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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석 May 27. 2021

깊은 밤 소주 한 잔에 담긴 위로

공감, 그리고 이해

아주 오래 전 일이다. 친한 친구 하나와 친한 동생 하나,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새벽까지 술잔을 나눴다. 워낙 옛일이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학생들이 으레 나눌 법한 대화 주제였던 걸로 기억한다. 왜 있잖아, 학업, 동아리, 연애, 졸업 후의 진로 같은 것들. 그 중에서도 역시 연애와 대학원 이야기를 주로 했던 것 같다. 그날 밤은 굉장히 유쾌했는데, 그 동생과 친하기는 해도 평소에 자주 같이 술을 마실 정도로 엄청 가까웠던 건 아니었던지라, 그 유쾌함 이면에 몰래 숨은 의외성이 집에 돌아가는 골목길 구석구석에 남아 있었다.


더욱 뜻밖의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집에 돌아가 씻고 잠들기 전 그 동생은 온라인에 글을 하나 올렸다 (당연히 페이스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글 쓰면서 정확한 시기와 그 시대적 배경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맙소사, 싸이월드 다이어리다). 그 '일기'는 조금 전 파한 술자리에 대한 짧지만 열광적인 평가와 함께 "A형과 B형은 평생 가져갈 인연이다"라는, 술이 취한 상태에서조차 손발이 오그라드는, 남자들 사이에서 직접 내뱉기에는 경악스럽다고도 할 만한 문장으로 끝을 맺었다. 물론 그런 돌직구 애정 표현은 언제나 환영이지만, 우리 모두를 알고 있는 많은 사람이 함께 보는 공간에 버젓이 올라가는 공개 고백에는 약간의 난처함이 뒤따르기 마련이니까. '아 이놈 뭐야, 오늘 그렇게 좋았나? 그렇다고 뭘 이렇게까지 해? ㅋㅋ' 생각하며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난... ㄱㅏ끔... 눈물을 흘린ㄷㅏ...


안타깝게도 인연을 평생 가져가겠다던 그의 다짐은 불과 몇 해를 견디지 못했다. 그냥 술 취한 새벽의 객기였나 보다.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해프닝(하루 정도 센세이션이었음)으로 남은 그 밤을, 어느 날엔가 떠올리다 문득 '그 놈은 그날 뭐가 그렇게 좋았던 걸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아무리 술자리가 즐거웠다 한들 "평생 인연" 운운하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는 그날 어떤 위로와 공감을 받았던 건 아니었을까. 그는 진로(졸업 후 대학원 진학)와 여자친구(첫 여자친구였다)에 관한 여러 고민을 털어놓았는데, 지나고 생각해 보면 20대 초반이었을 그에게는 제법 무거운 문제였을 수도 있겠는걸, 하는 생각이 든단 말이지.


셋이 술 한 잔 걸치며 보냈던 시간이 그에게 위로가 되었던 걸까? 알 수 없다. 다만 그 새벽 우리가 주고받은 술잔에 담겼던 마음이 정말 '위로'였다면, 그 위로라는 게 진정 무엇일까 곰곰 생각해보게 된다. 많은 이야기를 듣는 동안 우리가 나눴던 대화라고 해봤자 실상 별 거 없어서다. 친구는 막 석박사 통합 과정을 시작했고, 나는 학부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그놈보다 고작 2년치 밥 더 먹은 것뿐인 나와 친구가 무슨 대단한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소줏잔을 채워주며 그가 하는 이야기를 들은 게 전부다. 애초부터 그를 위로하겠다거나 무언가 힘이 되어주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었고, 그 동생 역시 그런 걸 바라고 술자리를 만든 것도 아니었다. 그저 어쩌다 보니 그리 되었는데, 만약 우리가 선배랍시고 되도 않는 훈계를 지껄였다면 그렇게 우리를 아름답게 묘사해주지는 않았을 테다. '위로'는 곧 '잘 듣는 것'이라고들 하니까, 그런 면에서만 보면 그에게 있어 참으로 충만한 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잘 듣는다는 건 무엇일까? 말이 적을수록 좋다는 건 확실하다. 그렇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는 곤란하다. 이건 듣는 사람보다는 말하는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내가 어떤 고민을 털어놓을 때, 상대방이 정답을 제시해주기를 바라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은 답답한 마음에 내 이야기를 하고 싶고, 누군가 들어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런데 이야기를 몇 마디만 나눠 보면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내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는지 아닌지 바로 알 수 있다. 이 사람이 내가 무슨 말 하는지 모르는구나, 싶은 상대가 있다. 머리로는 내 말을 이해하고, 귀로도 내 이야기를 듣고 있지만, 그게 그 사람 마음에 가닿지는 않는다. 어떻게든 이해하고 공감해보려는 사람도 있겠으나, 그게 되지 않는다는 건 본인도 알고 나도 안다. 그럴 때는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고역이다. 정서적 교감의 부재랄까.


반면에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내 이야기를 알아듣는 사람이 있다. 정확히는 이 사람이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아는구나 싶은 게, 딱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 눈빛만 봐도 안다. 내 상황을 이해하고 있구나, 내 감정에 공감하고 있구나. 이럴 때는 상대방이 단 한 마디 하지 않아도 괜찮다. 나를 응시하는 눈빛과 가끔 끄덕이는 고갯짓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럴 때 비로소 나는 '이해받는다'고 느낀다. 사람이 진정한 위로를 받고 위안을 느끼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나 역시 그런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면 (아쉽게도 살면서 그런 경험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단전 저 끝에서부터 올라오는 뜨끈한 희열이 심장을 뻐근하게 채우곤 했다. 이런 맥락에서라면 그 동생이 그날 밤 느꼈던 감정의 정체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나와 친구가 정확히 알고 있었던 거다. 우리 셋 모두에게 운이 참 좋았던 밤이었다.


그러니까 잘 듣는다는 건, 정말 '잘 듣는' 것이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내 것처럼 듣는 것. 이게 참 쉽지 않다.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나에게>라는 책에 따르면 '위로'란 '상대의 기분을 풀어주는 시도가 아니'라고 한다.


지금은 아파해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그에게 무슨 일이 닥쳤는지 말할 기회를 주자. 그의 생각을 들어보라는 말이다. 그런 다음 상대의 느낌을 공유할 자세를 갖추면 된다. 여기서 느낌을 공유한다는 것은 상대의 고통스러운 느낌을 당장 변화시키려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 말하자면 내가 제시하고 싶은 문제 해결방법 같은 것을 뒤로 제쳐두고, 그저 힘겨워하는 상대에게 숨쉴 틈을 마련해주라는 말이다.


나와 친구가 그날 밤 그 동생의 이야기를 잘 들을 수 있었던 건, 역설적으로 애초에 듣고자 하는 의지 자체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이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저 자연스럽고 편안한 대화 아닐런지. 하지만 어설프게 듣고 자기 자신의 경험만을 바탕으로 해석해서 조언이랍시고 뻔한 이야기를 내뱉는 사람이, 아.. 솔직히 너무 많다. 그리고 그게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이들은 사실 듣기보다는 말하고 싶은 것이다. 고민을 털어놓는 상대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더 관심이 있고, 고민을 듣고 문제를 해결하는 자신의 모습에 만족스러워한다 (나도 그런 적이 있었을 것 같은데.. 반성해야겠다).


그런 말이나 듣자고 내 이야기를 꺼내는 게 아니잖아?


사람이 진정 원하는 건 세상에 누군가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 라는 확신이 아닐까 한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이 상황에서 얼마나 힘겨울지, 여기까지 오는데는 또 얼마나 힘이 들었을지, 그 안에 감추어진 감정은 어떤 것인지. 세상에서 단 한 사람만이라도, 그걸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축복이다. 그럴 때 우리는 진정으로 '구원받는다'.


내겐 종교가 없지만 종교에서 위안을 받는 지점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이든 부처님이든 또 다른 어떤 분이든, 어떤 절대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곧 내가 무엇을 하더라도 나를 이해하고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게다가 내 이야기를 듣는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이상하게 보지는 않을지, 이런 치부까지 드러내도 괜찮을지, 한 마디로 '쪽팔리거나', '이상한 사람이 될' 걱정을 하지 않고 그저 절대자에게 나 자신을 맡기면 되는 거 아닌가. 세상 사람 모두가 나를 이해하지 못해도 하느님 아버지만큼은 나를 이해하실 거라는, 주께서 정하신 나의 쓰임이 다 있을 거라는 믿음. 그런 면에서 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실제 종교 안에서 절대자의 존재 의미가 달리 해석될 수 있겠으나, 이 정도 쓰는 게 신성모독은 아닐 것으로 믿는다).


나는 결핍을 채워줄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며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받아줄 누군가를 항상 갈구한다. 하지만 그 전에 내가 먼저 상대에게 그렇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걸 안다. 항상 밑빠진 독에 물을 퍼부으며 감정을 소모하면서도, 다시 한 번 다짐해본다. 나부터 주변에 진심 어린 위로를 건넬 수 있는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내가 너의 이야기를 들어주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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