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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석 Oct 11. 2021

걸음이 느렸던 소년

브런치를 시작하며 가장 고민했던 부분은 필명이었다. 일단 의미가 있어야 했고, 어감이 좋아야 했으며, 마지막으로 나 자신의 정체성을 담아낼 수 있어야 했다. 의미가 충분하면서 어감까지 괜찮은 단어를 찾는 것부터 쉽지 않았는데, 거기다 스스로 '이 이름은 나 자신을 반영한다'라는 느낌을 가질 수 있게끔 하는 필명을 짓는다는 건 정말이지 뇌가 마비될 정도로 힘든 일이었다.


대학 동아리 때 썼던 패명을 다시 쓸까, 외국에서 썼던 영어 이름으로 할까, 내가 좋아하는 오브제를 가져다 활용해볼까, 이도저도 아니면 그냥 본명을 써야 하나. 아 본명은 왠지 여기선 쓰고 싶지 않은데. 순우리말 사전으로도 모자라 라틴어 사전까지 붙잡고 머리를 싸매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적절한 필명을 만드는 게 어떤 글을 쓸 것인가보다 더 중요해서 작가 신청에 필요한 글을 다 써놓고도 이름을 정하지 못해 며칠이 지나도록 신청 버튼을 누르지 못할 정도였으니, 얼핏 주객이 전도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자아를 내세워 글을 써나갈 것인가, 라는 질문은 나에게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어서 (그건 곧 나라는 사람을 내보이는 일이기에) 이 브런치라는 열린 공간에 나의 정체성을 대표할 존재를 세운다는 건, 과하게 표현하자면 3년 간 대리석을 깎아 다비드상을 빚어낸 미켈란젤로의 마음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정체성을 담아내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지난 삶을 빠르게 복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내가 지금껏 겪은 여러 일이나 관계의 공통점이 뭐가 있을까를 생각하다 문득 떠오른 게 다른 사람들보다 전반적으로 느리다는 것이었다.


나는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어릴 때부터 어머니는 종종 내가 말이 늦어서 걱정이 꽤 많았다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다른 집 아이들은 입이 트여서 어설프게나마 조잘조잘하기도 하는데, 나는 엄마 아빠 발음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그래서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앞으로도 계속 이러는 건 아닌지 걱정하셨다는 이야기를 몇 번 들었다. 시간이 지났으니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지만 당시엔 충분히 걱정되셨을만도 하다. 애가 말도 똑부러지게 못 하고 그러면 부모 마음이 얼마나 속상할까. 어디 가서 먼저 말 많이 하고 그러지는 않아도 충분히 말 잘 하는 사람으로 컸으니 참 다행이지 뭔가.


키도 늦게 컸다. 왜 어릴 때는 여자아이들이 더 성장이 빠르지 않나. 이건 나도 정확하게 기억하는데,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왜소한 꼬맹이였여서 같은 반 여자아이들이 나를 다소 깔보기도 했고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달까) 초등 고학년부터 중 1~2 정도까지는 한 살 어린 사촌 여동생이 나보다 키가 컸어서 엄청 스트레스 받았다. 그게 뭐라고 그렇게 자존심이 상하던지, 그 어린 녀석이 명절이나 제사 때마다 가기 싫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렇게 중 2때만 해도 앞에서 두 번째 내지 세 번째 줄에 앉던 내가 본격적인 성장을 하기 시작한 건 중 3부터였다. 고 1 때까지 매년 10cm 가량 크더니, 그 이후에도 조금 더 커서 180을 넘기게 되었다. 성인이 된 이후에 초등학교 동창회 가서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꼭 복수해주고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그럴 기회가 없었다 (크오오!!!).


이성에 대한 관심도 늦었다. 중고등학교 내내 여자보다는 친구가 더 좋았고, 각종 운동, 게임, 만화 등에 빠져살았다. 중 1~2 때는 사실 여자 쪽에서도 관심이 없었고 중 3때부터 인기가 많아졌는데 아무래도 역시 키가 결정적이지 않았을까 싶다. 가끔은 1:1 데이트를 하기도 했지만 그 이상 발전되지도 않았다. 연애에 대해 잘 모르기도 했고, 더 정확히는 관심 자체가 없었다고 해야겠다. 그래도 고3 이후로 대학 가고부터는 연애 잘만 했으니 큰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다.


내 의지와 직접적 관련이 없는 이런 것들 외에, 공부나 일에서도 비슷한 성향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야학교사 시절, 초반에는 정해진 수업만 딱 하고 교사회의나 야학 행사에도 적당히 참여해서 동료 쌤들 중에는 내가 다소 차갑거나 어둡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반 년쯤 지나면서부터 적응도 하고 애정도 생겼는지, 어쩌면 내 방식대로 무언가를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자발적으로 뭐든지 열심히 했다. 수업 준비, 회의 준비, 행사 기획 등은 물론 각종 보강(심지어 주말에도)에 검정고시 앞두고는 마땅히 공부할 곳이 없는 학생들을 위해 밤새 야학을 개방해두고 자습을 시키기도 했다. 교사 없이 학생들만 있는 채로 야학을 열어둘 수는 없어서였지만,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을까.. 곰곰 생각해 보면, 결국 '사람'이었던 것 같다. 가르치는 것도 좋고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느낌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좋고, 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좋아서 그렇게 할 수 있었으리라.


사회 진출도, 그 이후 커리어를 쌓아가는 것조차 늦은 편이다. 물론 군 생활을 장교로 하면서 조직 생활, 특히 공공 조직에 대해 어린 나이에 정말 많이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 유학 준비와 공부로 상당히 많은 시간을 보냈고, 남들과 비슷한 시기에 제대로 된 (과연 무엇이, 그리고 어디까지 '제대로'겠냐마는) 취업을 하지 않았다. 일을 하면서도 길고 짧은 공백기가 여럿 있었던 탓에 결과적으로 나이에 비해 '이력서에 쓸 수 있는' 경력은 약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력서의 숫자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채용이나 전문성을 고려해야 할 때는 양적 경력사항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안다. 그게 항상 옳을 수 없다 해도, 내가 사람을 뽑는 입장에 서 보니 판단 기준으로 삼을 만한 거라곤 그것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하다하다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 깨달은 것(다른 말로 하자면 가치관을 재정립한 것)도 느렸다. 다만 이 항목은 다툼의 여지가 있다. 어떤 이들은 태어났을 때부터 당연하게 여겼거나, 혹은 어려서부터 알게 된 것들을 나는 30대가 지나면서야 겨우 조금씩 깨닫게 되었는데, 나보다 느린 사람 역시 꽤나 많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이다. 그래도 나는 내가 많이 늦었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정말 비싼 대가를 치렀다고, 어쩌면 여전히 치르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마음 한 켠에서는 그나마 늦게라도 알고 깨닫게 된 게 어디냐고, 아직도 헛발질하면서 살지만 이러다 보면 원하는 방향대로 살아갈 수 있게 되지 않겠냐고 나를 다독인다.




필명을 처음 지을 당시 '걸음이 느린 아이' 뭐 이런 컨셉으로 어떻게 고쳐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삶의 주요 변곡점, 이라 할 만한 지점들에서 항상 뭔가 느릿느릿 방황했던 자신을 떠올리다 보니 괜히 짜증도 나고 언제까지 이럴 건가 싶어 답답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삶의 모든 선택들에서 단 한걸음씩만 느렸더라도, 이 각박하고 치열한 극한 경쟁사회에서 그걸 다 합치면 나는 대체 몇 걸음 뒤처진 걸까.


조금 더 삶을 되새기다 보니 이내 곧 따라잡았던 게 떠올랐다. 그래서 '슬로스타터'가 더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장으로 풀면, 천천히 시작하는 사람,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면 어느새 곧잘 하는 사람. 하지만 필명으로 삼지는 않았다. 정체성 면에서는 받아들일만 했지만 어쩐지 영어를 그대로 한글로 옮긴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이미 그 필명을 쓰는 분도 있었고. 그런데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직감적으로 정체성 면에서도 완전히 부합한다고 여기지 않았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스타트만 늦은 건지, 스타트부터 다 늦을 건지, 조금 더 내 삶을 지켜봐야 할 것 같다는 기분이다. 다른 것들처럼 시간이 지나고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곧잘 하는 사람이 될지. 깨달은 인생의 가르침들을 머릿속에서만 되뇌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 수 있을지.


자신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쩌겠나, 반대의 경우는 내 사전에 없다고 간주할 수밖에. 따라서 이 글의 제목은 과거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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