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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y Feb 19. 2024

기분 좋은 일

사소한 행복

서류 몇 장을 작성할 일이 있었는데,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고 머릿속으로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시간을 보냈다. 원래 크게 중요하지 않은 일은 뒤로 밀리고 중요도를 정해 최대한 빠르게 하는데 역시나 밀렸던 일을 처리하는 건 미루게 된다. 내가 원래 이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원래 이랬다. 단점보다는 장점에 집중하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긴 하지만 단점이 워낙 많으니 이런 단점은 좀 고쳐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는데 이 생각자체도 생각만 하고 미루게 되었으니 스스로 한테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눈에 들어온 책이 있었다. ‘오늘도 망설이다 하루가 다 갔다.’ 예기불안, 걱정, 회피 등 이런 내용을 다루는 책인데 “맞아, 맞아” 하면서 천천히 읽었다. 물론 많은 도움이 됐지만 이게 얼마나 갈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내용 중에 몰랐던 사실들을 많이 알았으니 전보다 나으리라 생각한다.


책을 다 읽고 바로 미뤘던 것들을 생각해 봤다. 미뤘던 것들은 하기 싫어 회피를 했었던 아주 단순한 것들이었다. 회사 다닐 때는 방이 있어서 간혹 휴지조각 같은 게 바닥에 떨어져 있어도 다음날이면 청소가 되어 있었다. 지금은 내 방에서 휴지통에 던졌는데 안 들어가고 튕겨 나온 조그마한 플라스틱 상자가 발아래 그대로 놓여있다. 내가 내 손으로 다시 휴지통에 넣지 않는 한 얼마가 됐건 그대로 있을 것이다. 이렇게 방치되었던 것들과 미뤘던 걸 생각해봤는데 너무 많아서 리스트를 만들어야 할 지경이었다.


우선 두 가지만 하기로 했다. 예전에 집에 있던 화분을 모조리 분갈이해서 생긴 흙을 놔뒀는데 이걸 버리고 미뤘던 서류 작업을 하기로 했다. 흙만 먼저 빨리 버리고 왔다. 이렇게 하나를 끝내고 서류 작업을 하려고 시작했다.


서류 작업을 미뤘던 이유는 회사 다닐 때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던 프린트가 집에서는 프린터를 꺼내야 하는데 버릴 책상 밑에 꽁꽁 숨겨져 있다. 책상은 물건들을 좀 정리하고 버릴 요량으로 그대로 있는데 물건 정리도 다 안 됐고 버리지도 않았으니 프린터는 더 깊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 프린트를 하려면 여러 가지 것들을 선행해야 하는 문제로 귀찮아서 미루게 됐었다. 또 한 가지 미뤘던 이유는 프린터를 구입한 게 2016년도였는데 이렇게 오래돼도 토너가 괜찮을까 하는 문제였다. 정리도 하고 책상도 버리고 프린터를 꺼내서 프린트했는데 토너가 오래돼서 안되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 때문에 결과를 그렇게 생각하자 더 하기 싫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오늘은 꼭 해야 한다고 마음을 먹었으니 정리는 뒤로 하고 책상도 버리지 않고 구석에서 먼지 쌓인 프린터를 꺼냈다.


먼지를 잘 털어주고 물티슈로 깨끗하게 닦아주고 전원을 연결하니 “철컥, 철컥” 하는 게 왜 이제야 깨웠냐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제 PC와 연결을 하면 되는데 USB선이 없었다. 공구함을 뒤져서 연결하려고 하니 오래된 제품이라 USB Type B였다. 십 년도 더 된 외장하드 케이스가 동일한 규격이라는 게 생각나서 다행히 찾아서 연결을 했다.


USB까지 연결을 하고 다시 전원을 껐다가 켰다. 그랬더니 프린터에서 짙은 회색 연기가 슬슬 피어올랐다. 이거 너무 오래 사용을 안 해서 터지는 건가 싶어 그 회색 연기 가까이 갔는데 다행히도 타는 냄새는 아니었다. 잠깐 연기가 올라오더니 다시 “철컥, 철컥” 소리를 냈다.


프린트는 정상적으로 될까 너무 궁금해서 재빨리 프린트를 해봤다. 다시 소리를 내더니 정상적으로 프린트가 됐다. 이게 뭐라고 너무 기분이 좋았다. 이제 서류 작업을 해야 하는데 그 생각은 뒤로한 채 프린트 자체가 잘 된다는 게 얼마나 기쁜지 최근에 기분 좋았던 일이 이렇게나 없었나. 마치 짝사랑하던 사람을 만나게 된 느낌 정도로 기뻤다. 서류 작업을 잘 마치고 상당히 뿌듯했다. 프린터도 기특하고 책 한 권 봤다고 바로 실천한 나 자신에게도 칭찬을 했다. 


일기 쓸 때 항상 감사한 다섯 가지를 쓰는데 이 다섯 가지 중에 두 개가 프린터얘기가 됐다. 별것도 아닌 일에 기분이 좋고 사소한 행복감을 느낀 게 상당히 오랜만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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