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을 끝으로 나는 여행의 출발지였던 베이스캠프, 집으로 돌아간다. 열흘이 넘도록 허리가 지끈할 만큼 걸어 다녔다. 몸의 작은 고통을 통과해낸 이 시간 동안 나는 얻어가고자 한 무언가를 과연 얻을 수 있었을까?
쩐주단, 스린야시장 점
문구 편집숍, Tools to Liveby
#2. 떠날 때마다 늘 돌아올 때의 나는 뭐라도 조금 달라져있기를 바란다. 아니, 뭔가가 달라져야 한다기보다는.. 그냥 나 자신에 대해 몰랐던 무언가를 알게 되거나 이해할 수 있는 계기(혹은 기적?)를 맞닥뜨리길 바란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여행하는 동안에는 특수한 상황에 나를 던져보고 주로 대응 방식이나 감정 패턴을 의식하여 이럴 때의 나는 어떤 행동을 하는지에 대한 답을 경험으로 남겨오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동안 이렇게 쌓인 경험들이 일상으로 돌아가 삶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큰 용기가 되고는 했기 때문이다.
모르는 무언가를 모르는 누군가에게 질문할 수 있는 용기, 혼자서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용기, 외면하고 싶었던 감정에 직면할 수 있는 용기 등등. 훗날 이 기억이 밑거름이 되어 나 자신에 대한 기대치를 높일 수 있던 기회도 몇 번 있었다. 전에도 해봤는데 지금이라고 못할 게 뭐지, 해버리는 거다.
타이베이를 걸었던 경험도 그런 의미에서는 꽤 의미가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그동안 일상에서는 피하고 싶었던 감정에 마침내 직면할 수가 있었다.
#3.
단수이를 걸을 때 든 생각이다.
하나는, 나의 미래가 너와 함께였다면 지금의 나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에 대한 환상. 영화 라라랜드의 에필로그처럼 그래봤다. 이런 생각이 갑자기 들었던 이유는 단지 단수이의 일몰 풍경이 그 정도로 낭만적이었달까. 경험하지 않은 무언가를 그리워하게 만드는 장소적힘이 있었다.
하늘도 영화 라라랜드에서 라이언 고슬링이 시티오브스타(City of Stars)를 부르던 장면이 곧바로 떠올랐을 정도의 색감을 띠고 있었으니, 나 자신이 어느 보이지 않는 경계를 넘어 스크린 속으로 걸어 들어온 듯한 착각을 하기에도 충분한 분위기였다고 말하고 싶다. (아, 어쩌면 테마 음악으로 아이유의 이런엔딩을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원래 가고 있는 길보다는 가보지 않을 길에 대한 환상을 품기 마련인가 보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그 순간을 돌이켜 보면 거짓으로 꾸며낸 과거를 아름다운 꿈으로 본 듯한 느낌마저도 든다.
다음으로 든 생각은, 오지 않은 나의 미래에 대한 상상이다. 아직 만나지 않은 사람들, 새로운 일터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 불안한 감정 등등. 새로운 환경에서 나는 과연 잘 적응해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새내기 걱정까지 덤으로.
일몰 즈음의 단수이는 참 여러 가지의 생각과 감정을 끌어내더라.
단수이, 해 질 녘
린장제야시장의 어느 망고빙수집에서
사실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선다.
새로 맡게 될 일, 새로 알게 될 인연들이 내 삶에 몰고 올 앞으로의 변화들이 두렵다. 그동안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이렇게 오지도 않은 미래에몸부터 사릴 정도로 많고 또 깊었단 말인가?
이제는 관계라는 것이(어떤 형태의 인간관계이든)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오히려 시작의 기쁨보다는 그 끝에서 받게 될 상처가 더 클 수도 있다는 것도 잘 안다. 그러나 이렇게 경험으로 안다고 하더라도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나라 홈런볼과 비슷한 과자. 단 게 고플 때 맛있게 먹었다
영화 애드 아스트라에서 주인공 로이(브래드 피트)는 관계에서 받은 상처로 인해 마음의 문을 닫은 사람으로 처음 등장한다. 그러나 어떤 한 계기를 통해 상처의 근원이 되는 아버지와의 관계와 그 안의 상처를 직면하게 되고, 결국 관계를 통한 사랑과 기쁨, 상처, 아픔 그 모든 감정을 받아들이기로 함으로써 삶 자체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하게 된다.
음, 요즘 이 영화를 자주 생각한다.
내가 바로 그 로이와 같은 사람이 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4. 다른 도시에서도 그래왔지만, 타이베이에서는 더욱 즉흥적인 방식으로 여행했다.
물론 처음 여행하는 도시가 아니었고, 또 몇 개의 굵직한 테마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정이었다. 그중 하나는 야시장을 기준으로 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문구점을 기준으로 한 것이었다. 여기에 밀크티 투어까지 플러스.
당일 아침에 구글 지도를 펼쳐 낮에 들를 문구점과 밤에 들를 야시장을 검색하고 그중 몇 군데를 콕콕 선택했다. 그리고 선택한 장소와 장소 사이를 걷거나 버스로 오가면서 그 길 위에서 눈에 띄는 장소를 구경하고 둘러보는 방식으로 내키는 대로 돌아다녔다.
여러 도시를 여행하면서 다양한 방식을 적용해봤지만 이 방법도 꽤 잘 맞았다.
이번엔 지하철보다는 버스를 주로 이용했다.
지난 여행 때의 이동 수단은 지하철이었다. 그러니 이번엔 되도록이면 지상으로 다니는 교통수단을 이용하고 싶었다.
덕분에 한 가지는 새로 배워왔다.
정류장에 서서 가만히 시민들을 관찰해본 적이 있다. 그런데 타야 할 버스가 다가오면 마치 택시를 불러 세우듯 손을 들어서 신호를 보내는 문화가 있더라. 그렇게 하면 버스가 정류장에 섰고 그런 신호를 보내지 않으면 버스는 그냥 서지 않고 지나가버렸다. 재밌는 관습이라고 생각했다.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이런 문화 하나를 캐치해서 자연스럽게 적용하고 그게 그들 사이에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졌을 때,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그런 뿌듯함을 경험한다.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로.
#5. 타이베이에 머무는 동안에는 몸이 썩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타이중을 돌아다니다가 발에 상처가 생겨서 걷는 게 참 고통스러웠다. 돌아다니는 동안에는 앉아있을 기회도 많이 없어 서있거나 걸어만 다녔는데 그 때문에 허리에 무리도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수행하는 마음으로 하루 2만 5천 보씩 꾸준히 걸었다.
이상하게도 여행을 할 때는 몸의 힘듦을 체험하고 싶어진다.
어쩌면 견딜 수 있는 아픔과 고통은 여전히 다 괜찮다, 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어지는 마음에서 그러는 것인지도 모른다.
피카피카
이번 대만 여행은 어디를 가보았다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장소보다는 순간으로 기억하고 싶은 여행이니까.
타이베이 야시장의 대단한 인파 틈에서 치즈 핫도그를 먹을 때 스쳐 지나간 감정이 중요했고, 일몰의 단수이에서 내가 아닌 나를 그리워하며 '만약'이라는 단어를 수없이 떠올려본 그 시간이 참 소중했다.
앞으로 이런 시간을 또 언제 가져볼 수 있겠나.
누구의 방해도 없이 오로지 나 자신만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된다는 건 결코 흔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안다. 그러니 언제 다시 여행할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