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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에서 '질서'로, '질서'에서 '혼돈'으로

인간 탐구 도감

by 이롬



별들이 반짝이기 전, 이름 없는 공허 속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모두 함께 있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 혼돈을 “카오스(chaos)”라 불렀고, 그로부터 태어난 우주의 질서를 “코스모스(cosmos)”라 불렀습니다.

“모든 사물은 함께 있었다 그다음에 지성이 와서 그것들에 질서(Nous)를 부여했다.”
<고대 그리스 아낙사고라스>


혼돈에서 질서로


세계는 본질적으로 더 큰 혼돈을 향해 나아갑니다. 열역학 제2법칙이 말하듯, 시간이 흐를수록, 엔트로피, 즉 무질서도가 증가합니다. 그러나 생명은 도리어 이 흐름을 거슬러, 질서를 만들어냅니다. 이 질서는 우리의 신체에서 뇌파, 호르몬, 수면, 각성과 같은 반복되는 순환적 리듬으로 나타납니다.

Brain Wave

우리는 매일 밤, 아득한 의식 너머 꿈속으로 흩어지며, 뇌파는 가장 희미한 파동인 델타파를 나타냅니다. 아침이 오면 멜라토닌 분비를 멈추고 코르티솔이 몸을 일깨웁니다. 빛은 다시 파동을 깨우며 의식과 무의식이 혼재된 알파파의 상태를 지납니다. 걷고, 생각하고, 먹고, 활동하는 각성의 시간 동안 베타파를 나타냅니다. 해가 지면 다시 잠에 들고, 델타파에 빠집니다.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이 순환은 반복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의식과 무의식, 빛과 어둠, 수면과 각성의 리듬을 형성하는 생물학적 시스템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 단순한 일상 속에는 무질서한 우주의 본질을 거스르는 놀라운 '질서의 패턴'이 숨어있습니다. 이 리듬은 외부의 명령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내부에서 스스로 조율하며 유지됩니다. 생명이란 무엇일까요? 질서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생명, 질서가 질서를 낳는 통로


생명의 기원이 무엇인지 우리는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열수분출공가설’은 지각 틈으로 뜨거운 물이 분출되는 깊은 심해에서, ‘원시 수프 가설’은 수많은 유기물이 뒤섞인 초기 바다에서, ‘범지구설’은 운석을 통한 유기물 전파를 통해 생명의 탄생을 설명합니다.

미국의 이론 생물학자, 스튜어트 카우프만(1939~)은 이들과 다른 시각에서 생명을 바라봅니다. 그는「무질서가 만든 질서」에서 생명은 세 가지 회로를 통한 자기 조직화의 산물이라고 말합니다. 세 가지 회로는 '제약 회로', '일 과제 회로', '촉매 과제 회로'입니다.


<제약-일 과제 회로>

‘제약’이란 무작위적 에너지 흐름에 일정한 방향과 구조를 부여하는 제한 조건입니다. 이를테면, 강물은 아무 '제약'이 없다면, 단지 낮은 곳으로만 흘러갈 뿐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댐과 터빈-'제약'이 더해지면, 그 흐름은 전기를 생산하는 '의미 있는 일'로 전환됩니다. 이처럼 ‘제약’이 없다면, 에너지는 흩어지지만, ‘제약’이 있으면 그 에너지는 유용한 방식으로 변환됩니다.

생명 시스템은 바로 이러한 제약-일의 순환을 통해 유지됩니다. 세포는 스스로 '제약'설정하고, '일'을 수행하며, 이 과정은 다시 '제약'을 만들어냅니다. 이 연결은 끊임없이 이어지며 마치, 스스로 부품을 만들고 조립하여 다시 스스로를 작동시키는 기계와 같습니다.

예컨대, 세포 내 제약 조건-mRNA, 리보솜, 효소-들이 특정 순서와 방식에 따라 작동하면, 아미노산이 특정한 구조로 결합되어, 기능성 단백질이 생성됩니다. 이들은 영양분을 운반하며, 호르몬을 생성하고, 근육과 피부를 구성하는 등 다양한 '일'을 수행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단백질들 중 일부는 다시 리보솜, 효소, 세포막 단백질 등 '제약을 형성하는 장치'를 구성하는 데 사용된다는 점입니다.

기계 또한 일정한 '제약'에 따라 작동하며 '일'을 수행합니다. 자동차의 피스톤과 실린더는 정해진 운동을 반복하며 운동에너지를 생산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작동 방식은 생명체의 활동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기계는 스스로를 조직하거나 재생하지 않습니다. 반면, 생명은 단지 '일'을 수행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제약'을 형성하고, 그 제약을 바탕으로 다시 '일'을 수행하는 순환적 자기 구축과정을 통해 시스템을 유지합니다. 생명은 그 자체로 질서가 질서를 낳는 통로입니다.


<촉매 과제 회로>


이처럼 생명은 무작위 에너지 흐름 속에서 스스로 질서를 만들어내는 자기 조직화의 산물이며, 이러한 구체적인 메커니즘으로 카우프만은 '자가 촉매 집합체' 개념을 제시합니다. 세포 속 화학반응은 무작위로 일어납니다. 그중 특정 반응들이 서로를 촉매 하는 고리를 이루며 얽히기 시작합니다. 어떤 집합 하나(A)가 다른 하나(B)를 돕고 그 하나(B)는 또 다른 것(C)을 만들며, 결국 이 고리는 자기 자신을 유지할 수 있는 작은 세계를 구성합니다. 이렇게 서로 도우며 지속되는 반응의 집합을 '자가 촉매 집합체'라고 부릅니다.


나는 생명이 단순한 형태가 아니라 전체로서, 상호 촉매하는 반응의 그물로서 출현했다고 생각한다.
~ 생명이 출현하는 경로는 합당하게 일어날 수 있어야 하고 은밀하게 숨어있지 않아야 한다.
<스튜어트 카우프만,「무질서가 만든 질서」, 104p>


그는 다양한 분자들이 섞여있는 화학적 수프에서 다양성이 일정 수준(임계값)을 넘어서면, 이들 분자들 사이에 서로 반응을 촉매 하는 자율적 화학 네트워크가 생겨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 가설은 생명의 출현은 단순히 우연한 사건이라기보다는 복잡한 시스템 안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날 수 있는 필연적 결과일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모든 생명체는 스스로를 구성하는 내부 시스템을 갖추고 있으며, 외부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자신의 상태를 조절하고 유지합니다. 수십조 개의 세포들이 각자 제 할 일을 하며, 우리는 숨 쉬고, 걷고, 일하며 살아갑니다. 신체 내 주어진 악보도, 지휘자도 없지만, 오케스트라처럼 전체가 조율되며 무질서 속에서 질서가 만들어집니다. 질서의 씨앗은 무질서 안에 이미 내재해 있었던 것입니다.


생명의 질서, 알고리즘


Rhino Grasshopper 사용한 3D Model

생명의 질서는 미시적 세계부터 거시적 세계까지 나타나는 형태적 특징과 수학적 규칙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세포 분열, 산호초의 성장, 식물의 가지 구조, 혈관과 신경망의 패턴, 은하의 나선 등은 모두 어떠한 규칙을 통해 복잡한 구조를 형성합니다. 인간은 이러한 자연 속에서 피보나치수열, 프랙털, 로지스틱 곡선 등 수학적 패턴들을 발견하고, 이를 바탕으로 알고리즘을 구성해 왔습니다.

L-시스템은 식물의 성장원리를 모방하여 나뭇가지나 해조류 형상을 생성할 수 있고, 반응-확산 모델은 동물의 피부 무늬와 같은 패턴을 시뮬레이션합니다. 에이젼트 기반 시스템은 개미 군집 경로 형성, 세 때의 군무처럼 단위개체들이 간단한 규칙에 따라 움직이며 집단적 행동을 만들어내는 원리를 구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재현된 알고리즘은 위 그림과 같이 컴퓨터(라이노 그라스호퍼 툴)를 통해 시각적 결과물로 재생산될 수 있습니다. 생물학적 질서는 수학으로, 수학은 시뮬레이션으로, 시뮬레이션은 실제 하는 형태와 공간으로 재생산되며 도시, 건축, 예술, 사회 시스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습니다.

생물학적 현상에서 드러나는 구성 방식과 질서는 우리에게 깊은 통찰을 줍니다. 우리는 자연에 내재한 보편적 질서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복제하며, 새로운 형태로 재구성합니다.

이는 생명이 자기 조직화하고 스스로를 재생산해나가는 원리와 같습니다. 생명은 단지 살아있는 상태를 넘어서, 질서가 스스로를 낳는 방식 그 자체입니다.


질서에서 혼돈으로


삶이란 어쩌면, 생명체의 시스템과 같이, 무질서 속에서 매 순간 스스로 질서를 짓는 예술일지도 모릅니다. 예측을 빗나가는 감정 변동,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프로젝트, 예고 없이 찾아오는 만남들. 우리는 그런 순간마다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계획을 세우며, 새로운 인연을 맞이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매 순간 변화에 반응하며 자신만의 질서를 심어갑니다.

이렇듯 혼돈 속에서 피어나는 질서는 단순한 순간들의 나열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재조직하는 내면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나는 단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도록 매 순간 나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생명이 복잡한 제약 회로 안에서 스스로를 조직하듯이, 내 삶도 자가 촉매 집합 고리들로 이루어지는 시스템입니다. 빛이 들면 눈을 뜨고, 고요가 오면 눈을 감고, 마음이 흔들리면 한걸음 멈춥니다. 내 안의 호기심이 책을 펼치게 하고, 책 속 문장이 또 다른 생각을 낳고, 그 생각은 다음 글을 쓰게 하고, 그 글은 누군가와 연결되고, 그 연결은 다시 나를 바꿉니다. 삶은 스스로를 위한 연료를 만들어내는 순환입니다.

이렇게 삶이 질서를 짓는 일이라면, 죽음은 그 질서의 해체일지도 모릅니다. 생명이라는 정교한 질서의 고리는 천천히 풀어집니다. 세포는 분해되고 에너지는 흩어지면 나는 더 이상 나를 구성하지 않습니다. 이 해체는 형태의 해방입니다. 무질서로 흩어지는 순간, 생명이 만들어내는 질서는 또 다른 생명에게 작은 씨앗이 됩니다. 질서는 사라지지 않고 전파됩니다. 사유는 다음 정신에, 감정은 관계의 기억 속에 머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며, 우주 안의 어딘가에 소리 없는 반향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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