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탐구 도감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이 순간이 정말 현실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이 세계는 과연 '실재'하는 걸까요? 아니면 정교하게 구축된 '환영'에 불과할까요?
저는 종종 꿈속에서 두 팔을 활짝 펼치고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니곤 합니다. 마치 현실처럼 생생하게, 내 몸이 공중에 부유하는 감각을 느낍니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칩니다.
'어쩌면 지금 이 하늘의 감각이야말로 '실재'이고, 우리가 살아간다고 믿는 세계가 '허상'은 아닐까?'
실재: 인식 주체로부터 독립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물질세계
우리는 흔히 ‘진짜’란 외부의 기준에 의해 확인될 수 있는 것, 그리고 다수가 공유하는 물리적 기반 위에 놓인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믿음은 현실을 '진짜'로, 반면 꿈이나 가상현실, 시뮬레이션을 '가짜'로 구분 짓는 이분법의 토대가 됩니다. 이러한 구분은 단순한 생각의 틀이 아니라, 오랜 철학적·종교적 전통 속에 깊이 뿌리내린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입니다.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감각으로 인식하는 세계는 이데아의 희미한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보았습니다. 장자는 나비가 된 꿈에서 깨어난 뒤, 장자가 꿈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서 장자가 된 것인지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동서양의 사유는, 우리가 현실이라 믿는 것이 얼마나 불확실한 토대 위에 놓여 있는지를 일깨워줍니다.
현대의 공상과학 문학과 영화들은 이러한 고전적 통찰을 기술적 상상력으로 확장시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조차 누군가에 의해 설계된 '시뮬레이션'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며,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다시 묻습니다.
시뮬레이션은 실재를 대체할 수 있는가?
“당신이 눈을 뜬 그때부터가 현실이 아닙니다.”
- 영화 <바닐라스카이>中 -
영화 ‘바닐라 스카이’ 주인공 데이비드의 인생은 교통사고 이후 처참히 무너집니다. 얼굴이 끔찍하게 훼손되고, 조각난 두개골을 고정하는 수십 개의 핀들로 두통에 시달리며, 한쪽 다리를 저는 신세가 된 그는 첫눈에 운명이라고 느꼈던 소피아와도 멀어집니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그는 생명연장회사의 '루시드 드림'이라는 기술을 통해 꿈속에서 ‘이상적 삶’을 살아갑니다. 사고 이전의 멀쩡한 얼굴로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만나 웃고, 잃었던 행복을 되찾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그 꿈에서 깨어나,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삶을 포기하고 고통스러운 현실로 돌아가기를 선택합니다.
당신이 이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두 삶 모두 현실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고 전제할 때, 당신은 꿈속에서 원하던 삶을 살아가겠습니까? 아니면 고통스럽더라도 현실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뇌 속에서 펼쳐지는 삶이 진짜와 가짜로 나눌 수 없는 것이라면, 굳이 현실만을 고집할 이유가 있을까요? 어쩌면, 그저 살고 싶은 대로 살아갈 수 있는 뇌 속의 삶을 선택해도 괜찮은 건 아닐까요?
또 다른 영화 ‘소스코드’에서는 이미 사망한 군인이 타인의 단기기억저장소에 접속하여 8분 동안 사건의 배후를 추적하는 미션을 수행합니다. 이 시뮬레이션 속에서 그는 주체로 존재하며, 세계를 해석하고 감정적으로 반응합니다. 그는 그 세계를 ‘현실’처럼 살아갑니다. 이 두 영화의 주인공은 물리적 세계를 벗어난 가상의 세계에서 인간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보여주며, 실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무엇이 실재인가?”, “실재는 꼭 물리적 세상을 기반으로 해야 하는가?”
의식이 만드는 세계
현상학적 접근방식에 의하면, 이 세상은 우리가 지각하고 의식하는 방식에 따라 구성됩니다. 뇌가 감각하고 해석하며 의미를 부여하는 주관적 세계는, 그 자체로 하나의 현실이 됩니다. 아일랜드의 철학자인 조지 버클리(1685~1753)는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우리가 지각하고 경험하는 모든 대상은 정신 속에 존재하는 관념들의 집합이라고 보았습니다. 독일의 관념철학의 기반을 확립한 임마누엘 칸트(1724~1804)는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선험적 인식 틀에 의해 구성된 현상의 세계라고 주장합니다.
현대 뇌과학 역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현실’은 결국 뇌 안에서 구성되는 '시뮬레이션'이라고 설명합니다. 외부 세계에서 들어오는 정보는 전기신호로 변환되어 뇌에서 해석되고, 우리는 그 해석을 ‘현실’이라 부르죠. 그렇다면 영화 속 주인공의 뇌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행태, 감정, 경험들은 모두 '실재'가 아닐까요? 단지 물리적 기반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허상’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실재'는 어쩌면, 우리가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가는 바로 그 자리에서 형성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시뮬라크르의 세상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1929~2007)는 현대사회를 가득 채운 이미지들을 원본 없이 존재하는 ‘시뮬라크르’라고 말했습니다. SNS 속 여행지, 광고 속 웃음, 게임 속 전투는 현실의 '복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현실을 넘어서 또 다른 '실재'로 작동합니다. 복제는 이제 원본을 설명하는 수단이 아니라, 스스로 또 다른 원본이 됩니다.
"시뮬라크르란 결코 진실을 감추는 것이 아니다. 진실이야말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긴다. 시뮬라크르는 참된 것이다. “ <장 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 p9>
바닐라 스카이 속 루시드 드림, 소스 코드의 시뮬레이션은 진짜 '현실’의 '그림자'가 아닙니다. 그 안에서 주인공들은 고유한 감정과 경험을 통해 새로운 '실재'를 살아갑니다. 이는 보드리야르가 말한 것처럼, ‘원본’과 동등한 가치를 지닌 '시뮬라크르'로 작동하는 것입니다. 이 세계에서 현실과 가상, 진짜와 가짜의 구분은 무의미해집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세계를 어떻게 경험하고 해석하며 어떤 의미를 만들어내는가입니다.
시뮬레이션 이론
스웨덴 철학자 닉 보스트롬(1973~)은 2003년 「당신은 컴퓨터 시뮬레이션에 살고 있는가?」라는 논문을 통해, 우리가 이미 시뮬레이션 속에 존재하고 있을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인류 문명이 고도로 발전해, 조상들의 삶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기술을 갖게 될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무수히 많은 시뮬레이션 세계가 만들어질 것이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도 그중 하나일 수 있다.” 이 가설대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 사실상 시뮬레이션에 불과하다고 한다면, ‘실재’라는 개념 자체가 어떻게 정의될 수 있을까요? 시뮬레이션 안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 사랑, 기쁨, 고뇌 모두는 여전히 실제처럼 느껴지고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실재’란 단지 물리적 세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경험하고 인식하는지에 따라 구성되는 개념으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진짜, 가짜의 너머
현실과 꿈, 가상, 시뮬레이션은 ‘진짜’와 ‘가짜’로 서로를 배제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진짜’와 ‘가짜’의 이분법은 인식 주체가 자신을 세계와 구별 짓기 위해 만들어낸 사유의 편의일 뿐입니다. 고통과 기쁨, 윤리와 선택, 삶의 무게가 존재하는 곳이라면, 그것이 물리적이든 가상이든 이미 ‘실재’입니다. 그로부터 비롯된 감정과 기억은 ‘진짜’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깥의 물리적 구성이 실제인가 아닌가 가 아니라, 내가 그것을 어떻게 경험하고 인식하는가입니다.
우리는 매일 꿈을 꾸고, 기억을 왜곡하며, 스토리에 몰입하면서 살아갑니다. '바닐라스카이'의 루시드 드림, '소스 코드'의 단기기억 저장소와 같은 시뮬레이션은 단순히 가짜 세계가 아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또 다른 층위입니다. 내가 사랑을 느꼈다면, 그 사랑이 시뮬레이션이든 현실이든 그 사랑의 경험 자체는 ‘진짜’처럼 느껴지는 세계, 즉 주관적 ‘실재’입니다.
우리가 묻는 “이 세계는 실재하는가?”라는 질문은 곧 “나는 이 세계를 어떻게 실재로 받아들이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뀝니다. 우리는 우리의 감각, 기억, 사고, 정념 속에서 ‘진짜 같은 경험’들이 겹쳐지는 다층적 세계를 구성하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현실’이든, ‘시뮬레이션’이든, 그것은 감각과 기억, 언어와 문화, 나의 정서와 관점이 섞여 구성되는 ‘주관적 실재’ 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