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변 사람들은 관심 갖지 않는 나만의 단골 도피처
미술관으로 가요
학교 공부, 대외활동, 자격증, 자기소개서... 신경 쓸 일이 많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온다. 어딘가로 잠깐이라도 혼자 도망가고 싶었다. 학교와 가까운 곳이면서 조용하고, 아는 사람을 만날 일이 거의 없는, 마치 동굴 같은 곳. 역시 미술관이 제일 나은 것 같아 버스를 타고 향했다.
우리 지역 시립 미술관은 내가 평소에도 자주 찾아가는 곳이었다. 늘 그랬듯이 혼자 도착했다. 평일이라 한산했다. 휴대폰을 비행기 모드로 해놓는다. 온전히 전시에만 집중하기 위해 휴대폰은 사진 찍을 때만 사용하곤 한다. 돈을 내고 티켓과 전시 소책자를 받는다. 첫 번째 전시공간으로 걸어간다. 이제부터 나만의 전시 동굴이 펼쳐진다. 나와 작품, 전시 지킴이를 빼면 이 동굴에는 아무것도 없다. 온전히 작품에만 집중할 수 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도, 누군가와 소통하기도 하는 공간
웅장하고 거대한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소책자와 벽면에 적힌 설명을 함께 보며 작품을 관찰한다. 작가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고민해본다. 직감적으로 느끼기 위해 이미지에 고요하게 집중한다. 가까이서도 보고, 멀리서도 본다. 머릿속에 다채로운 감정만 존재한다.
원래는 전시 지킴이가 있어야 하는데, 누군가가 작품에 대해 관람객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이상하다, 지킴이는 전시 설명은 안 하는데. 작가인 것 같아 나가면서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혹시 작가님이세요?"
"네?"
서로의 눈을 3초간 멍하니 바라봤다. 이내 작가로 추정되었던 전시 지킴이는 웃음소리가 전시공간에 크게 울릴 정도로 소리 내어 웃었다. 나도 같이 호탕하게 웃어버렸다. 그분은 수줍게 아니라고 말씀하시고, 옆 계단에 있는 작품의 전시 설명을 이어나갔다.
"작품이 소리에 반응해요. 박수를 크게 3번 쳐보세요."
내가 박수를 치자 작품에 불이 3번 깜빡깜빡했다.
"오~ 신기해요."
나는 마치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감탄했다. 천진난만하게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오랜만에 활짝 웃었다.
다른 작품을 보기 위해 계속 움직였다. 천장과 바닥을 각각 바라보는 거대한 금속 인간 동상, 더운 바람을 쬐면 투명해지는 사군자 회화 등 여러 개성 있는 작품들이 이어졌다. 맘에 드는 작품이 있으면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시간이 몇 시인 지도, 알림이 오는지도 몰랐다. 단지 작품을 휴대폰에 담을 뿐이었다. 3층으로 올라갔다. 마지막 전시공간 옆, 미디어 아트를 20분간 관람하고 나오는 길에 어느 지킴이 분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 나오시네요? 꽤 오래 관람하시네요."
"네, 제가 좀 오래 보는 편이에요."
마지막 전시공간의 지킴이였다.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다. 원래 혼자 조용히 관람하는 편이라 대화가 사실 어색했다. 근데 그분이 말을 계속 걸어오기 시작했다. 작품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해주고 싶으셨던 눈치였다. 궁금한 작품이 있으면 물어보라고 하시길래, 의미 파악이 잘 안 되는 것부터 물어봤다. 마지막 공간의 작품들은 특히나 더 추상적이었다. 그래서 어쩌다 보니 모든 작품에 대해 물어보게 되었다. 설명을 들으며 감상하니 마음에 확 와 닿았다.
작품과 작가를 통해 마주하는 내 영혼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이 있었다.
"이 작품은 무슨 의미예요?"
"작가님이 자신의 생애를 추상적으로 표현한 작품이에요. 기간별로 나눠져 있는 건데, 높이가 높은 순으로 최근이라고 보시면 돼요. 가장 높은 게 30대인 현재를 의미한답니다."
철봉을 수직으로 여러 개 합친 것처럼 생긴 구조물에 알루미늄 포일이 위아래로 겹쳐져 넓게 널려 있는 작품이었다. 5개의 구조물이 있었는데, 가장 높이가 높은 구조물이 특히 눈에 띄었다.
"왜 이것만 많이 구겨져 있고, 불규칙적으로 찢겨 있죠?"
"불안함을 표현한 거예요. 작가님이 예전보다 최근에 더 불안해하고, 또 고민이 많아졌다고 해요. 그러한 현재의 심리 상태를 표현한 것 아닐까요? 아, 저분이 작가님이세요."
캐주얼하게 입은 여자분인데, 다른 이와 웃으며 즐겁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근데 난 작가에게서 무언가 어두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캡 모자를 푹 눌러써 눈이 안 보였고, 옷들은 모두 어두운 계열의 색이었다.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내 마음 깊은 곳의 상처와 불안이 은은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마음 한편이 아려왔다. 고개를 돌려 작품들을 전체적으로 스윽 둘러봤다. 모두가 무채색으로 표현되어 있어 어두웠다. 말하지 못하고 삼킨 말들에 표정을 담아 그린 작품들이라는데, 그 삼킨 말들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도 그런, 말하지 못한 말들이 있었다. 힘들고 지치지만 혼자 삼키기만 해야 했던 하소연들. 작가가 전달하려는 메시지와 내 마음이 일치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 영혼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것 같았다. 기분이 묘했다. 하지만 뭔가 홀가분했다.
감상을 마친 후, 서로 해맑게 인사를 하고 난 내려왔다. 그리고 출입문을 통해 동굴 밖으로 나갔다. 벌써 해가 어둑어둑해졌다. 시간을 보니 3시간이 흘렀다. 다리는 조금 쑤셨지만, 마음은 정말 가벼웠다. 충전된 느낌이었다.
내가 일상에서 바랬던 건, 단지 나 또는 누군가와의 순수한 교류가 아니었을까 생각하며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