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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가령 Jun 14. 2020

마음이 있으면 보지 말라고 해도 본다

-자세히 쓰기 지도 ③

♧ '어디를 갔냐면', '무슨 심부름을 했냐면' 식으로 이어지는 답답한 글      


보기글 5) 

심부름 하기 / (1학년, 남) 

  내가 어제 집에서 엄마 심부름을 했다. 엄마가 떡볶이를 해준다고 했다. 엄마가 오뎅을 사 갖고 오라고 했다. 첫 번째는 한빛유통 슈퍼에 가라 2번째는 오뎅을 사다. 3번째는 계산을 하다. 네 번째는 아줌마한테 돈을 주었다. 거스름돈을 남았다. 내가 아줌마한테 인사를 하고 갔다. 내가 무슨 인사를 했냐면 '안녕히 가(계)세요.'라고 했다. 집으로 와서 엄마가 칭찬을 했다. (무슨 칭찬을 했냐면 심부름을 했다. 무슨 심부름을 했냐면 한빛유통에서 엄마가 오뎅을 사 오라고 했는데 오뎅을 사 왔다. 엄마가 칭찬을 해주었다.)(1998.12.2)     

 

 1학년 아이가 자세히 쓰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꾸 '무슨 인사를 했냐면…', '무슨 칭찬을 했냐면…' 하는 식으로 설명을 덧붙이고 있지요. 

  이런 일은 1학년 어린이들 글에서 어느 시기 자주 나타나는 일이기는 하지만, 간혹 '인사를 했다.' 하면 "어떻게 했는데?". '칭찬을 받았다.' 하면 "뭐라고 칭찬해 주셨는데?" 하는 질문을 끊임없이 받은 아이들 글에서 더 심하게 드러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보기글 5)는 글 뒤에다 자꾸만 설명을 덧붙여 놓은 데다가 심부름하는 과정도 첫 번째, 두 번째 하는 식으로 분석해서 쓰고 있어 글의 흐름이 탁탁 막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보기글 6) 

어머니를 도와주었다 /1학년 

  나는 오후에 어머니께서 깨를 터시는데 힘들 것 같아서 나는 재미있는 것 같아서 깨를 털어보았다. 깨 터는 소리가 재미있었다. 그런데 어머니 이마에는 땀이 나셨다. 

  어머니 일을 도와 주니 어머니께서 고맙다고 하셨다. 그래도 나는 일을 도와주고 나니 기분이 좋았다. 옥상에서 깨를 갖고 내려오니 힘이 들었다.(1996.9.18 일기)      

  어머니를 도와 깨를 터는 일을 했다는 내용인데 글의 흐름이 부드럽습니다. 억지로 자세히 쓰려고 한 부분은 보이지 않습니다. "깨 터는 소리가 재미있었다.", "어머니 이마에는 땀이 나셨다." 하는 식으로 그 일을 하면서 보고들은 일도 자연스럽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 마음이 있으면 보지 말라고 해도 본다.      


  글을 쓰기 이전에 내가 그 일을 겪던 지난날의 그 자리에서 잘 보고 있었던 것을 놓치지 않고 쓰는 것이 글을 잘 쓰는 첫 번째 요건입니다. 

  다섯 가지 감각을 통해서 들어온 모든 경험을 잘 떠올리고 그 가운데 마음이 가는 그 일을 생생하게 써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잘 떠올려 내지 못한 상태에서 자세히 써보려고 하니 자꾸 그 상황을 분석하듯이 조각을 내어 설명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글이 지루해지는 것입니다. 잘 보았어야 그때 그 일이 머릿속에 남아 잘 떠올릴 수 있을 터인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잘 본다는 일은 우선 '관찰'을 통해 그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관심'입니다. 

  관찰이 전혀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그처럼 중요하게 여겨서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던 정도에 견주어 그 다지 좋은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관찰이란 결국 제삼자로서 보는 것이지요. 자세히 보라, 깊이 보라, 속으로 들어가 보라, 대상이 되어 보라, 마음으로 보라... 무슨 말로 보는 태도를 가르치려고 애쓰든 결국 제삼자로서 보게 하는 것입니다. 

  관찰 교육, 관찰 지도의 한계가 여기에 있습니다. 관심이 처음부터 없다면 아무리 자세히 보라고 해도, 그리고 자세히 보려고 애써도 진짜 속알맹이는 볼 수 없습니다. 물론 억지로 보려고 하면 그렇게 보려고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그래 가지고는 대상이 살아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없으니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이 거기 가 있으면 보지 말라고 해도 봅니다. 관심이 거기 쏠려 있으면 관찰이고 뭐고 말할 필요도 없이 저절로 보게 되고, 가르치는 사람이 짐작도 못하고 상상도 못 한 것을 발견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관찰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마음을 어디에다 두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곧 자연과 인간에 대한 관심이요 애정을 말하는 것이지요.      

♧ 아이들의 마음이 가 있는 자리를 어떻게 알아낼까?      

 우리는 아이들이 자신이 겪은 일 가운데 마음이 가는 그 일을 생생하고 정확하게 쓰도록 도와주려고 합니다. 생생하고 정확하게 쓰기 위해서는 자연 자세히 쓰게 될 것이지만 이 '자세히'라는 말에 집착해서 모든 장면의 모든 것을 낱낱이 드러낼 필요는 없습니다. 글 쓰는 사람의 마음이 가 있는 곳, 관심이 쏠려 있는 그 부분이 또렷하게 드러나면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아이의 마음이 가 있는 부분을 어떻게 알아낼까? 이 물음에 정답은 없습니다. 아이와 나눈 이야기를 통해, 관심을 갖고 지켜본 바에 의해서, 다른 친구의 글을 통해서…. 글 고치기에 들이는 정성 못지않게 아이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한 마음 열기와 쓰기 전 지도에 관심을 가질 일입니다.      

  다음은 2학년 어린이가 겨울 방학 동안 '자유학교'라는 캠프를 다녀와서 쓴 글입니다.      


보기글 7) 

나쁜 형 알미 운형 똥돼지 꿀돼지 또는 멧돼지 빼빼로 형도 정말 얄미워 자유학교 3모둠 

(2학년) 

  자유학교는 재래식 폐교를 빌렸는데 거기서 어린이가 집에서 못하는 일을 하는 거다. 이 장용환 형과 신기철 빼빼로형이 나만 미워했다. 이렇게 됐다. 기철 용환--한별 이렇게 밀고 있다. 왜냐면 그 돼지형과 부침을 해 먹는데 설거지 한 번 안 했다고 그런다. 내가 붙인 별명이 '무식이' (똥돼지)(뚱돼지)(멧돼지)(꿀돼지)(99.1.12)      


  '자유학교'에 가서 어려웠던 일을 썼는데 그 일의 경과는 전혀 드러내 보이지 못하고 자신을 미워했던 형들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감정만을 쏟아놓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목도 비속어의 조합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지도하는 사람은 이 아이의 마음을 받아주면서 "네가 겪은 일을 그대로 써 봐. 그래야 네가 왜 화가 났는지 다른 사람도 이해할 수 있지 이렇게만 써 놓으면 다른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네가 장난하고 있다고만 생각할 거야. 이 글만 봐 가지고는 나도 잘 모르겠는 걸"하고 말해 주었습니다. 

보기글 8)은 이렇게 해서 아이가 다시 쓴 글입니다. (읽는 사람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맞춤법 문장부호 따위를 바로잡았습니다.)   

   

보기글 8) 

나쁜 형 둘, 용환이 형과 기철이 형      

  자유학교는 폐교를 빌려 쓰고 있다. 자유학교에 간 첫날밤 김치전을 해 먹었다. 그때 밤이 너무 추워 내가 

"오늘은 너무 춥다. 내일 설거지하자." 

"먹은 사람은 다 하는 거잖아." 

"그래, 한다구. 누가 안 한대? 내일 한다구." 그랬더니 용환이 형이 

"너 내일부터 왕따인 줄 알아. 왕따가 얼마나 무서운 건데." 

나는 속으로 '치 왕따 시켜라. 집에 가고 (가면 그만이고) 오래 살면 되지 뭐,'하고 생각했다. 

  다음날 용환이 형이 어떤 애한테 

"야, 쟤하고 놀지 마." 

"왜?" 

"쟤 어제 김치전 했거든. 그런데 설거지 안 했어."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 이 속담 진짜 맞는 말이네.' 

  그날 오후에는 내가 전날 안 했던 설거지를 다 했다. 그래도 (용환이 형은) 

  "난 더 어려운 프라이팬 닦았다."면서 그래도 계속 왕따 시켰다. 

  '치 그러면 프라이팬 내가 할 것 남겨 놨으면 내가 했을 것 아니야. 지가 다 해놓고선 나보고 어떻게 하란 말이야.' 

기차 타고 오는 날에도 용환이 형은 내 볼을 잡아당기고 허벅지를 찼다.      

--기철이형-- 

  내가 설거지 안 했다는 이야기는 멀리 퍼져 기철이 형도 날 미워하게 됐다. 그 형은 자기 뜻대로 안 되면 막 화를 낸다. 내가 그 형이랑 풍선 배구를 하는데 내가 모르고 그 형 얼굴을 긁었다. 나는 미안하다고 했다. 그때 갑자기 내 배를 때렸다. 잡식 축구를 할 때도 나를 밟고 지나간 기철이 형 아무리 생각해도 나쁘다. 그때 맞은 배가 지금도 아프다.(99.1.13)    

  

  이쯤 되면 읽는 사람도 이 아이가 왜 형들을 미워하는 감정을 갖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물론 '지난 1월 5일부터 10일까지 자유학교에 다녀왔다.' 하는 식으로 언제 있었던 일이었는지 밝혀 놓았더라면 더 알아보기 쉬웠겠지요. 또 뒷부분에 따로 쓴 '기철이 형' 부분도 글 가운데 어디쯤 들어가서 글의 흐름을 좀 더 매끄럽게 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 아이는 두 가지 일이 모두 선명하게 살아있는지 이렇게 '한 지붕 두 가족' 형태로 글을 써 놓았습니다. 

  이렇게 아이가 자기가 꼭 쓰고 싶은 말을 풀어 내놓지 못할 때 그 아이가 하려는 말을 제대로 찾도록 도와주고 그것을 생생하게 쓰도록 도와주는 일이 자세히 쓰기 지도입니다. 

   별로 하고 싶은 이야기도 없지만 쓰라니 할 수 없이 썼는데 거기다 보태어 자꾸 자세히 쓰기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 볼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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