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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hyeon Rhee Jan 14. 2020

온 국민이 아는 정답에
봉준호가 제시한 예술적 해답

영화 『살인의 추억』 Review

※ 다행스럽게도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범인, '이춘재'가 늦게나마 검거되었습니다. 해당 사건의 생로병사를 담은 봉준호 감독의 수작이 있었지요. 바로, '살인의 추억'입니다. 이하의 콘텐츠는 필자가 독자 생산해낸 콘텐츠가 아닙니다. 다양한 리뷰를 집대성하여 본인의 코멘트를 얹어 재구성한 콘텐츠임을 밝힙니다.


※ 영화의 스포일러가 한가득 포함되어 있습니다.



    봉준호에게 <살인의 추억>은 그 착수부터가 도전이었을 테다. 수사물이라는 장르는 그 결말을 알면 언제나 시시해지기 마련인데, 온 국민이 미제(未濟)라고 익히 알고 있는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을 소재로 삼았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는 <살인의 추억>을 그의 최고작 중 하나라 여기고 있다. 이제 봉준호가 왜 위대한 감독인지를 증명해낸 <살인의 추억>에 대해 알아보자.



1) 스크린 밖으로 쏟아지는 감정에 대한 호소(呼訴)


    <살인의 추억>은 박두만(송강호 役)의 정면(正面; 얼굴의 앞면)이 이끌어 가는 영화다(이동진 평론가 曰). 인물의 얼굴에 대한 주목은 관객의 태도를 끌어내는 데에 가장 효율적인 영화 기법이다. 다시 말해서, 두만의 캐릭터에 대한 해설부터 수사의 절정에서의 폭발까지 온통 박두만의 정면이 스크린을 가득 채워내는데, 그의 정면은 감독이 진정으로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받아들일 관객의 태도를 세팅하는 역할을 해낸다. <살인의 추억>을 지탱하는 박두만의 정면 중 가장 인상적인 셋을 꼽자면, 다음과 같다.


① 영화의 Intro에서 등장하는 두만의 정면


영화 <살인의 추억>의 Intro_주먹감자를 날리는 두만

    박두만(송강호 役)의 캐릭터를 단숨에 설명해내는 장면으로, 두만은 논길에서 트랙터를 타고 아이들을 향해 인사하는 듯 시늉하다 주먹감자를 선사한다. 익살스러움에서 느껴지는 인력과 부도덕한 모습에서 느껴지는 척력, 감독은 관객에게 두만에 대한 친근감과 거리감을 동시에 심어주고 있다. 이와 같이 양면적인 두만의 캐릭터 세팅은 그가 표상하는 심벌을 관객이 더듬어내게끔 하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② 영화의 하이라이트에서 등장하는 두만의 정면

영화 <살인의 추억>의 말미_ 유력 용의자를 마주한 두만

    “밥은 먹고 다니냐?”

   아마 2003년 최고의 명대사일 것이다. 해당 멘트는 봉준호가 시나리오에서 써낸 것이 아니라, 촬영 기간 내에 송강호가 만들어낸 대사로 알려져 있다. 분노라는 상승 감정과 무력이라는 하강 감정을 동시에 담아낼 대사를 봉준호가 도저히 써낼 자신이 없어서, 배역의 당사자에게 부탁을 한 것이다. 


    결국 그렇게 등장한 멘트가 “밥은 먹고 다니냐?”. 범죄를 저지르고도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냐는 식의 분노처럼 들리기도, 이제 너를 용의자로 취급하지 않겠다는 무력감의 항복 선언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 장면에서도 송강호의 정면은 미묘복잡한 감정 전달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스푸마토 기법에서 발로(發露)된 모나리자의 오묘한 표정이 그러하듯, 송강호의 정면도 위의 두 감정을 동시에 담아내기에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③ 영화의 엔딩에서 등장하는 두만의 정면


영화 <살인의 추억>의 Ending_15도 법칙*을 파괴하며 정면 응시하는 두만

    한국 영화계의 격을 한껏 끌어올린 전설적 엔딩으로, 송강호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해버린 장면이다. 영화에서 카메라를 직접 응시하는 것은 금기로서, 축구로 치자면 손을 쓰는 격이다. 배우가 카메라를 응시하는 순간 관객의 몰입도가 뚝 떨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즉, 서스펜스 수사물인 <살인의 추억>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봉준호는 금기를 서슴없이 깨버렸다. 봉준호는 시종 관객을 잡아당기다 한 순간에 놓아버리면서 아찔한 하강감(下降感)을 주고 싶었는데, ‘카메라 정면 응시’라는 금기의 차용보다 적절한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15도 법칙 : 카메라를 정면 응시하지 않고, 15도 정도는 비스듬히 응시해야 한다는 영화 촬영 기법. 카메라 응시는 <모니카의 여름 1953>, <네 멋대로 해라 1960> 등에서 이미 사용된 기법이기 때문에, 일종의 오마주(Hommage)라고도 할 수 있지만, 한국의 대중영화에서 사용된 것은 <살인의 추억>이 상징적인 최초였다.



(2) <살인의 추억>에 담긴 상징과 해석


① 육사(;육군사관학교)에 대한 언급


왼 그림은  육군사관학교 진학이 꿈인 한 남성이고, 오른 그림  해당 남성을 범인으로 추정하는 두만이다.


    좌측 그림은 영화의 아주 초반부에 등장하는 장면이다. 통통한 남성이 등장해서 두만의 심문을 받는 장면인데, 박두만이 “육사 가고 싶다고 했지 않아?”라며, 그에게 묻는다. 즉, 봉준호는 이 장면을 통해서 화면 속 남성에게 육사의 이미지를 씌워준 것이다. 육사는 이 장면을 통해서 범인으로서 부각되는 것이다.


    우측 그림은 송강호가 점쟁이를 찾아가서 범인이 누구인 것 같은지 물어보는 장면이다. 수첩 속 인물들 중 유일하게 포커스 아웃되지 않은 이가 있는데, 바로 [그림 4]의 육사를 꿈꾸는 남성이다. 즉, 봉준호는 육사에 대한 의심을 이 장면을 통해서 우리에게 한 번 더 심어준다.


② 빽대가리(;음모가 없는 성기)에 대한 언급


    영화에서 박두만은 강간 사건에도 불구하고, 범행 현장에서 음모가 한 가닥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을 언급한다. 이에 범인이 무모증(無毛症) 환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게 되고, 결국 두만은 수사계획을 전면 수정하여 마을 내에 무모증 남성을 찾으러 목욕탕에 가기에 이른다. 여기서 우리 관객은 감독이 그리는 범인에 대한 레토릭, 그에 관한 두 가지 포인트를 집어낼 수 있다. 


    첫째로, 음모가 없는 성기를 굳이 성기에 대한 일반적 표현을 차용하지 않고, ‘음모 없음’을 뜻하는 ‘빽’에다가 굳이 ‘대가리’라는 단어를 붙여 만든 파생어를 사용한 것이다. 둘째로, 봉준호는 그 ‘빽대가리’를 범인으로 조준하여 표적수사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즉, 봉준호는 굳이 어색한 표현인 ‘빽대가리’를 사용해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을 우리에게 넌지시 상정한 것이다.


③ 레드 계열 코디의 여성들만 골라 살해한 범인


왼 그림은 레드 계열 코디를 한 채 발견된 피해 여성의 사체이고, 오른 그림은 레드 자켓을 벗고 외출하는 여성이다.


    범인의 타깃은 항상 레드 계열의 코드를 하고 있다. 즉, 범인은 레드, 즉, 빨간색에 반응하여 살인을 저지를 것이다. 왼편 장면의 여성은 레드 원피스뿐만 아니라 레드 힐까지 신고 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다시 ‘굳이’라는 부사어를 소환해야 한다. 감독은 원피스만 입어도 충분히 획득될 상징들을 굳이 힐까지 착용시켜 ‘레드’, 그 자체를 강조한 것이다. 레드에 대한 강조는 오른편 장면에서도 다시 한번 등장한다. 해당 여성은 재킷을 벗고 나간 덕에 살해를 당하지 않는데, 이는 ‘레드’는 범인의 범행 동기에 있어 필요조건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충분조건으로까지 작동한다는 증명이 된다. 곧, 범인은 레드를 파괴하고 하고 싶은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④ 중간 결론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자면, <살인의 추억>의 범인은 전두환 전 대통령으로 상정된다. 육군사관학교 출신, 빽대가리(=대머리), 레드 콤플렉스(=반공의식), <살인의 추억>에서 떠오르는 단서들은 온통 전두환 전 대통령을 조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봉준호가 영화 속 시대의 대통령이 해당 사건의 범인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다만, 그가 우리에게 고발하고 싶었던 것은 전두환 대통령 아래 표상되는 외재적 상황, 불합리한 5 공화국의 암(暗)이라 할 수 있다. 즉, 봉준호가 <살인의 추억>을 통해 그려내고 싶었던 것은 태령읍 황장리 농촌마을에서 일어난 연쇄살인사건이 아니라, 5공 당시의 대한민국이었던 것이다.



 ⑤ 의문의 장면 – 영화 초반의 범인 암시(暗示)와 후반의 실현(實現)


왼 그림은 사지가 잘린 자가 범인임을 암시하는 허수아비이고, 오른 그림은 족부괴사로 다리를 절단하는 경찰의 수술 장면이다.


    좌측의 그림은 범인의 미래를 암시하는 문구를 담은 허수아비의 모습이다. 해당 내용은 아래와 같다.


너는 자수하지 않으면,
사지가 잘려 죽을 것이다.


    거꾸로 읽어내자면, 사지가 잘려 죽은 사람이 바로 자수하지 않은 범인이라는 것이다. 즉, 이 허수아비는 범인의 정체에 대한 복선을 제시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하지만 우측 그림에서 보이듯,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에서 사지가 잘리는 사람은 유일하게 한 명 등장하는데, 바로 경찰이다. 수사 중 불의의 사고로 생긴 파상풍으로 인해 족부괴사로 오른 다리를 절단하게 된 것이다. 즉, 봉준호는 이 장면을 통해 범인이 경찰인 듯한 레토릭을 우리에게 넌지시 제시한다.


⑥ 의문의 장면 2 - 이순자 여사(=전두환 대통령의 부인) 사진 옆에 누운 박두만


이순자 여사의 사진 옆에 누운 박두만

    해당 장면은 이순자 여사 옆에 누운 두만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때 중요한 것은 두만 손가락이다. 박카스 뚜껑에 손가락을 넣은 것으로 보이는데, 마치 반지를 낀 듯한 모습을 연상시킨다. 요약하자면, 해당 장면에서 두만은 이순자 옆에 누워 반지를 낀 남성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장면은  불가피하게 ‘박두만 = 전두환’이라는 등식을 떠올리게 만드는데, 앞서 범인을 전두환이라 상정한 우리의 입장에서는 아주 아이러니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범인을 잡는 경찰이 범인의 표상을 보여준다니 말이다.



 ⑦ 의문의 해소 – 박두만과 동일시되는 귀뚜라미 소년


    사실 봉준호는 오프닝부터 우리에게 범인을 알려주고 있었다. 다만, 뒤에 이어지는 정보를 취득하지 못한 탓에 우리가 발견하지 못했을 뿐, 봉준호는 다음과 같은 은유로서 우리에게 범인을 선명하게 제시했던 것이다. 아래의 도식을 바탕으로 그 이하의 해설을 이해해보도록 하자.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메뚜기 소년에 관한 레토릭 도식


영화 Intro에서 메뚜기를 채집하는 소년

    영화 <살인의 추억>의 첫 장면으로, 농촌의 소년이 귀뚜라미를 채집하고 있다. 소년은 귀뚜라미를 한 마리만 채집하는 것이 아니라, 유리병 속에 여러 마리를 채집한다. <살인의 추억>은 연쇄 살인을 모티브로 하기에, 해당 채집 행위는 그와 수사적으로 무관하지 않다. 즉, 소년이 범인으로, 귀뚜라미가 피해자로 비유될 수 있는 것이다.


    아래의 장면에서 두만은 도랑에서 연쇄살인마에게 살해된 피해 여성을 발견한다. 귀뚜라미가 그녀의 다리에 앉아있다. 소년이 귀뚜라미를 채집한 직후의 장면으로, 그녀의 다리에 앉은 귀뚜라미는 여전히 채집 대상으로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하필이면 그녀도 연쇄살인마의 살인(≒채집)의 대상이 되었던 것인데, 이러한 배치는 자연스럽게 피해 여성과 귀뚜라미의 동일시를 보여준다.


위의 소년이 메뚜기를 채집하는 장면 직후에 등장하는 피해여성의 시신이 두만에 의해 발견되는 장면


    아래는 살해 현장 근처에서 놀고 있는 소년에게 두만이 “저리 가서 놀아, 임마!”하고 말하는 장면이다. 해당 장면에서는 소년이 두만의 시선, 손가락질, 고개의 움직임 등을 계속 따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봉준호가 소년과 두만을 여러 차례 병치시키면서 집요하게 관객으로 하여금 동일시하도록 요구하는 대목이다. 

소년이 두만의 행동을 따라하며 장난치는 장면 1 - 시선과 손동작을 따라한다
소년이 두만의 행동을 따라하며 장난치는 장면 2 - 표정을 따라한다




 ⑧ 결론


    봉준호는 고발은 훨씬 더 구체적이었다. 단순히 5 공화국 당시의 한국 사회의 모순을 표현하려는 것에 그치는 아니라, 본분을 망각한 혹은 삐뚤어진 관점을 가진 통제를 수행하는 계층에 대한 경종을 2003년의 한국인들에게 다시 한번 상기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살인의 추억’이라는 제목은 일차적으로 처벌 없이 세월을 보낸 덕에 살인을 추억 삼을 수 있는 해당 연쇄살인마에 관한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봉준호가 진정으로 영화를 통해 전달하려 했던 메시지는 지난날의 과오를 잊고 추억하는 얼룩진 지도층들에 대한 분노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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