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나는 삶의 '주연'인가 '조연'인가

인간 탐구 도감

by 이롬 Apr 04. 2025

  우리는 흔히 자신의 삶을 마치 연극 무대의 ‘주연 배우’처럼 여깁니다. 일상생활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업무를 처리하며, 감정을 조절하는 모든 과정이 의식적인 선택의 결과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뇌과학자 데이비드 이글먼은 『무의식은 어떻게 나를 설계하는가』에서 한 인간의 의식은 실상 “뉴스 헤드라인”에 가깝다고 주장합니다. 우리 뇌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무의식적 과정 중 극히 일부만이 의식의 영역으로 떠오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정 우리의 삶을 주도하는 존재일까요? 아니면 무의식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종되는 존재일까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자아의 중심에서 쫓겨난 의식

 이글먼은 의식이 주연에서 조연으로 인식되는 현 과학계의 모습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비유합니다. 천문학에서 우주의 중심이었던 지구가 지금은 광대한 우주 속의 아주 작은 점에 불과하다는 것이 정설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뇌과학에서도 연구가 진행될수록 인간은 자아의 중심에서 쫓겨나 우주 속의 창백한 푸른 점인 지구처럼 멀고 먼 변방에서 소식을 별로 듣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즉 뇌는 국가처럼 여러 조직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가 의식하지 않아도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좀비 시스템과 같은 구조를 가진다고 말합니다. 


뉴스의 헤드라인, 의식

그는 더 나아가 뇌를 “국가”에 의식을 “뉴스 헤드라인”에 비유합니다. 국가에서는 매 순간 수많은 사건이 벌어집니다.

 "공장이 돌아가고, 통신선을 따라 신호가 분주히 오가고, 기업은 제품일 배송한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음식을 먹는다. ~비서는 걸려오는 전화를 처리하고, 교사는 가르치고, 운동선수는 경기하고, 의사는 수술하고, 버스 기사는 운전한다."(데이비드 이글먼, 『무의식은 나를 어떻게 설계하는가?』, 16p)

하지만, 우리가 뉴스에서 접하는 정보는 이 방대한 활동 중 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뇌도 수많은 신경작용을 수행하지만 의식은 헤드라인과 같이 나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날씨 변화, 세법 개정, 질병 확산 같은 정보에 집중합니다. 헤드라인이 기사 내용을 단단히 압축하고 요약해서 보여주는 것과 같이 의식은 신경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활동을 더 단순한 형태로 투사합니다.

 “우리 의식이 바로 이런 신문과 같다. 뇌는 24시간 내내 분주히 움직인다. 거의 모든 활동이 국지적으로 일어난다는 점도 국가와 똑같다. 작은 집단들이 끊임없이 결정을 내리고 다른 집단에 메시지를 보낸다. 이런 국지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더 큰 연합이 만들어진다. 우리가 정신이라는 신문의 헤드라인을 읽을 무렵이면, 중요한 활동과 거래는 이미 이루어진 뒤다.” (데이비드 이글먼, 『무의식은 나를 어떻게 설계하는가?』, 17p)


무의식이 만들어내는 일상

 이를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예는 운전입니다. 초보 운전자일 때는 차선 변경이나, 브레이크를 밟는 것까지 하나하나 의식적으로 수행해야 하지만, 숙련된 운전자는 거의 자동으로 도로를 주행합니다. 이는 우리의 무의식이 작업을 수행하는 좋은 예입니다. 우리가 친구를 사귀는 과정조차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처음 만난 사람과 친해지기로 의식적으로 결정했다고 믿지만, 사실은 무의식이 평생에 걸쳐 누적해 온 데이터를 바탕으로 내려진 결과일 수 있습니다. 상대의 목소리 톤, 얼굴형, 옷차림, 취향의 데이터를 종합적으로 분석하며, 심지어 이름이 비슷하거나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뇌는 호감으로 판단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보거나 듣는 순간조차도 뇌는 먼저 무의식적으로 정보를 처리한 뒤 필요하다고 판단된 일부만을 의식으로 보냅니다. 즉, 우리가 의식한다고 믿는 것들 조차 이미 무의식적으로 필터링된 정보라는 것입니다. 


인셉션의 꿈, 무의식의 시나리오

영화 인셉션은 타인의 무의식, 깊숙한 꿈 속에 들어가 기억을 심는 과정을 그립니다. 이 기억은 단순히 이식되는 정보가 아니라, 한 사람의 세계를 바꾸는 씨앗입니다. 그 씨앗은 뿌리를 내려, 삶의 방향성과 주체의 구조 자체를 바꿔버립니다. 꿈을 설계하는 아리아드네는 말합니다. “우리는 지금 있는 이 공간도, 이미 너의 무의식이 만든 것이야” 이는 곧 우리의 일상 자체가 이미 무의식에서 만들어진 ‘설계된 현실’ 일지도 모른다는 함의를 던집니다. 영화 속 인물들이 꿈속에서 꿈을 꾸듯, 우리는 무의식의 시나리오 안에서 또 다른 무의식의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세계는, 어쩌면 이미 무의식이 고르고 편집하고 조립해 만든 장면들의 집합체인 ‘몽타주’ 일 수 있습니다. 


좀비시스템 속 CEO, 의식

 그렇다면 의식의 역할을 무엇일까요? 단순히 무의식에서 처리한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에 불과할까요? 이글먼은 의식은 상충하는 좀비시스템을 중재하는 CEO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제갈매기는 이러한 중재시스템인 의식이 없어 보이는 동물 중 하나입니다. “제갈매기 둥지에 빨간 알 하나를 가져다 놓으면 제갈매기는 미쳐 날뜁니다. 빨간색이 공격성을 자극하는 반면 알모양은 알을 품는 행동을 자극하기 때문에 알을 공격하는 동시에 품으려고 합니다. 제갈매기는 이 두 프로그램의 라이벌관계를 중재해서 순조로운 협동관계로 바꿔놓을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의식은 여러 프로그램들을 조정하고, 만족을 뒤로 미루고 새로운 프로그램을 배우는 기능을 수행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의식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데이비드 이글먼, 『무의식은 나를 어떻게 설계하는가?』, 202p)

 

영화 인셉션

삶의 주연, 몽중인(夢中人)의 가능성

 이 책의 본문은 마치 '우리의 의식은 우리의 삶을 이끄는 주연이 아니라, 거대한 무의식의 흐름 속에서 선택적으로 등장하는 조연에 가깝습니다'라고 일깨워 주는 것 같습니다. 이 시점에서 ‘내가 선택한다고 믿는 이 의식은 과연 무엇을 근거로 주체성을 획득하는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만약 우리가 무의식이라는 심연 위에 떠있는 작은 얼음 조각이라면, 우리는 그 깊이를 탐색하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아니면 단지 떠다니는 파편일 뿐일까요? 

 영화 인셉션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코브는 오랜 꿈 여행을 끝내고 현실로 돌아왔다고 믿으며, 자신의 ‘토템’인 팽이를 돌려둡니다. 그 팽이가 계속 돌면 여전히 꿈이고, 멈추면 현실이라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습니다. 그런데 화면은 팽이가 흔들리는 듯하다가 멈출지 아닐지 알 수 없는 순간에 암전 됩니다. 이 장면은 단순히 꿈과 현실의 구분을 넘어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의식조차도 결국은 의심할 수밖에 없는 ‘구조물’이라는 철학적 메시지를 던집니다. 내가 선택하고 있다고 느끼는 이 모든 감각은, 어쩌면 더 깊은 구조 속에서 심어진 어떤 ‘인셉션’ 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 의심조차도 의식이 만들어낸 인간적인 능력이라는 점입니다. 무의식의 조정 아래 움직이면서도 ‘나는 누군가의 꿈속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능력,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주연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우주와 같이 거대한 무의식이라는 미지의 행성을 발견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의식은 단순한 '조연'이 아니라, 무의식이라는 거대한 무대를 탐험하고, 설계도를 바꾸고, 꿈의 구조를 재구성할 수 있는 ‘몽중인(夢中人)’인 '주연'일지도 모릅니다. 

이전 02화 뇌 속의 기생충 '관념'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