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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기억' 없는 손, '몸' 없는 창작

인간 탐구 도감

by 이롬

예술은 시대마다 스스로의 껍질을 벗으며 진화해 왔습니다. 낡은 껍질은 오래된 인식의 틀이고 예술은 그것을 탈피함으로써 늘 새로운 세계를 열어왔습니다. 르네상스는 신 중심 세계관을 넘어 인간을 전면에 내세웠고, 이후 사실적 재현은 의심받기 시작했으며, 원근법은 해체되었습니다. 입체파는 대상을 재구성하며 ‘보는 것’ 자체에 대해 다시 묻기 시작했습니다. 회화의 경계를 넘어 레디메이드는 예술의 개념을 뒤흔들었고, 행위 예술, 대지 예술은 시간과 공간, 몸과 자연을 예술의 무대로 끌어드렸습니다. 예술은 언제나 스스로를 부정하며, 기존 체계를 전복해 왔습니다. 이 흐름은 단순한 양식의 변화를 넘어, 세계와 인간을 보는 인식 틀의 전환이었습니다.


AI 창작의 도래

이 예술 전복의 계보는 지금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존재 앞에서 다시 시작되고 있습니다. 회화, 웹툰, 그림책, 소설, 음악 등 각기 다른 창작의 영역에서 Midjourney, DALL·E, ChatGPT 같은 생성형 AI를 통해 수많은 이미지와 텍스트, 음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창의성은 인간만의 고유한 능력이라 여겨졌지만, 이제 그 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인공지능의 창의적 사고능력은 때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지점에 도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티 AI 미술품 경매에 올라온 Siamese Cycle in Absurdism (출처:크리스티 홈페이지)

2025년 2월, 세계적 경매사 크리스티(Christie’s)는 AI 미술품 경매를 개최하였습니다. 이번 경매는 개최 전부터 6,500명 이상의 예술가들의 경매 취소를 촉구하는 저항이 있었습니다. AI가 저작권 허가 없이 인간의 작품을 학습해 상업적 결과물을 만들고 있다는 비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품된 34점의 작품 중 28점이 약 10억 원에 낙찰되었습니다. 크리스티의 디지털 아트 담당 이사 니콜 세일즈 자일스는 "AI 기술은 의심할 여지없이 미래"라며 "AI는 인간의 창의성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확장하는 도구"라고 강조했습니다.(출처: 시애틀코리아데일리, 2025/2/23)


작가의 여정 = 예술

예술은 작가의 고뇌, 실패, 겹겹의 감정, 집요한 노동, 시간의 층위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전시장의 작품 앞에서, 그 너머에 숨어있는 붓끝의 망설임, 반복된 시도 끝에 얻어지는 선, 작가의 감정과 생의 파편들이 스며든 흔적들을 느낍니다. 우리는 예술품을 단지 '결과물'이 아니라, '작가의 여정' 그 자체로 여겨왔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특정 화가가 다른 무명화가나 작가 지망생들을 고용하여 대리 제작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대중들은 배신감을 느끼고 비난하며, 때로는 법정 다툼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AI를 통한 한 줄의 프롬프트로 생성된 이미지들이 공모전에서 당선되고, 경매에서 높은 가격에 낙찰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낯선 사회적 변화는 예술의 개념 자체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인간의 육체적 노동, 감정적 경험, 실존적 모험 없이도 예술이 될 수 있을까요? 예술은 무엇을 필요로 할까요? 단지 결과물이면 될까요? 삶의 궤적이 담긴 창작자일까요? 창작자의 의도일까요? 아니면 관람자의 해석일까요?


기억 없는 손, 몸 없는 창작

휴대폰이 등장하기 전, 우리는 부모님, 절친, 연인의 전화번호 몇 개쯤은 기억 속에 담고 다녔습니다. 이 기억의 조각에는 관계의 리듬과 감정의 흔적들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숫자를 기억하지 않습니다. 기술이 우리 대신 기억하고, 대신 말해주며, 때로는 대신 생각하려고 합니다. 캔버스 앞에서 손에 물감을 묻히고, 머뭇거리며, 수없이 망치고, 고뇌 끝에 다시 그리던 '인간의 시간들'은 축소되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과연 고통 없는 '창작의 자유'일가요? 아니면 인간만이 간직할 수 있는 어떤 ‘시간의 죽음’일까요?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1859~1941)은 기억을 단순한 정보저장이 아니라, 몸과 뒤엉킨 시간의 흐름으로 보았습니다. 인간의 창작행위는 단지 정보를 조합하는 일이 아니라, 삶의 시간, 몸의 감각, 무의식 속 퇴적된 감정과 기억이 뒤섞이는 과정입니다. 창작품은 살아낸 시간의 흔적이며, 생각에 앞선 감각들이 어렴풋이 모여 형상화된 무엇입니다.

AI가 아무리 이미지, 음악, 텍스트들을 쏟아낸다 해도, 그 안에는 ‘살아있는 시간’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도약의 고통, 망설임의 리듬, 생명의 비약이 깃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기억 없는 손, 몸 없는 창작'입니다. 손쉽게 생성되지만, 그만큼 손쉽게 소모됩니다.

AI가 아무리 창의적이고 감탄할만한 결과물을 내놓더라도, 인간은 여전히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고 고유한 감각과 경험으로 표현하고자 할 것입니다. 창작은 인간이 자신을 세계에 새기는 행위이며, 이는 기술의 진보보다 더 깊고 오래된 본능입니다. 그렇다면, 놀라운 속도와 정밀함으로 인간의 흔적을 조합하며 재구성해 나가는 AI의 창작활동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기술과 인간의 상호작용

프랑스 철학자 질베르 시몽동(1924~1989)은 과학기술과 산업화, 그에 따른 사회적 문제들에 주목하며 이를 철학적으로 규명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인간과 기계는 서로의 존재 조건이자 환경으로서 함께 진화한다고 보았습니다.

"인간과 기계의 관계는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관계와 같다. 인간은 자신과 함께 작용하는 기계들 가운데 존재한다."<질베르 시몽동,『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식에 대하여』>

그는 기술은 인간의 단순 도구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답게 살게 하는 근본 조건으로 보았습니다. 기술은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개체화’되는 존재이며, 인간을 위한 하나의 ‘존재의 과정’으로 작용한다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기술은 '인간의 삶과 분리된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 세계를 경험하고 개입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존재'입니다.

“기술적 대상들은 단순한 사용 도구가 아니라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자기 나름의 발생과 진화를 겪어 개체화된 것들이다. “<김재희,『시몽동의 기술철학』, 65p>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AI는 단순한 도구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존재방식을 변화시키고, 확장시키는 존재로 볼 수 있습니다. AI는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고, 사유의 경계를 밀어내며, 창작의 주체로서 인간을 다시 성찰하게 만듭니다. 결국 기술의 진보는 인간 기능을 대체하거나 효율을 증대시키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더욱 독창적으로 살아가도록 자극하는 과정인지도 모릅니다.


사진과 예술

인류의 역사에서 사진기술의 등장은 단순한 도구의 발명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시몽동의 말처럼, 그것은 ‘개체화 과정’을 거쳐 예술의 지형을 근본적으로 뒤흔든 사건이었습니다. 1839년, 루이다게르가 사진기를 처음 선보였을 때, 화가 폴 들라로슈는 “오늘부터 회화는 죽었다”라고 탄식하였습니다. 이는 인간의 창작능력이 기술에 밀려나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예감한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선언은 회화의 종말이 아닌, 새로운 예술의 탄생 신호였습니다. 사진이 현실을 정확히 재현하는 기능을 대신하게 되면서, 회화는 오히려 해방되었습니다. 더 이상 눈앞의 대상을 충실히 묘사하는 데 얽매일 필요가 없어졌고, 인상주의, 큐비즘, 초현실주의, 표현주의 등 현실너머의 세계로 확장할 수 있게 됩니다.

한편, 사진은 예술의 세계에서 환영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철학자 발터 벤야민(1892~1940)은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에서 사진 기술의 등장으로 예술품의 고유한 ‘아우라’가 사라졌다고 말합니다. ‘아우라’란 특정 시공간 안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일회적이고 특별한 예술의 숨결을 의미합니다.

또한,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1821~1867)는 『근대 대중과 사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진은 충실하게 사물을 기록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예술이라 할 수는 없다. 그 기능은 화가를 위한 심부름꾼으로서 인정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술이 아닌 것”
인생의 두 갈래길(1857), 오스카 레일랜더 (출처:코미디닷컴, 이재길의 누드여행(16))

하지만, 사진은 그저 보이는 것을 복제하는 기술에 머무르지 않고, 그 이상의 의미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합니다. 스웨덴 출신 사진가 오스카 레일랜더는 1857년 30여 장의 음화를 합성하여, 『인생의 두 갈래길』이라는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이 사진은 마치 르네상스 시대 회화를 연상시키는 구도와 표현을 통해, 회화의 미학을 사진으로 구현한 혁신적인 실험이었습니다. 이는 사진의 기계적인 속성을 넘어, 예술로서의 가능성을 탐색한 초기의 대표적인 시도로 평가됩니다.

갑작스러운 돌풍(1993), 제프 윌 (출처:https://dohny.com/75)
스루가 지방의 에지리(1832), 카츠시카 호쿠사이 (출처:https://dohny.com/75)

거센 돌풍 속, 속수무책으로 몸을 웅크린 사람들, 허공을 떠도는 종이 조각, 날아가는 중절모. 이 사진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과 같이 연출되었습니다. 제프 윌이 일본 화가, 카츠시카 호쿠사이의 <스루가 지방의 에지리>를 오마주한 작품입니다. 그는 고전 회화 속 드라마적 정서를 사진이라는 매체로 구현하기 위해,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수백 장의 시행착오를 거쳤습니다. 그는 사진이 지닌 객관적 진실성을 활용하면서도, 작가의 의도를 바탕으로 '장면을 구성'하고 '서사를 부여'했습니다. 그에게 사진은 단순히 현실을 포착하는 도구가 아니라, '예술가의 의도와 주관을 연출해 낼 수 있는 매개체'였습니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예술계는 흔들렸고 저항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시대를 앞서간 창작자들은 기술의 경계를 실험하였습니다. '사진이 예술인가, 기술인가의 논란'에 대해 미국의 사진작가 피터 갈라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진은 과학이 미술의 문 앞에 버리고 간 사생아가 아니라 회화의 친자식이다.” 사진은 그렇게 단순한 복제 기술을 넘어서 기술적 특성과 독자적 표현의 예술 매체로 자리 잡았습니다.


AI 시대의 예술

예술은 언제나 사회적 변화와 기술의 도래 속에서 충돌하며 진화해 왔습니다. AI라는 새로운 존재와의 만남 역시, 예술에 또 한 번의 전환점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AI는 마치 19세기 사진기처럼, 인간 예술의 고유성을 위협하며, 그 자리를 잠식해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빠른 속도로 거침없이 인간의 창작행태를 학습하고 모방해 내며, 기존 예술이 지닌 사유의 궤적, 시간성, 고유성과 같은 속성들을 무색하게 만듭니다.

'AI는 예술이 아니다, 감정이 없다, 의미가 없다’는 반응은, 19세기 사람들이 사진기의 등장을 맞닥뜨렸을 때 느꼈던 당혹감과 닮아 있습니다. 프롬프트 한 줄로 생성되는 이미지, 알고리즘이 만들어낸 음악과 시, 기계가 써 내려간 이야기들. 인간은 손과 감정과 시간을 들여 빚어내던 창작의 방식을 점점 잃어버릴까 두려워합니다. 그 두려움은 예술의 본질이 ‘결과물’에 있는가?, ‘과정’에 있는가?, ‘해석의 경험’에 있는가? 에 관하여 다시 사유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서 더 나아가 '기술은 과연 예술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라는 물음으로 시선을 옮기게 됩니다.

과거 사진 기술의 도입이 회화를 죽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방시켰듯, AI 역시 예술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변형시키는 존재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기술을 어떻게 사유하고 다루느냐에 있습니다. AI를 인간이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방식으로 감각하게 해주는 '촉매제'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AI는 시몽동의 말처럼, 인간의 생활 방식과 산업구조를 변화시키고 재구성하며 '개체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변화의 파동을 수동적으로 관망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사유하고 개입함으로써 새로운 예술적 가능성을 열 수 있습니다.

AI 시대의 예술은 무엇을 잃고, 무엇을 새로 얻게 될까요? 이 질문을 외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진의 역사처럼 또 한 번 예술의 지평을 넓힐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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