기억 자체가 많지 않다. 초등학교 때 함께 야구를 했던 기억 하나가 강하게 남아 있다. 야구를 정말 좋아했던 터라 아버지가 함께 놀아주니 참 좋았나보다. 다른 아버지들과 비교하긴 어렵지만, 그리고 내 착각일런지도 모르겠으나, 내가 느끼기에 우리 아버지에게 있어서는 자기 자신이 중심이고 가족은 그 다음인 것 같았다. 사실이라 할지라도 현재든 과거든 본인이 의식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나를 대하는 방식은 좋게 말하면 자유방임, 심하게 이야기하면 방치였는데, 아이러니한 건 나도 이런 부분은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태생적으로 그렇다기보다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자라서 그런 거겠거니 생각만 한다.
고등학교 3학년 올라갈 즈음 자퇴를 하네마네 하면서 크게 싸운 이후로는 인생의 큰 결정들을 대부분 혼자 하기 시작했다. 그리 어렵지만은 않았다. 부모님의 의견이 필요할 경우 물어보기도 하고 수용한 적도 많았지만, 기본적으로 내 마음 깊은 곳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아마 손에 꼽아보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런 배경이 '가족'과 '부부'에 대한 나의 가치관을 만들었다. 나에게 아내란, 그리고 가족이란, '나'의 삶과 성공을 뒷받침하는 존재였다. 사랑이나 상대방에 대한 더 큰 마음, 혹은 안식처로서의 공간이자 관계, 이런 부분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그런 게 있는 줄 몰랐다. '가족'이 그런 걸 주는 거라는 걸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다.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무지가 내 삶을 뒤흔들고, 가차없이 폭격을 퍼부어 기어코 내 안의 세계를 무너뜨렸다.
이해하려 한다. 나를 낳았을 때 한국 나이로 아버지가 28, 어머니가 27, 자식이라고는 나 하나. 지금의 나보다 10여 년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아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딱 한 명 키워봤다. 어렸고, 부모 노릇은 처음이었다. 모든 게 서툴고 어려웠을 것이다. 그 나이에, 그 시절에, 일 할 거 다 하면서 어떻게 키웠나 싶다. 특히 어머니는 일은 유지했을지언정 아버지에 비해 많은 걸 포기하고 사셨다. 그 때는 그런 삶이 당연했을 테다. 하고 싶은 게 얼마나 많았을까. 자신에게 주어지는 여러 역할 간의 균형을 잡고 단단히 삶을 이어간다는 게 결코 녹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두 분 모두 어떤 부모가 되어야 좋은 건지 잘 모르셨을 거라 생각한다.
얼마 전 어머니는 과거 당신의 소원 중 하나가 "이제 그만 (공부)하고 좀 자라"는 말을 하는 거라고 하셨다. 학창 시절 어머니는 주전부리를 자주 챙겨주셨다. 과일을 깎고 과자나 떡을 그릇에 담아 조용히 공부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아들의 방에 똑똑, 노크를 한다. 끼익, 문이 열리면 어머니는 저 대사를 외치며 차오르는 뿌듯함을 느끼고 싶으셨겠지. 그러나 어미 맘을 모르는 철없는 아들내미는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던 날이 많았나보다. 혹은 그런 기억만 유난히 마음에 남으셨거나. 절대적인 수치로야 아들보다 공부를 못하고 말썽만 부리는 학생이 훨씬 더 많았겠으나, 어느 학교에든 누구보다 성실하고 싹싹한 아이들이 있게 마련이니까. 나는 그런 류의 모범생은 아니었다. 그러니 어머니의 높은 기준을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여 내가 느꼈던 외로움, 섭섭함, 거리감이 단박에 채워지지는 않는다. 어머니의 사정과 내 사정은 다르니까. 물론 이 모든 기억은 편향되었을 수 있다. 그리고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두 분은, 특히 어머니는, 항상 나를 많이 생각하고 걱정하신다. 잊고 지내다가도 문득 마음 한 켠이 아려오곤 한다. 하지만 그것과, 내가 그렇게 기억하고 느껴온 게 다르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 기억이 더 많이, 더 강하게 남아있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근본적으로 외롭다. 약간 뭐랄까, 감정의 디폴트가 외로움이랄까. 언제나 결국에는 혼자 남는다는 느낌이다. 삶의 장애물에 치일 때 돌아갈 곳이 없다는 망연함. 늘 혼자 버티고 혼자 투쟁해야 했다. 인생의 모든 순간에 홀로 배수의 진을 치고 긴장의 끈을 팽팽하게 당겨야만 했다. 삶이라는 게 결국은 혼자라고들 하지만 흔히들 쉽게도 내뱉는 그런 말과는 결이 다른 고립감이 존재했다. 언제나 사실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가끔은 아닌 것 같다가도, 결국은 다시 그 말이 맞는 것 같다고 인정하게 된다. 평생 그 뫼비우스의 띠 위를 돌고 돌게 될까봐 두려웠다. 익숙함과 편안함과 지긋지긋함의 위태로운 공존. 그런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건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만약 뻔한 질문이라도 일단 "너는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그것도 일리가 있네, 그럴 수도 있겠다, 왜 그렇게 생각하니?"라고 물어보며 다 들어주고 나서, "하지만 이건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렇게 하면 어때?"라는 식으로 자신의 답을 들려줬다면. 그랬다면 우리의 관계는, 그리고 나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가끔은 원망하며 책임을 떠넘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슬퍼질 때가 있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에 가고, 졸업이란 걸 하고, 일을 하고, 또 다른 공부를 하고, 또 일을 하고, 그 사이사이 지겹도록 방황도 하고. 그렇게 시간이 무심하게 지나가버리는 동안 그 파도에 휩쓸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 멀리 와버린 건 아닐까, 각자 다른 섬에 떠밀려와서 이제는 서로를 먼 발치에서 바라만 보게 된 건 아닐까. 아들이 커 가면서 부모자식 간에 뜸해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일지언정, 그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문득 슬퍼지는 것이다.
최근 몇 달 어머니와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그 동안 어떤 삶을 살아 왔는지, 요즘 고민은 무엇인지, 그리고 왜 그런 생각들에 빠져 있는지. 어머니에게서는 익숙한 반응과, 나이와 시간의 흐름에 맞게 변화된 새로운 반응이 번갈아 나타난다. 나 역시 아직은 서투르고 불편해서 자꾸 예전처럼 말을 아끼는 나로 돌아가려 하지만, 부러 더 많이 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이 관계가 오랫동안 강화시켜 온 흐름을 틀 수 있는 사람은 나 뿐이라서. 손주라는 강력한 외부 변수가 나의 짐을 덜어주기를 기대하는 건 아직 요원하다.
앞으로 계속 좁혀가고 싶다. 사실 이미 조금씩 거리를 줄여가고 있다. 섬과 섬을 빠르게 오갈 만한 교통수단이 없어서 애를 먹고 있긴 하지만. 마치 간척사업 같다. 흙을 퍼내고 부어서 바다를 메운다. 다리를 놓는 게 빠를 것 같지만 오랜 세월 켜켜이 묵은 각자의 관성이 가장 느린 방법을 택한다.
30대를 살아오며 나의 가치관은 완전히 달라졌지만, 세상을 바라보고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일상에 배어나는 감정 습관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 오랜 숙제다. 매듭을 과연 풀 수는 있는 것인지조차 잘 모르겠다 되뇌이면서도, 언젠가 풀릴 것이라는 기대를 품는다. 조금씩 나에 대해 이야기하고, 부모님에 대해 들어보려 한다. 손을 내밀고, 내민 손을 급히 거두지 않는 연습.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볼 참이다.
이건 나 자신에게 보내는 소소한 다짐이자, 조금 거창하게는 마음 단디 먹고 드디어 꺾은 인생의 핸들을 다시 되돌리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그것이 이내 파도에 휩쓸려갈 고운 모래 위 발자국에 불과할지라도. 구구절절한 이 글의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