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에 특출난 비극적 서사를 부여하려는 건 아니다. 삶의 모습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수만큼 다양하다. 단지 한국의 전형적인 사회적 기준에 맞추고자 한다면 그럴 수 있었음에도, 늘 삐딱선을 탔던 지난 세월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열심히만 하면 다 잘 될 줄만 알았다. 제멋대로긴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방탕하게 살아온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응당 겪고 지나가야 할 그 힘겨운 과정의 끝에는 내가 원하는 삶,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사회적 성취와 개인의 행복을 모두 갖춘,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낸 삶이 펼쳐질 거라고 생각했다. 눈앞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치열하게 나 자신을 깎고 다지고 몰아부쳐왔기에, 내가 노력하기만 한다면 자연스럽게 주어지리라 여겼다. 남들 모두 바라마지 않는 '성공'이 당연히 나의 것인 마냥, 이게 내 것이 아니면 대체 누구의 것이냐는, 근거 없는 장밋빛 미래를 그렸다.
나이를 먹을수록 어깨를 짓누르는 현실의 무게에 나 자신을 정말 많이 책망했다. 왜 그렇게 무지했냐고, 뭘 믿고 그렇게 안이했냐고. 네가 잘나면 얼마나 잘났다고, 그냥 남들처럼 살지 그랬어. 시험 열심히 준비해서 공무원하지 그랬어, 얌전히 스펙 쌓아서 대기업 들어가지 그랬어, 그도 아니면 그냥 나 죽었다 생각하고 교수 따까리나 하면서 어떻게든 박사학위 받고 미국으로 포닥 다녀오지 그랬어. 공공이든 민간이든, 조직 생활은 나와 맞지 않는다고 성급하게 결론내리는 대신 일단 들어갔다면 어떻게든 자리 잡고 버텼을 텐데, 뭐든 해냈을 텐데, 생각보다 잘 했을 것 같은데.
실제로 나는 어디 가서든 일을 잘 했다. 큰 조직에 계속 있었어도 그랬을 거라 생각한다. 지금보다는 삶이 안정적이었을 확률도 높다. 그러나 무엇이 '잘' 하는 것이고, 어떤 삶이 '안정적'인 것일까? 나는 다른 이들 대부분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가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선택한 길에서 해보고 싶은 거 다 해봤다. 완벽한 모습은 아니었을지라도, 꿈을 이뤘다고도 할 수 있다. 단지 목표들을 차근차근 밟아나가 마침내 내가 해낸 건가 싶었을 때, 눈앞의 풍경이 예상했던 것처럼 아름답지만은 않았을 뿐이다.
나는 나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혔고, 지난 시간을 다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도 자주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시간들을 여전히 사랑한다. 행복했다고는 할 수 없다. 힘들었던 기억이 훨씬 많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차마 내칠 수가 없다. 그 시간들이 내 인생에서 없었던 것처럼 할 수는 없다.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남들처럼 살지 않은 나 자신을 용서한다.
나는 두려운 게 많고 외로움도 많이 타는 사람이다. 어려서 늘 혼자였던 탓에 성장하면서는 항상 곁에 누군가를 두었다. 그것이 친구든, 연인이든, 크고 작은 그룹이든, 내 안의 결핍을 다른 이들로 채우기 위해 애썼다. 그러면서도 진정으로 마음을 열지는 못했다. 상처받는 게 무서워서 마음을 제대로 주지 못했고, 감정 표현에 서툴렀다. 내 감정을 들여다보며 상대와 함께 이야기 나누기보다는 혼자 생각하고 고민하며 힘들어했다. 때로는 기대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 문제가 생기면 그냥 참고 모든 걸 혼자 떠안았다. 문제를 외면하고 피하려다 더 키우고, 지쳐 나가떨어지게 될 즈음에는 어쩔 도리가 없어 그냥 놓아버렸다. 그럴 때마다 무책임한 나의 모습에 반작용처럼 덮쳐오는 죄책감 역시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30대 초반, 인생의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나는 설레기보다 겁이 났다. 새로운 언어, 익숙하지 않은 환경, 완전히 다른 분야의 공부, 불확실한 미래.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 변화를 주는 상황, 현재뿐 아니라 미래의 그 어떤 것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 두려웠다. 그 혼돈의 시기를 지나며 나는 나 자신에게, 그리고 내 옆을 지켜주던 사람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문제가 생겼을 때는 터놓고 이야기하며 서로 이해의 폭을 넓히는 방식으로 풀어나가야 했지만, 나는 너무 어렸다. 모든 게 혼란스러웠고, 무엇을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고, 내가 어떤 마음이며 어떤 상태인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런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게 무섭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그건 방어기제의 일부였다. 나의 혼란스럽고 부정적인 모습을 받아들여주지 않으면 어쩌지? 내가 사실은 이런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를 싫어하거나 떠나버리면 어떻게 하지?
그 전까지 미처 알지 못했지만 나는 무척이나 안정 지향적인 사람이었다. 내가 항상 새로운 도전을 추구하며 모험을 즐길 수 있었던 이유는 오랜 결핍을 채워주는 안정화 장치 덕분이었다. 주로 사람의 형상을 띤 안정화 장치들은 나의 유년기부터 번갈아가며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가 사라지면 다른 하나가 나타났다. 가끔 발생하던 공백기를 나는 견디지 못했다. 그 이유를 단지 외로움을 많이 타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나의 뿌리 깊은 불안과 결핍이 생각보다 긴 역사를 지녔음을 알게 된 것은 보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다.
상처는 오랫동안 나 자신을 괴롭혔다. 지나간 관계에 대한 어설픈 미련은 아니다. 내 일부를 이루었던 무언가의 상실이 주는 슬픔, 그리고 무책임한 행동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그 감정은 시간이 많이 흘러도 나를 떠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용서를 구해본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정말 미안해. 너무 큰 상처를 줘서.. 가능하기만 하다면 몇 번이라도 사과하고 싶어.. 정말 미안해. 그리고 고마웠어. 그 오랜 시간 동안.. 내 곁에 있어줘서. 나 같은 사람, 나처럼 부족한 사람 사랑해줘서. 사랑하고 이해하고 받아줘서.. 정말 고마워. 그리고 나 자신을 용서하려 해본다. 어리고 성숙하지 못했던 나 자신을. 그러나 어렵다. 여전히 마음 한 켠이 무겁다. 불편하다. 이래도 되나? 내가 뭐라고, 나 혼자 내 마음대로 이렇게 해도 괜찮은 걸까. 하지만 이제 와서 실제로 용서를 구할 수도 없다.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버렸다. 이미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간 지 오래다. 과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언젠가 나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나 자신을 옥죄는 이 감정에 몹시 지쳤다. 힘겹게 용기를 내어, 나는 나와 내 소중한 사람 모두에게 상처를 준 나 자신을 용서한다.
평생 이기고 경쟁하여 쟁취하기보다는, 지지 않고 잃지 않기 위한 태도를 견지해왔다. 위험을 회피하고, 상처 받을 일을 피하고, 손해보려 하지 않고, 뭔가 해가 생길 것 같으면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것. 이게 꼭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더 나아갈 수 있음에도 스스로 한계를 정하고 가능성을 차단하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다. 비슷한 맥락에서 거절에 대한 거대한 두려움이 있다. 거절당할까 봐 마음을 전하지 못하는 일, 거절당할까 봐 시도하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그 동안 내가 놓쳐버린 기회와 누리지 못한 경험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생각이 많다. 전에는 단순히 생각이 많은 게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진정한 문제는 생각이 많은 게 아니라 생각'만' 하는 거라는 걸 깨달았다. 물론 전에도 생각만 하고 떠오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데 대한 문제의식은 있었다. 전에는 생각 많은 것과 행동하지 않는 것 둘 다 비슷하게 문제라고 여겼다면, 이제는 생각 많은 것 자체는 딱히 큰 문제가 아니고 행동하지 않는 게 하나의 핵심적인 문제라는 걸로 인식이 바뀌었다.
이러한 태도는 결국 미움받고 싶어하지 않는 마음으로 수렴한다. 나의 뇌는 많은 경우에 자동적으로 가장 미움을 덜 받고 잠재적 갈등을 줄일 수 있는 최적의 옵션을 찾는다. 그 오랜 관성이 변화를 열망하면서도 내가 살고자 하는 방향으로 실제 한 걸음 내딛을 용기를 주저하게 한다. 머리로는 알면서도 삶을 바꾸기 위한 실천을 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심리학 책들은 그 이유를 현재 상태를 유지하는 데서 내가 얻는 게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뼈아픈 지적이다.
미움 받을 용기는 곧 거절당할 용기라고도 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 사람들이 나를 싫어할 수도 있다. 아니, 싫어하는 게 당연한 것이다. 그래도 괜찮아, 용기를 내자. 패배할 위험을 기꺼이 무릅쓰고, 이길 가능성을 찾아 내고, 그렇게 원하는 것을 추구하여 결국 얻어내는 태도. 리스크를 회피하는 게 아니라 리스크를 감수하고 관리하는 것. 또한 적시에 행동하기만 한다면 생각이 많은 건 장점이 될 수 있다. 행동에 대한 자체 점검과 빠른 피드백, 깊이 있는 사유를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생각과 행동이 시너지를 내고 선순환하게 만들 수도 있다. 더 나은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생각 많은 걸 탓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데 더욱 집중해야 한다. 완전한 탈바꿈이 아니라 작은 변화를 쌓아나간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나는, 생각만 하고 행동으로 바로바로 옮기지 못하는 나 자신을, '미움받을 용기'를 여전히 내지 못하는 나 자신을 용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