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라
01.
여러분이 어릴 때 부모님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무엇인가?
"어지르지 마라, 방 청소해라"
"텔레비전 좀 그만 봐라"
"양치질하고 자라"
여러분이 학창 시절에 부모님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무엇인가?
"공부해라"
"컴퓨터 게임 그만해라"
"일찍 일찍 다녀라"
여러분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부모님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무엇인가?
"전화 좀 자주 해라"
"돈 좀 아껴 써라"
"밥 잘 챙겨 먹고 다녀라"
나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아빠에게 이 말을 가장 많이 들었다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라"
집에 전화를 할 때마다 아빠가 이 말을 하곤 했는데 참 신기하게도 같은 말이지만 상황에 따라 다르게 들렸더랬다. 회사에서 일을 제대로 했을 때는 '너는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었구나' 라며 나의 어깨를 두드려주는 칭찬과 응원의 말과 같았고 만약 내 몫을 제대로 해내지 못해서 혼이 났거나 팀에 민폐를 끼쳤을 때에는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지!'며 나를 질책하고 따끔하게 혼내는 가시와도 같은 말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14년 차 직장인에게도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다.
02.
회사생활을 하면서 내가 느낀 '필요한 사람'이란 것은 '일 잘하는 사람'이었다. 회사에서 필요한 사람은 당연히 일을 잘하는 사람이고, 성과를 내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이것이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6년 차쯤 됐을까, 당시 내가 맡은 프로그램은 힘들기로 유명한 프로그램이었는데, 작가 한 명이서 자료조사부터 섭외, 대본, 현장 진행까지 참으로 다양한 일을 맡아야 했다. 그 모든 일을 '잘 해내는 것'은 거의 기인열전과도 같은 일이었다. 매일 밤을 새야 했고, 주말 없이 24시간 동안 일을 해야만 소화할 수 있는 양이었다. 당시 작가팀들 모두가 밤샘을 하며 일주일을 꼬박 고생하면 겨우 방송 한 편이 나왔고 반나절 잠시 숨을 돌린 뒤에는 그다음 주 방송을 준비하기 위해 또다시 밤샘을 하며 24시간을 불태워야 했다.
그때는 내가 일을 잘하면 사람들에게 '필요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했기에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미친 듯이 일만 했다. 그러다 문득 그런 날이 찾아왔다. 외롭고 힘들고 고단하고 지쳐서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은 순간 말이다. 그때 핸드폰을 봤는데 이럴 수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부모님과 통화를 한지도 한 참이 넘었고, 가장 친한 친구와도 몇 달째 연락을 하지 못했고, 고등학교 친구들 톡방에서 나는 이미 없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순간 파도처럼 밀려드는 고독감을 느꼈다. 회사 밖에서 나는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은,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때야 이해가 되었다. 필요한 사람과 일 잘하는 사람은 완전 별개의 것이라는 것을. 아빠가 강조했던 필요한 사람은 누군가 도움이 필요할 때 기꺼이 도와주고, 누군가 필요로 할 때 곁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었다. 나는 일을 하면서 인간미를 잃었고 성과에 집착했다. 바쁠 때 가족, 친구에게 연락이 오면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 해놓고 까맣게 잊어버리곤 했다. 그런 순간들이 쌓이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투명인간이 되었고 누구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나와 온기를 나누고 싶어 하지 않았다.
03.
그 사실을 깨닫고 나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이대로 살다 간 칠흑 같은 고독에 잠식해 버릴 것만 같았고 결정적인 건, 이러다 정말 핫식스에 절여진 인간 피클이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가족과 친구들 곁으로 돌아갔다. 그들에게 온기를 나눠주고, 온기를 나눠 받으며 '필요한 사람, 인간미가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시간을 보냈다.
방법은 참 간단했다. 일로 가득찼던 내 삶에 일을 덜어내고 여유를 채우면 되는 것이었다. 여유가 생기니 주변을 돌아보게 되었고 내 일이 아닌 남의 일에 관심이 가게 되었다. 그렇게 관심을 주고 연락을 하다보니 내 주변엔 다시 온기로 가득찼다. '왜 사람들이 나를 필요로 하지 않지?'라고 생각하기 이전에, 내가 먼저 사람들을 필요로 했고 그것은 돌고 돌아 온정이 되어 쌓여갔다.
요즘 문득 생각한다. 나는 아빠의 말처럼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었을까? 나는 당당히 '그렇다'라고 대답하고 싶다.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한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기꺼이 내 시간과 내 곁을 내어줄 수 있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마음이 따뜻해지고 삶이 풍족해지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