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 사느냐는 질문에 담긴 함의
영화 <브루클린>에서 주인공 에일리스는 삶의 터전(아일랜드)을 떠나 새로운 세상(미국 뉴욕)으로 향한다. 새로운 일상에 적응하지 못하던 에일리스. 그녀의 마음은 육체를 따라 바다를 건너지 못한 채 늘 고향에 머물러 있었다. 브루클린의 '집'은, 집이되 집이 아니었다. 변화의 계기는 매력적인 이탈리안 토니와의 사랑. 칙칙한 흑백의 도시였던 브루클린은 다채로운 색을 지닌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단 한 사람으로 인해 이전까지 느끼지 못했던 '삶'이란 것이 그녀의 일상에도 다시금 배어나기 시작한다. 심지어 행복마저도.
그러다 언니의 부고를 접한다. 영화의 배경인 1950년대, 지금처럼 쉽게 비행기를 타고 오갈 수 없는 상황에서 대서양을 건너 집에 간다는 것은 금전적 문제를 떠나 그 자체로 큰 결심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더구나 에일리스처럼 지독한 향수병을 앓던 이에게,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행위에 담긴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그래서 토니는 두려워한다. 그녀가 돌아오지 않을까봐. 슬픔과 걱정을 섞어 휘저은 찻잔을 앞에 두고 나지막히 읊조리던 그의 대사처럼, 집은 집이니까 (Home is home).
에일리스는 말한다. 어디가 집인지 모르겠다고. '집'이란 걸 갖고 있기나 한 건지 모르겠다고. 그녀의 말마따나, 집은 어디인가? 이 질문은 혼란스럽던 나의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맨체스터에서도, 튀니스에서도 나는 그곳을 내 집처럼 여겼다. 완전한 이민이 아닌 '단기간의 삶'이란 달리 보면 '많이 긴 여행'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런 경우라면 언제나 돌아갈 곳이 존재한다. '진짜 집'인 셈이다. 그러나 나에겐 그렇지 않았다. 한국과 당시 살던 도시 모두에 집이 있는 게 아니었다. 나의 일상이 일어나는 여기,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여기'만' 내 집인 듯 했다. 마치 한국에는 내가 돌아갈 곳이 없는 것만 같았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지만 돌아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돌아갈 집이 아예 없다는, 퇴로가 차단된 느낌. 내가 살던 장소에 대한 만족도와는 완전히 별개였다. 어차피 이 도시 역시 장기적인 삶의 터전이 되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아는 나에게, 돌아갈 곳이 없다는 '인식'('사실'과는 다를지언정 내가 '사실'이라고 받아들이는)은 부지불식간에 나를 삶의 벼랑으로 내몰았다.
돌아보면 그것은 정체성의 혼란이었다. 나는 어디에 속한 사람인가. 지금 여기에 있는 나는 누구지?
언제든 어디로든 떠날 수 있다는 것은 그 어디에 있더라도 내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김영하 작가의 이 문장이 과거의 나와 꼭 닮았다. 어디로든 떠날 수 있었고, 그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처음 발딛는 나라, 가보지 않은 도시, 처음 만나는 사람, 경험해 보지 않았던 일에 이르기까지, 늘 굶주린 맹수처럼 항상 새로운 도전을 갈망했다.
시계를 조금 더 과거로 돌려보면, 나는 늘 그랬다. 심지어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내 주변에는 항상 사람이 많았고 모임이 넘쳐났다. 오늘은 이 사람, 내일은 저 모임, 모레는 또 다른 친구, 그렇게 만나다 보면 어느새 한 차례 로테이션이 돌고, (개별적인 빈도는 다를지언정) 시간의 흐름에 발맞춰 다음 한 바퀴가 돌아간다. 나는 모든 곳에 속했지만, 그 어디에도 진정으로 속하지 못했다. 나의 방어기제 때문이다. 외로움을 많이 탔기에 주변에 사람들을 많이 두었지만 어느 한 지점에 열과 성을 다해 나의 모든 것을 내어주지는 않았다. 그 모든 관계에 진심이 아니었던 건 결코 아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인간관계에 쏟는 에너지의 크기가 작았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남들보다 크다는, 상대적인 것이었다. 절대적인 기준에서 나는 늘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두곤 했다. 딱히 의도했다기보다 나를 지키기 위한 본능이었다. 아마도 내 모든 것을 주었을 때 내가 거부당한다거나, 인정받지 못한다거나, 나를 떠난다거나, 하여튼 혼자가 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일 테다.
결과적으로 나는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를 얻었지만, 그 자유라는 게 실상 상처받지 않기 위한 자발적 고립이라는 걸 깨달은 건 한참이나 지난, 정말 한참 더 시간이 흐른 뒤였다. 나라는 사람은 언제나 그 곳에 속하되 속하지 않았다. 주어진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것은 다름아닌 나 자신이다. 진심으로 절실하게 어딘가에 소속되어 안정감을 느끼고 싶어하면서도. 그들 모두는 나를 거부한 적이 없으며, 항상 따뜻하게 맞아 주었고,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맨체스터에서도, 튀니스에서도 내가 그곳을 내 집처럼 여길 수 있었던 건 현지 적응력이 뛰어난 덕분이기도 하겠으나, 본질적으로 애초에 돌아갈 집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에 돌아온 지도 어느새 몇 년이 지났건만 여전히 가끔씩 집이 없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지금 내가 사는 곳도, 부모님이 계신 본가도, 분명히 집인데 집이 아닌 것 같다. 이런 모습 역시 김영하 작가는 <여행의 이유>에 담아주었다.
여행이 길어지면 생활처럼 느껴진다. 마찬가지로 충분한 안정이 담보되지 않으면 생활도 유랑처럼 느껴진다.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집과 정서적 공간으로서의 집은 다르다. 영어로 house와 home이 다르게 쓰이는 것과 같다. 우리가 원하는 바가 house가 아니라 home이듯, '진짜 집'은 곧 몸과 마음이 모두 편안하게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을 의미한다. 그런 면에서 '집이 어디냐'는 물음은 내가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는 장소에 대한 질문이고, 이는 곧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 어디냐고 묻는 것이다. 즉 정체성에 대한 문제다. 그래서 '내가 어디에 산다'고 대답할 때, 집을 house로 제한한다면 단지 주소를 이를 뿐이지만, home으로서는 '우리가 속한 곳이 어디인가'에 대한 답이 된다. 그렇다면 그 대답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다시 말해, 내가 어디에 속하는지 알려주는 것은 무엇일까?
토니를 만나기 전 브루클린은 에일리스가 속한 곳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 사람이 다가오자 삶이 생겨났다. 영화가 보여주듯,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삶은 살아진다. 그 사람으로 인해 삶은 생명을 얻고, 비로소 살 만한 것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는 '내가 어디에 속하는가'에 대한 답은 '내가 누구와 함께 있느냐'라는 질문에서 나온다. 에일리스가 그녀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해준 게 토니이듯, 나의 정체성을 구성할 뿐 아니라 때로는 부여하기까지 할 수 있는 건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이다. 에일리스가 처음 뉴욕으로 향하는 다른 아일랜드 사람에게 건네는 마지막 대사에 그녀의 깨달음이 녹아 있다.
... 누군가를 만나게 될 거에요. 오로지 당신만의 사람을. 그럼 깨닫게 되겠죠. 거기가 당신의 인생이 있는 곳이라는 걸.
내가 집이 없다고 느끼는 원인 역시 나 자신에게서 찾아야 하는 것이었다. 정서적으로 기댈 곳이 없는 나. 사람들 안에서 섞여 살고 싶으면서도 늘 거리를 유지하고, 때로는 다 내려놓고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하면서도 다른 이에게 마음을 내어주는데는 인색한 나. 여전히 내가 '집'을 찾지 못하는 건, 결국 내가 누구와 함께 있어야 하는 사람인지를 모른다는 뜻이다.
집이 어디세요? 평범한 질문이 참 멀리도 왔다.
집이 어디세요, 아니, 지금 당신 곁에는 누가 있나요? 당신을 당신답게 해주는 그 사람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