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제만화도서관(부산 편)에서
책과 관련한 장소라면 꽤 여러 지역을 다녀봤지만 그중에서 기억에 남는 곳 중 하나가 바로 부산 연제구에 있는 이 만화도서관이다. 일반 도서관이라면 소설과 시, 수필이 한가득 꽂혀 있을 책장에 만화책이 한가득이다. 이런 도서관, 오래전에 상상한 적이 있었다.
만화를 읽고 싶은 날에는 놀숲이나 벌툰처럼 시간제 만화 책방을 찾는다. 보통 만화책 1권을 읽는 데에 30분은 걸려서 2시간이나 3시간제를 선택해 4권에서 6권을 읽고 나오는 게 최선이었던 것 같다. 집으로 가져가 더 읽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는 점은 요즘 만화책방의 아쉬움이랄까. 대출이 안되니까 말이다. 그러니 부산에서 만화 도서관을 알게 되었을 때 느낀 반가움이 얼마나 컸겠는가. 뭐, 여행자의 신분이라 마찬가지로 만화책을 집으로 들고 갈 수 없었다는 것은 여전한 아쉬움이었지만.
방문한 날은 토요일이었다. 조금이라도 한가했을 평일에, 그것도 최소 반나절은 머무를 생각으로 여유 있게 오는 것이 좋았을 걸. 만화 도서관이라 그런지 청소년과 아이들이 많이 보였다. 가족단위로 놀러 와 만화책을 함께 읽고 있는 풍경이 훈훈하다. 아빠는 슬램덩크를, 아이는 귀멸의 칼날을 읽고 있다.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는 풍경이란, 내가 그 상황 속에 있을 때에도 혹은 바라보는 입장일 때에도 멋진 것이다. 이런 도서관이 주변에 조금만 더 생겼으면 좋겠다. 바라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연제만화도서관은 2025년 6월에 개관했다. 시설이 깔끔하고 콘텐츠의 분류와 정리도 보기 쉽게 되어 있어서 서가를 둘러보는 즐거움이 있다. 시간이 넉넉하다고 볼 수는 없어서 1층(만화라운지, 어린이실, 만화EX존)보다는 2층(만화의 숲, 미디어 감상존)의 탐방에 집중했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의 책을 빠짐없이 훑고 싶었다. 평소에 읽고 싶던 만화책과 읽고 있는 책, 읽었던 책들이 모두 눈에 들어와서 발목을 잡았다. 이것들을 일일이 꺼내 들다가는 결국 한 권의 이야기도 읽고 가지 못할 상황이 됐다. 결단이 필요하다.
나는 요즘 읽고 있는 원피스와 주술회전, 그리고 이곳에서 새롭게 읽기 시작할 만화책, 최애의 아이를 골랐다. 자리는 겨우 잡았다. 누군가가 일어날 기미를 보일 때 재빨리 포착하지 않으면 자리는 금세 사라졌다. 도서관에 도착한 게 오후 4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는데, 이 시간은 도서관에서는 이미 한창의 시간이었다. 자리를 채운 사람들은 이미 만화 삼매경이다. 토요일은 폐관 시간이 오후 6시이다 보니(평일 화~금은 09:00~20:00, 토요일은 09:00~18:00, 일요일은 09:00~17:00 폐관)시간이 촉박했다. 아, 이렇게 눈이 돌아갈 정도의 공간인 걸 알았으면 더 일찍 찾아오는 건데. 역시나 3권도 다 읽지 못했다. 눈 떠보니 폐관 시간에 가까워져 있다. 이런이런.
커다란 유리창 옆 자리를 잡았다. 책을 읽다가 무심코 창밖을 내다봤다. 아주 오래된 기억 하나가 보인다. 의식의 저 밑바닥에서 스멀스멀 떠오른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던가. 집에서 걸어 15분 정도의 거리에 만화와 비디오를 빌릴 수 있는 작은 대여점이 있었다. 어두워진 저녁에 나는 집을 나서 그곳을 향해 먼 길을 달려간다. 불이 환하게 들어와 있는 대여점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문을 밀고 들어가 곧장 책장으로 향한다. 나는 원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듯이 고민 없이 책을 집는다. 안녕자두야와 장화홍련전, 서씨남정기 만화책이다. 가슴에 한가득 책을 껴안고 집으로 돌아간다. 만족한 나는 감자칩 하나를 들고 침대로 올라가 그 만화책을 한 장씩 넘긴다. 냠냠, 순식간에 빨려 들어간 이야기의 세계가 어린이의 마음에서도 퍽 행복한 것이었는지 25년이 지나 떠올려도 기억 속의 나는 여전히 즐거운 듯 보인다. 순간의 기억이 강렬하다. 그 시절 나와 책의 모든 추억은 이 한 시퀀스에 응축되어 있다.
폐관을 알리는 안내 소리가 현실로 나를 불러낸다. 아쉽지만 읽던 책을 원래 읽던 곳에 다시 꽂아둔다. 세상에 이야기가 이렇게나 많은데 시간은 늘 부족하고 마음은 항상 바쁘다. 유리창을 통해 본 어린 시절의 기억은 이제는 내게 또 하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라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분명 있다. 상수와도 같은 어떤 것. 나란 사람은 이야기 속에 있을 때만 살아있다고 느낀다. 이건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현실은 자주 잊어도 이야기만큼은 잊지 못하는 건 아마 그래서일 테다. 폐관 시간에 맞춰 주섬주섬 만화책을 챙기는 아이들을 보며 문득 어른이 되었을 때 누군가에게는 지금의 기억이 나의 10살 때와 같은 추억으로 남겠다는 생각이 든다. 멋진 장소다. 언제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덮을 수밖에 없던 만화책이 못내 아쉽다. 여기에서 읽던 것들을 망설임 없이 전자책으로 따로 구매했다. 이야기는 계속되어야만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