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바라던 어른이 되었을까

태풍이 지나가고(책, 고레에다 히로카즈) 리뷰

by 이마루


나는 내가 바라던 어른이 되었을까?


마침내 펼쳤다.

책과의 타이밍이라는 거, 분명히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태풍이 지나가고>는 구입한 지 3년은 되어가는 책이다. 그럼에도 선뜻 시작하지를 못하다가 오늘 문득 이 책이 생각난 듯 펼쳤다.


오전에 아빠, 엄마에게 짜증을 내버렸다. 그냥 따뜻하게까지는 못하더라도 덤덤하게 알려주면 되는걸, 답답하다는 말을 섞어 화를 내버렸다. 나란 사람은 왜 꼭 부모님께만 강한 사람이 되고 마는 걸까.


그런 일이 있었으니 오후가 편했을 리 없다.


나 자신에 대한 짜증과 화, 죄책감, 후회, 우울감이 한 그릇 안에 섞여 그 불쾌한 것을 마치 벌컥 들이키기라도 한 것처럼 감정에 체하고 말았다.


지금이다, 싶어서 이 책을 집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팬이라 영화로 먼저 봐서 줄거리는 아는 소설이었다. 책 속 옮긴이의 글에 있던 한 글귀가 시선을 끌었다. 둘도 없이 소중하지만 성가신 존재, 가족이라고. 사실 완독하고 보니 이럴 때는 <걸어도 걸어도>의 이야기가 더 맞겠다 싶다.

주인공 료타는 과거엔 문학상도 받은 나름 전도유망한 소설가였으나 지금은 15년째 글을 쓰지 못하고 있다. 취재를 핑계로 탐정사무소에서 일하고 있지만, 그나마도 직업 비윤리적인 행동을 일삼으며 뒷돈을 챙기고 그렇게 버는 돈은 도박에 쓴다. 료타에게는 이혼한 전처와 그 사이의 아들이 있다. 이혼 후에도 전처를 미행하며 근황을 캐는 등 미련으로 질척이고 아들의 양육비는 몇 개월은 밀려있다. 이런 그도 언젠가는 어머니에겐 좋은 아들, 자식에겐 좋은 아버지가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가지만 행동은 그토록 닮고 싶지 않았던 돌아가신 아버지를 닮아간다.


“꽃도 안 피고 열매도 안 열리긴 하지만, 너라고 생각하면서 매일같이 물 주고 있잖니.”
35p


료타는 오랜만에 어머니가 계시는 집에 가서도 팔아버릴 물건부터 찾는다. 남에게 빌린 돈으로는 어머니에게 용돈을 준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작품은 항상 소소한 일상을 다루는 것처럼 읽히지만 이야기가 끝나면 따뜻함 속의 알싸함이랄까. 그의 작품에는 ‘악인’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이 등장할 뿐이다. 언제나 나 자신이 느끼고 있던 후회와 미련, 찌질의 포인트를 보통의 주인공에게 섬세하게 그려낼 뿐이다. 그래서 읽으면서도 나는 료타를 비난할 수가 없다. 과연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나 싶어서.

오랜만에 본가에 가서도 남는 샴푸와 린스부터 챙겨오는 내가 무슨 말을 해.

파주 사적인 서점에서 구입. 책 커버를 예쁘게 싸주셨다.

이 소설에도 사건이랄 것이 있다면, 태풍이 오는 날 벌어진다.

료타는 태풍을 구실로 어머니의 집에서 전처, 아들과 하룻밤을 보낸다. 그는 이 기회에 가족과의 화해, 관계 회복을 원한다. 그렇지만 현실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이 밤이 지나고 나면 무언가가 달라져있을 것 같지만, 사실 변한 것은 료타의 마음가짐뿐이다. 성공한 작가, 좋은 아버지가 되겠다는 허황된 다짐이 아닌 현실을 받아들이는, 직시하는 마음이랄까.

항상 다짐만큼 행동이 따라주지 않는 것도 어쩜 그렇게 나와 같은지 모르겠다. 나의 결말도 이 이야기와 같을까 봐 서늘하다. 사실 아직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태풍이 오기 전의 료타와 같은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바라던 어른의 모습으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까지가 어른의 완성이겠지.

직장 생활을 하면서 원래 원하던 내 모습은 많이 깎이고 깎였다. 그럼에도 뭐가 더 남아있는지 여전히 놓지 못하는 내 모습은 분명 존재한다. 아직 태풍이 오지 않았나 보다. 아직은.

료타는 그렇게 혼자 열을 올리며 말하는 어머니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즐거워 보인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어머니는 기다리고 있는 거다. 십오 년 동안.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는 아들뿐만 아니라, 그 가족과 새 소설을 줄곧 기다리는 거다. 어쩌다 들렀을 뿐인 청띠제비나비를 기다리는 것처럼.
182p

영화의 영향으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작품 속의 어머니는 언제나 키키 키린의 모습이다. 그리고 료타 또한 아베 히로시다. 영상의 힘은 그런 면에서 대단하다.

읽고 난 마음은 언제나 그렇듯 부모님께 전화 한 통,이다. 그렇지만 언제나처럼 내일 해야지로 바뀌겠지. 우리 엄마도 귤나무에 앉을 청띠제비나비처럼 나를 기다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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