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탐구 도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의 이 명제는 오랫동안 인간 존재의 근거를 ‘의식’에 두려는 철학적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21세기에 접어든 지금, 이 고전적 명제는 새로운 질문으로 변주됩니다.
“나는 디지털화된다. 고로 존재하는가?”
오늘날 과학은 더 이상 인간의 신체를 단순히 치유하거나 보존하는 데 머무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뇌의 신호를 읽고, 기억을 저장하며, 의식을 복제하거나 업로드하려는 전례 없는 시도 앞에 서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기술 진보가 아닙니다. 그것은 ‘의식’이란 무엇이며, ‘자아’는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가?를 묻는 근원적 질문의 재구성입니다.
뇌의 디지털화
인간 정체성을 뇌의 생물학적 기제로 보는 이들 중에는, 뇌를 디지털화해 ‘나’를 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도 있습니다. 뇌 신경망의 패턴과 전기적 신호를 데이터로 추출하여 인공지능이나 외부 장치에 이식하거나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론 머스크의 뉴럴링크는 뇌와 컴퓨터를 연결하는 BCI(BCI: Brain-Computer Interface) 기술의 선두주자입니다. 다이빙 사고로 신체가 마비된 놀런드 아르보 씨는 2024년 1월 뉴럴링크의 BCI 칩을 뇌에 이식받았습니다. 그는 이제 손발은 움직이지 않아도 생각만으로 노트북 마우스 커서를 조작하여 체스를 두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뉴럴링크는 더 나아가 생각만으로 의수를 움직이는 기술을 연구 중이며, ‘블라인드사이트’를 통해 시각장애인이 앞을 볼 수 있는 기술도 개발되고 있습니다. 현재는 척추손상이나 시각·청각 장애인을 위한 보조 기술이지만, 머지않아 인간이 동작 없이 인터넷을 검색하고, 자동차를 운전하며, 스위치를 켜고 끄는 시대를 예고합니다. 이는 단지 치료기술의 발전을 너머 새로운 존재 방식의 문을 여는 시도로 보입니다.
마인드 업로딩, 디지털 불멸의 꿈
보다 급진적인 시도는 ‘마인드 업로딩(Mind Uploading)’입니다. 이 개념은 인간의 뇌 구조와 뉴런 간 연결 패턴을 정밀하게 스캔하여, 그것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재현하려는 시도입니다.
미국 신경과학자 케네스 헤이워스는 뇌 보존 기술을 연구하며, 다음의 과정을 통해 마인드 업로딩이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임종 직전 환자를 전신마취한 뒤, 뉴런과 시냅스를 나노 수준으로 보존하고, 뇌를 100마이크론(0.01cm) 두께로 절단해 전자현미경으로 스캔합니다. 생성된 디지털 뇌 데이터는 컴퓨터에 연결돼 뉴런과 시냅스 구조가 시각화되며, 이를 로봇에 탑재하면 사고 구조를 재현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만약 이런 기술이 현실화된다면, 여러분은 ‘마인드 업로딩’에 참여하시겠습니까? 이 질문에 쉽게 동의할 수 없는 이유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근본적인 의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디지털 환경에서 의식을 재현하는 일이 실제 ‘나’를 되살리는 것일까요? 아니면 단지 정보의 복제에 불과한 것일까요?
이기적 유전자의 진화
영국의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1941~)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인간을 유전자의 생존기계로 보았습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스스로를 위한 존재가 아니라, 유전자를 복제하고 전달하는 매개체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유전자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서 디지털 정보로 자기 자신을 복제하고 전송하려 합니다. 도킨스가 제안한 ‘밈(Meme)’이 ‘문화적 유전자’를 설명했다면, ‘정보 유전자’는 정보기반으로 독자적으로 진화하는 새로운 생존단위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생물학적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사유, 언어, 감정 패턴은 디지털 공간에서 생존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 디지털 공간에서 자기 자신을 복제하고, 유지하며 진화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정보가 생명을 대체하는 새로운 형태의 진화는 단순한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깊은 존재론적, 윤리적 사유를 요구합니다.
신체 없는 의식
뇌를 외부 장치에 업로드한다는 상상은 매혹적입니다. 그러나 이 상상은 곧 ‘뇌가 곧 자아인가?’라는, 철학이 오랫동안 탐구해 온 자아의 본질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모리스 메를로 퐁티는 『지각의 현상학』에서 인간 존재는 신체와 분리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감각하는 몸은 단지 도구가 아니라,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이며, 자아의 형성 조건입니다. 의식은 단지 정보를 처리하는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촉감, 공기, 소리, 통증, 빛, 리듬 속에서 생겨나는 살아있는 흐름입니다. 뇌를 복제해도, 그것이 몸을 떠난다면, 그것은 자아일 수 있을까요? 아니면 단지 정교한 환영에 불과할까요? 당신의 기억과 사고방식을 완전히 디지털화해서 새로운 장치에 담았다면, 그것은 여전히 ‘당신’일까요?
의식은 복제될 수 있는가?
만약 당신의 모든 기억과 말투, 감정 패턴까지 그대로 복제된 존재가 만들어졌다면, 그 존재는 당신일까요? 복제된 기억과 감정이 실제와 똑같이 작동한다면, '나'라는 정체성은 어디에서 비롯될까요? 영국 철학자 데렉 안토니 파핏(1942~2017)은 인간의 정체성을 기억과 경험의 연속성으로 보았습니다. 복제된 존재가 당신의 기억과 욕망을 공유한다면 그는 어느 정도 ‘당신’ 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의식의 유일성’이라는 문제가 떠오릅니다.
‘의식’은 나뉠 수 없는 흐름처럼 느껴집니다. 우리는 복제된 정보와 인격을 다른 주체가 가질 수 있다고 상상하지만, 그 경험을 실제로 살아내는 감각은 오직 하나의 주체에게만 허락됩니다. 나를 복제하더라도, 복제된 내가 느끼는 고통이나 기쁨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닙니다.
영화 <미키 17>은 먼 미래, 외계 행성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소모품 인간 ‘미키’를 반복적으로 복제해 사용하는 모습을 그립니다. 미키는 기억을 유지한 채 새로운 클론으로 거듭나기를 반복하지만, 어느 날 미키 17이 우연히 죽지 않고 살아남으면서, 동일한 존재인 미키 18과 함께 공존하게 됩니다. 이들은 같은 DNA와 기억을 공유하지만, 현재의 의식은 분리되어 있습니다. 결국 관객은 미키 17과 미키 18을 하나의 자아가 아닌, 서로 다른 두 개의 자아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의식은 감각적 일회성 갖는 하나의 흐름입니다. 나눌 수 없는 이 단일한 의식이야말로 자아의 단위를 규명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정체성은 단순히 ‘기억의 총합’이 아니라, 그 기억을 감각적으로 경험하고 반응하는 '현재의 주체성'에서 비롯됩니다.
기술이 부활시킨 신화
트랜스 휴머니즘은 인간이 기술을 통해 생물학적 한계를 극복하고 신적인 존재로 진화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 사유는 윤리보다 욕망에 기반하며, 인간의 유한성을 부정하려는 현대적 신화입니다. 고대의 연금술사가 불사의 물약을 꿈꿨다면, 오늘날의 과학자는 디지털 존재로서의 영생을 꿈꿉니다.
기술은 우리 앞에 놀라운 가능성들을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수명을 연장하는 문제에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가능성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 곧 ‘나란 무엇인가’라는 오래된 질문과 다시 마주하게 됩니다. 뇌를 디지털화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다시 쓰는 일이며, 우리는 그 경계 위에 서있습니다.
뇌가 디지털화되어 물리적 몸에서 분리될 때, 그 의식은 여전히 ‘사람’일까요? 아니면 전혀 다른 ‘창발적 존재’일까요? 디지털 장치 속 의식은 뜨거움, 통증, 포근함과 같은 감각적 몸과 심장이 두근거리거나, 눈물을 흘리는 감정적 흔들림을 공유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기억은 있지만 감각이 없는 자아’, 혹은 ‘감정은 있으나 몸이 없는 유령’ 일지도 모릅니다. 수많은 뉴런의 상호작용에서 ‘의식’이 자연스럽게 발생하듯, 디지털 시스템 안에서 예기치 못한 새로운 형태의 ‘자아’가 출현할 가능성은 존재합니다. 뇌의 데이터가 하드디스크에 복제되었을 때, 그것은 원본의 복사본이 아니라, 전혀 다른 자아의 탄생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기술을 통해 스스로를 초월하고 있을까요?,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존재를 무심코 창발 시키고 있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