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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hyeon Rhee Jan 16. 2020

실패(失敗)할 자유(自由)

젊은이에게 자유란 무엇인가




젊은이의 진보는 ‘실패(失敗)할 자유(自由)’에서 비롯된다. 성공할 자유는 도전할 자유에서 나오고, 도전할 자유의 필연적 전제는 실패할 자유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불평등해질 권리가 있다고 믿습니다


마거릿 대처가 의회 연설에서 한 말이다. 자유주의에서 오래도록 회자될 이 문장은 ‘평등’이라는 미명 아래 통제되어 경직된 영국인들을 일깨워냈다.



인류사에서 종교나 이데올로기가 폭발할 적이면, 언제나 자유는 사라졌었다. 종교와 이데올로기는 합리를 빙자한 불합리의 전형이다. 독일 30년 전쟁에서 횡행한 마녀사냥, 히틀러의 전체주의, 북한의 주체사상 등이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종교와 이데올로기는 언제나 데이터를 기반해서 해석의 틀을 만들지 않고, 자기들이 원하는 해석의 틀에 데이터를 대입한다.


최근의 한국의 진보 세력이 ‘요즘 시대’, ‘새로운 세상’ 같은 것을 운운하는 것이 다 이런 이유에서이다. 경험적이고 과학적인 길을 따라온 명증적 사실들을 부정하려면, 그들을 한 데 묶어 ‘낡음’, ‘틀딱’이라는 어휘를 도입해 이데올로기 똥칠을 해야 하고, 증명된 적 없는 것을 들이대면서, 위의 명증적 사실에 기반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의심을 억누르려면 ‘새로운’, ‘틀림이 아닌 다름’과 같은 이데올로기의 베일을 씌워야 하기 때문이다.


대처가 총리로 재임하던 시절의 사회 역시 작금의 한국 사회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당시 영국은 인쇄 노조와 전기 생산줄을 쥔 광산 노조가 ‘권리’라는 소극적이고 자연적인 가치를 적극적이고 행동하는 가치로 바꾸어버렸고, 결국 ‘해석의 틀’을 그들만을 위해 폭력적으로 재단해버렸다. 그들에게 '권리'란 곧 공짜 쿠폰이었고, 헤게모니를 주도할 무기였다. 그렇게 그들은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만인에 평등해야할 '권리'라는 것에서 비교우위를 누리고 있었다.



자신들이 실패하지 않기 위해 남들이 성공할 기회를 앗아온 노동조합은 이러한 폭압적 행위에 ‘복지’라는 탈을 씌워 ‘평등한 게임’이라고 이름 지었었는데, 대처는 노조가 강요한 이러한 게임의 룰을 없애버리고, 시민 모두가 원하는 게임에 자율적으로 참가할 수 있는 무(無)의 규칙을 선언했다. 즉, '얻음'을 위해 '잃음'을 각오해야만 한다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평등한 규칙을 선언한 것이다. 대처의 이와 같이 결기 있는 선택은 패배하지 않지만 성공할 수 없는 세상 속의 영국인들에게 패배하더라도 끝내 성공할 수 있는 세상을 선물했다. 결국 영국은 성공이 넘쳐흐르는 나라로 돌아갔고, 악랄한 노조원들조차도 더 높은 실질임금을 받을 수 있었다.



윈스턴 처칠과 함께 역사적 동상의 주인공이 된 대처는 평등, 권리, 복지와 같은 인간에게 치열할 자유를 박탈하는 폭력적 어휘들로 범벅이 된 병든 영국에게 ‘제국’의 위상을 돌려준 것이다.

요즘 한국은 어떠한가. 대처의 영국으로부터 얻을 교훈은 없을까. 최근 대두되는 한국을 아프게 하는 병원으로는 ‘주 52시간 근무’가 있겠다.


https://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9&aid=0004498948


‘주 52시간 근무’는 ‘청년’들에게 치열할 권리를 강탈한 전체주의식 악법(惡法)이다. 청년의 가치는 ‘주 100시간을 근무하더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치열할 수 있음’에 있다. 하지만 ‘주 52시간 근무’는 이런 청년들의 땀이 서린 나머지 48시간의 임금을 앗아갔다. 왜냐하면, 열심히 100시간 근무한 청년에게 기업이 52시간에 초과하는 임금을 지급할 경우, 해당 기업은 ‘노동자를 탄압한 죄’로 나라의 규제를 받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위의 치열한 청년은 48시간의 페이를 소득 보상이 아닌, 열정 소모로 교환해야만 하도록 열정 페이를 법적으로 강제받은 것이다. 일이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해 일을 하고 싶은 사람도 억지로 일을 못해야만 하는 것이다. 즉, 현 집권세력은 보신주의에 절어 기득권의 삶을 미치도록 염원하면서도 파렴치하게 YOLO를 외치며 매일같이 주변에 평등과 권리에 관한 훈장님 말씀을 설파하시는 버러지가 이 치열한 청년보다 중요한 것이다.


우주선도 만드는 21C까지 '평등'이 실패한 이유는 아직 그에 관한 이론이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남자가 아이를 낳을 수 없고, 인간은 영생할 수 없고, 해가 서쪽에서 떠오를 수 없듯, 평등의 실현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것에 도전하는 것은 결코 가슴 뛰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낭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되지 못한다. 불가능에 도전하여 성공한 사람은 없다. 그저 가능한 일을 성공하였던 것 뿐이다.


이 나라는 종교적 광기로 이데올로기에 익사하고 있다. 우리에게 자유와 치열함을 돌려줄 대처와 같은 리더는 언제 다시 나타날까. 선비의 나라, 후조선에는 국민들을 지옥으로 이끄는 선비들에게 닥치라고 외칠 리더는 언제 다시 나타날까.


https://m.youtube.com/watch?feature=youtu.be&v=Q7YQutO_6v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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