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
마스크에 커피를 쏟았다.
짙은 고동색 머그잔에 남아 있던 커피의 양을 가늠할 수 없었다. 벌컥 들이키자마자 적당히 식은 아메리카노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이런 젠장, 운도 없지. 마스크 안쪽에 검은 커피가 흥건했다. 재빨리 냅킨으로 닦아 본다. 다행히 마스크가 커피를 마셔버리기 전에 사태를 수습했다. 몇 차례 더 쓱쓱 문지르자 옅은 얼룩만 남았다. 생각보다 쉽게 스며들지 않는다. 그래, 이제 집에 가서 저녁을 먹을 거니까, 잠깐만 더 쓰면 되니까 큰 문제는 아니다. 마스크에서 커피 냄새가 나는 게 차라리 더 나을지도 모른다.
책을 마저 읽으며 카카오맵으로 버스가 어디쯤 오고 있는지 살핀다. 아직은 좀 남았네. 그러다 문득 입고 있던 티셔츠로 눈길이 향했다. 흰색 라운드티. 문득 커피를 티셔츠에 쏟지 않았음을 알아차린다. 티 앞면 이곳저곳을 다시 둘러보니 갈색 얼룩은 한 방울도 보이지 않았다. 천만다행이다. 그제야 커피를 마스크에만 쏟은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는지 깨닫는다. 운이 없던 게 아니라 그 반대였다. 운이 좋았던 거다. 하얀 티셔츠에 커피를 쏟는다는 상상만으로 정말 끔찍하다. 그래, 나는 럭키 가이니까. 역시 운이 좋구나!
이런 패턴의 일이 흔하지 않은 듯 흔하게 일어난다. 재수 옴 붙은 줄 알았는데 사실은 운이 좋았던, 전화위복의 사건들. 종류도, 성격도, 맥락도 가지각색이지만 삶에는 이런 일이 부지기수다. 소소한 예를 들어볼까. 지하철이 곧 승강장에 진입한다는 구내방송에 미친 듯이 계단을 뛰어내려갔는데 눈 앞에서 문이 닫히며 유유히 떠나버릴 때, 망연히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그 야속한 뒷모습이란! 그런데 다음 열차가 금방 들어오는 데다가 편안히 앉아서 갈 수 있는 자리까지 있다면?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예전 자주 찾던 식당에 가려는데 하필 자리가 없다. 왜 예약을 하지 않았냐, 여긴 원래 예약 따위 받지 않는다, 서로를 탓하며 (절대 자신을 탓하지 않는다) 다른 장소로 옮겼는데 알고 보니 숨겨진 찐 맛집이었다거나.
조금 더 크고 중요한 일도 있다. 예전에 해외에서 일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아 여기저기 지원하고 있을 때 계속 떨어지다 한 곳에 거의 합격했다. 썩 만족스러운 자리는 아니었다. 커리어 초반에 경력을 다져가는 상황에서 디딤돌 삼아 거쳐 가기에 나쁘지 않은 정도였다. 꼭 가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붙여준다면 일단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면접까지 잘 통과하나 싶었는데 어처구니없게도 마지막 신체검사 단계에서 불합격. 역시 쉽게 풀리는 게 없다. 그런데 나중에 다른 공고가 떴고, 훨씬 더 좋은 기회라는 걸 알게 되었다. 연봉도 더 많고 경력으로 삼기에도 나았다. 여기 지원했더니 찰떡같이 붙었다, 라고 마무리하면 아무래도 너무 뻔하지?
처음 지원한 국가는 캄보디아였다. 직전에 태국에서 일을 하면서 동남아가 나에게 잘 맞는다는 걸 알았다. 연중 따뜻한 날씨, 저렴한 물가, 맛있는 음식, 한국과의 훌륭한 접근성 등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곳이다. 물론 기본 인프라가 우수한 태국에 계속 살 수 있다면야 더할 나위 없겠지만 캄보디아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면접이 끝나고 나서 며칠 후 갑자기 '튀니지'로 가도 괜찮겠냐고 묻는 게 아닌가. 튀니지? 튀니지면 북아프리카잖아? 아니 여기에서도 프로젝트를 돌린단 말이야? (참고로 사하라 사막 이북과 이남은 같은 아프리카 대륙이지만 완전히 다른 문화권이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가 우리가 '아프리카'라는 단어를 들을 때 떠올리는 흑인이 많이 사는 지역이고, 북아프리카는 이슬람을 믿는 아랍권)
다소 당황스럽긴 했지만 묘하게도 특별한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정말 이상했다. 보통 이런 상황이라면 거절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이슬람 국가는 근처에도 가보지 않았다. 하물며 튀니지는 아랍어와 프랑스어를 쓰는 곳이라 영어가 거의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마음 속에 걸리적거리는 느낌이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길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곳에서 지내는 동안 내 예상보다도 훨씬 더 만족스러운 (물론 매 순간이 좋을 수는 없었지만) 시간을 보냈다. 알고 보니 지중해와 사막을 동시에 끼고 있는 관광의 천국이었던 거다 (물가마저 저렴하다). 심지어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원래 내가 가고자 했던 캄보디아 사무소는 일도 훨씬 많고 인간관계도 빡세다고. 몇 해가 흐른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삶이란 게 항상 이런 식이냐 하면, 당연히 아니다. 반대의 경우도 많다. 흰 티셔츠, 아니 흰 바지에 음식물을 떡 하니 떨어뜨릴 때가 있다. 지하철을 놓쳐서 지각하게 생겼는데 다음 열차 간격이 더럽게 길다든지,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가는 식당마다 빈 테이블이 없다든지, 장고 끝에 악수를 둔다고 끙끙대며 고민하다 지나쳐 버린 기회가 알고 보니 안정적이고 좋은 자리였고, 한 번 시기를 놓쳤더니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든가 하는. 이럴 때는 괜시리 짜증도 나고, 후회도 하고, 이런저런 회한과 아쉬움에 몸서리치기도 한다. 우리는 모두 사람이니까.
이렇게 여러 일들이 섞이다 보면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 것이었는지 판단하기 어려운 순간이 오기도 하고, 그렇게 더 시간이 쌓이다 보면 작은 일들의 좋고 나쁨을 구분하는 것조차 무의미해지기도 한다. 어떤 지하철을 타느냐, 어떤 식당에 가느냐, 어떤 자리를 잡느냐, 이 모든 일들이 나름 중요하다면 중요하다 할 수 있겠으나, 또 하나하나 그렇게 목숨 걸 정도냐고 하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작은 사건 하나가 불러오는 파도가 삶이라는 넓은 바다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일은 흔치 않다. 때로 파도가 쌓여 모래사장에 흠집을 내기도 하지만 대개는 그 또한 시간이 지나면 그만인 것을. 그렇다면 이러나 저러나 그리 큰 문제일까? 내가 커피를 마스크가 아닌 티셔츠에 그대로 들이부었다 한들, 그게 뭐 대수랴. 세탁기에 넣어 돌리면 그만이다. 설령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남는다면 잠시 짜증을 내다 새 옷을 장만하리라.
결국 다시 태도. 기실 어떤 태도로 세상을 바라보느냐가 삶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일어난 일을 주워담기란 불가능하다 해도, 벌어진 상황에 어떻게 반응할지는 선택의 영역 안에 존재한다. '아 또 꼬이네 왜 이렇게 항상 운이 없지'라고 생각하기보다는 '그럴 수도 있지, 더 좋은 일이 일어날 거야'라는 태도를 갖는 게 한결 낫다. 그러니 매사 일희일비, 아등바등, 너무 심각하게 살지 말아야겠다(고 오늘도 부질없는 다짐을 한다).
Don't be so serious. 가볍게 가자.
너 말이야 너, 이 글을 쓴 바로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