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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없는 '자유'

인간 탐구 도감

by 이롬 Apr 11. 2025

 

슬로베니아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1949~)은 『자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가장 위험한 것은 마치 자유인 것처럼 누리는 비자유다.” (13p)


 인류의 역사는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끊임없는 여정이었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투쟁의 성과 위에서 자유롭게 삶을 살아간다고 느낍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취향에 맞는 옷을 고르고 스스로 결정한 길을 간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정체성, 감정, 욕망조차도 이미 짜인 틀 안에서 형성되는 것은 아닐까요?

 삶은 마치 정물화를 그리는 일과 닮아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테이블을 놓고 어떤 꽃과 과일, 소품들을 배치할지 스스로 선택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이 선택의 폭은 생각보다 제한되어 있습니다. 시중에 판매되는 테이블은 한정되어 있으며, 집 앞 마트에서 구할 수 있는 과일도 정해져 있습니다. 우리 삶 역시 ‘자유’를 허락받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설계된 사회 시스템 안에서 제한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1918~1990)와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1902~1981)은 인간 주체의 자율성을 부정하며, 우리가 사회적 구조에 의해 구성된 존재라는 관점을 내세웠습니다. 우리의 ‘자기다움’이라는 것도 상징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형성된 결과일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자유롭게 스스로를 구성하고 있을까요? 어쩌면 자유는 ‘스스로 선택하는 힘’이 아니라 ‘자유처럼 보이는 나를 둘러싼 이 구조’들을 의심하고 들여다보는데서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좌) 루이 알튀세르 (우) 자크 라캉


'이데올로기 속 호명된 주체'

 알튀세르는 개인이 주체가 되는 과정을 ‘호명(interpellation)’이라고 부릅니다. 가족, 학교, 회사, 국가 같은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은 우리에게 특정 역할과 정체성을 부여하며, 우리는 그 호명에 응답하며 ‘나’라는 존재를 구성해 나갑니다. 이때 주체는 단일한 이데올로기가 아닌 다양한 이데올로기에 의해 동시다발적으로 호명을 받게 됩니다. 그는 ‘모든 것이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는 결정론과는 조금 다르게 다음과 같이, 그 구조 안에서 개인은 나름의 선택과 행동의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주체는 서로 다른 종류와 수준의 수많은 이데올로기로부터 호명을 받는다. 이러한 중층성 속에서 주체라고 불리는 개체들은 각자의 입장을 '자유로이' 전개한다. 따라서 개인은 다양한 선택지 속에서 '운신의 여지'를 갖게 된다. 그 과정에서 '발전'할 수 있고 '선택'할 수 있으며, 자신의 행보를 결정할 수도 있다. 비록 이 결정은 개체 스스로의 선택이지만 중층적인 호명의 작용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슬라보예 지젝,『자유』,87p)


'상징계와 욕망의 구조'

 라캉에 따르면 우리는 일정한 상징적 틀, 가령 언어, 문화, 규범, 질서를 통해 세상을 인식합니다. 이러한 현실의 틀을 ‘상징계’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징계’를 통해서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완전히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한다라고 믿는 것도 사실은 그 상징적 틀 안에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또한, 라캉은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라고 표현합니다. 현대 알고리즘 기반의 미디어 플랫폼은 이를 증폭시킵니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틱톡의 짧은 영상들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제안’이자, ‘권유’이며, ‘유혹’입니다.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어떤 일상이 좋은 삶인지, 어떤 스타일이 멋진지 끊임없이 학습시켜 줍니다. 우리는 스스로 원하는 것을 원한다고 믿지만, 실은 ‘원해야 할 것을 원하도록” 유도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미니멀리즘, 자기 계발 루틴과 같은 라이프스타일부터 디지털 노매드, 환경주의자, 페미니스트 등의 정체성들도 역시 특정한 문화적 상징과 소비 경로 안에서 기획되어 제안됩니다.

 라캉은 더 나아가 욕망은 단순히 어떤 특정한 대상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른 대상을 향해 움직인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특정 브랜드 운동화를 원한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운동화 자체가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를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미 존재하는 사회적 구조 안에서 끊임없는 결핍을 느끼고 욕망을 쫓아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욕망의 출처를 상실한 채 무언가를 갈망하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은 과연 자유롭다고 볼 수 있을까요?

영화 <프리가이>

'게임 속 NPC의 자각'

 영화 <프리가이>는 결정론의 세상을 비유적으로 보여줍니다. 주인공 가이(라이언 레이놀즈)는 비디오 게임 속 배경캐릭터(NPC: Non-Player Character)로 매일 똑같은 옷을 입고, 같은 카페에 가서 같은 커피를 테이크아웃하고, 정해진 시간에 은행으로 출근합니다. 이 프리 시티 세계에서 NPC들은 주어진 언어, 규범, 반복되는 행동패턴이 철저히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구조 속에서 작동하며, 그 자체로 ‘알튀세르가 말한 이데올로기적 공간’을 연상시킵니다. 게임 세계라는 형식을 통해 영화는 우리가 주어진 언어로 소통하고, 사회규범을 지키고, 소비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현실을 과장해서 보여주는 듯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이는 우연히 밀리라는 플레이어에게 사랑에 빠지고, 그 만남은 그의 세계에 균열을 일으킵니다. 그는 프로그램되지 않은 언어를 말하고, 다른 플레이어를 공격하기도 하며, 이전에는 하지 않았던 선택들을 시도하면서 자아를 찾아나갑니다. 이 대목은 라캉의 '실재계' 개념을 떠올리게 합니다. 라캉은 인간 주체가 ‘상징계’를 통해 욕망을 매개로 살아가지만 그 구조 속에 결코 포섭되지 않는 ‘실재계’가 있다고 봅니다. 가이는 바로 이 실재의 균열을 경험하며, 자기 정체성을 의심하고 이전의 세계가 허구적 상징체계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이때 가이는 더 이상 단순한 NPC가 아니라, 상징계를 가로지르며 자신만의 주체성을 새롭게 구성해 나가는 존재로 변모합니다. 이와 같은 서사는 우리가 현실이라 믿고 있는 세계 역시 하나의 '상징계'에 불과할 수 있으며, 그 균열을 마주할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의지를 향한 자아의 탐색이 가능해진다는 점을 환기시킵니다.


자유의 역설, 결정된 세상 속 자유’

 

“결정론의 관점에서 우리는 자신이 결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만, 어떻게 결정되어 있는지 즉 우리의 선택 가운데 어떤 것이 결정된 것인지 알 수 없다. 우리가 내리는 결정이 이미 결정된 것임을 알면서도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해야 하는 이 공포스러운 상황이야말로 진정한 자유 혹은 자유로운 선택에 수반되는 견딜 수 없는 무게일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 『자유』,106p)


지젝은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결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여전히 무엇이 옳은가를 고민하고, 갈등하며, 선택하고 책임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러한 '결정된 자유'의 역설적 구조를 드러냅니다. 자유를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에서 임의로 무언가를 선택하는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모든 것이 결정된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마주한 선택의 순간을 받아들이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지려는 태도야말로 '자유'라고 말합니다. 즉, 결과는 같을 수도 있지만, 내가 그 과정에서 느끼고 선택하는 과정을 통해서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영화의 결말이 이미 정해져 있다고 하더라도, 관객은 영화 속 이야기의 전개를 따라가며 자연스럽게 감정을 느끼고 몰입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자유의지와 창의성’

정물화를 그리는 화가는 제한된 선택지 속에서 새로운 조합과 구성을 고민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이미 주어진 사회적 조건과 환경 속에서 전개되지만, 그 안에서도 우리 스스로의 시각과 해석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정립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기존의 틀을 넘어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 내는 추상화의 화폭을 구성할 수도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단순히 주어진 틀 안에서 배치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틀 자체를 의심하고 해제할 수도 있습니다. 이를 테면, 마르셀 뒤샹의 ‘샘’이라는 이름의 소변기를 전시장에 내놓으며 전통적인 예술의 개념에 근본적 질문을 던진 것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진정한 자유란 어떤 간섭도, 영향도 받지 않는 상태, 즉 '무(無)로부터의 자유'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둘러싼 구조와 조건을 '인식'하고 그 구조의 작동 방식을 '성찰'하며 그 너머를 '상상하고 제안할 수 있는 능력'일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자유의지'와 '창의성'은 맞닿아있습니다. 타인의 욕망을 따라 반복되는 선택이 아니라, 주어진 세계를 낯설게 바라보고 익숙한 질서를 새롭게 배열하는 '창의적 사유'가 '자유의 본질'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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