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전당 라이브러리(부산 편)
이날 오전에는 해동용궁사를 거닐었다.
날씨가 좋으니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정면으로 맞아도 기분이 상쾌하다. 추워도 견딜 만한 추위다.
어느 날 친구 따라 사주를 보러 간 적이 있었다. 몸에 화가 많으니 물 근처에 있으면 좋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는 재미 삼아 보러 간 그 목적에 충실히 듣고 흘려버리려고 했으나 어째 이 말만은 머릿속에서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다. 바다를 보고 기분이 좋아질 때면 그 말이 종종 떠오른다. 정말 그런 건가? 바닷바람 따라 귀가 팔랑 인다.
오늘 향하는 곳은 부산 영화의 전당 라이브러리, 도서관이다. 이런 도서관을 품었으니 부산 시민들은 얼마나 좋을까. 영화를 사랑하는 나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콩콩 설렌다. 여행 경로를 정하면서 이 장소를 발견했을 때 어쩌면 여행의 메인 코스(?)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다.
토요일에 방문했다. 주변에 사람이 보이지 않아서 설마..했지만 다행히 휴관은 아니었다. 바로 4층으로 올라갔다.
옛 영광을 간직한 어느 오래된 건물의 황량함이랄까. 4층에 내리자마자 나를 맞아준 건 팔 할이 바람이었다. 풉. 건물풍인지 해풍인지 뭔가가 먼저 얼굴을 스쳤다. 아니, 강타했다는 표현이 맞겠다. 내게 부산은 바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면 다른 세상이 열린다. 고요와 적막 사이 그 어디쯤에 도착한 나는 책향기부터 들이마셔본다. 마치 그곳에 공기가 있다는 것을 실감해 보려는 것처럼.
진열된 책 사이를 가볍게 걸어본다. 아니, 완전한 영화 전문 아카이브로 들어와 버렸잖아? 책장 왼편으로는 멀티미디어실과 LP 음반을 들어볼 수 있는 공간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었다. 이곳에서는 시네마테크부산 개원 이래로 역대 기획전 자료나 부산국제영화제 출품작 자료들을 볼 수 있다고 한다. 한국영상자료원 VOD 전용 열람석에서는 이곳에서 제공하는 영화들도 감상할 수 있다. 이날도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영상 부스에서 영화를 관람 중인 사람이 있었다. 우리 집 앞에도 이런 도서관 하나만...
10대 후반부터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19살 때였던가. 어린 시절 토요명화만 기다리던 흔한 시기를 거쳐 마침내 아, 내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깨닫고 내 스스로 DVD를 사서 보기 시작한 게 이 무렵이었다는 얘기다. 그렇게 마음먹고 본 첫 번째 DVD는 비비안 리와 클라크 게이블 주연의 1939년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스칼렛이라는 인물의 상징성을 이해는 하면서 본 걸까, 심히 의심스럽다. 그러나 내용도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호기심에 고른 첫 DVD 영화치고는 성공적이었다. 아직도 결말을 보고 벙쪘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어? 이렇게 끝난다고? 그렇지만 지금은 그 결말을 이해한다. 그리고 그녀조차도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려는 스칼렛이라는 인물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인생에는 저마다의 운과 타이밍이라는 게 있다지만, 한참 영화를 보기 시작한 그때 이런 도서관이 내 활동 반경 안에 있었다면 다른 꿈을 갖고 다르게 살아갈 수도 있었을까, 못내 아쉬운 생각을 또 해본다. 언제나 가보지 못한 길은 현실보다 더 좋고 달콤해 보인다. 부산에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이 생각은 다음 장소로 향한 부산연제만화도서관에서 절정을 찍는다). 잠시 다녀가는 어느 이방인은 곧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그저 아쉽기만 하다. 자리에 앉아 공부하고 있는 사람들, 독서하는 사람들, 글을 쓰는 사람들, 영화를 보는 사람들. 예술과 미래 모두를 준비하기에, 또는 꿈꾸기에 완벽한 도서관이라는 생각이 든다. 2021년에 개관해서 그런지 시설도 깔끔하다.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시다. 원형으로 난 길 따라 도서관을 한 바퀴 돌아봤다. 한쪽에는 지금까지 전시된 작품들의 액자 포스터가 걸려 있다. 이곳에서 나는 영화라는 예술에 문득 마음 깊은 사랑을 느낀다. 삶에서의 어떤 주된 기억이랄까, 나 자신을 형성해 온 굵직굵직한 경험들은 전부 영화와 관련이 있었다. 힘들거나 무섭거나 혹은 외롭거나 아픈 순간에도 언제나 나를 지켜준 건 영화 속 캐릭터들이었으므로.
보고 싶던 영화 전문 잡지들이 한자리에 다 모여있었다. 필로, 프리즘오브, 키노 등, 이걸 다 읽을 수만 있다면...!! 여행을 연장해야 하나. 이거 원.
이곳에서 몇 권을 선택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날은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에 대한 글만 발췌해서 읽었다. 드라이브 마이 카와 우연과 상상이라는 영화를 좋아한다. 그래서 작품에 관한 대담이나 평론이 실린 잡지만을 골랐다. 한..두 시간은 있었던 것 같다. 계획을 훨씬 뛰어넘은 오랜 시간이었다.
집으로 돌아가 동네 도서관에서 빌려 읽을 책들도 미리 봐두었다. 영화 전문 도서관이라 그런지 진열된 도서 셀렉션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읽어보고 싶은 책들이 많아 그 앞에서 메모만 신나게 끄적끄적. 이 중에서 눈에 띈 책은 김소미 작가의 영화에세이 <불이 켜기지 전에>다. 이전 글인 건대입구 인덱스숍 여행기에도 썼지만, 그곳에도 이 책이 있었는데 그때는 보지 못했다. 다녀온 다음 찍은 사진을 보고서 책의 존재를 인지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곳 영화 도서관에서는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았다. 주변이 온통 영화영화라 그랬는지, 눈과 마음 모두 영화이야기로 튜닝이 되어 있었나 보다. 이 책은 여행의 마지막 날에 또 다른 서점인 부산 영광도서에서 구입했다.
집 근처에도 좋은 구립도서관은 많다. 그런데 영화 코너만큼은 늘 책장 하나가 전부여서 찾는 책이 없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랬으니.. 모든 공간이 영화와 관련된 이 도서관에서 눈이 안 돌아갈 수가 없지 않았겠나. 특정 장소가 남긴 강한 인상이 여행의 전체적인 기억을 장악하는 경우가 있다. 이번 부산 여행에서 그 자리를 차지한 건 영화와 만화였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마음은 영화 아카이브, 그‘영화 도서관’에 가 있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