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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인간 탐구 도감

by 이롬


"어제는 끝났고, 내일은 멀었고, 오늘은 아직 모른다."


드라마 <미지의 서울>의 주인공 미지는 하루의 시작을 이렇게 되뇌입니다.


우리는 늘 현재를 산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지금’이라는 말을 꺼내는 순간, 그것은 이미 지나가버린 찰나입니다. ‘지금’은 말해지는 순간 ‘과거’가 되고, '미래'는 언제나 도달 불가능한 지평선처럼 뒤로 물러섭니다. 우리는 실제로 ‘현재’를 산 적이 없습니다. 그저 지나간 순간을 기억하며, 도래하지 않은 순간을 기대하거나 두려워할 뿐입니다.

아날로그시계는 원을 그리며 시간을 흘려보내고, 디지털시계는 초 단위로 세계를 잘라냅니다. 하지만 우리 내면의 시간은 그 어떤 기계보다 기묘합니다. 불안에 잠기면 1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지고, 몰입에 잠겼을 땐 한 시간이 1분 같습니다. 객관적이라 믿었던 시간은, 실은 철저히 주관적인 감각 위에 서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간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실제로 존재할까요, 아니면 인식의 허상에 불과할까요?


과학: 시간은 실재하는가


과학은 오랫동안 이 질문을 두고 씨름해 왔습니다. 아이작 뉴턴은 시간과 공간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모든 사건은 절대 시간 속에서 일어납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시간은 결코 모든 존재에게 동일하지 않습니다. 빠르게 움직이거나 중력이 강한 곳에서 시간은 천천히 흐릅니다. 시간은 더 이상 독립적 실체가 아니라 관계적이고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양자역학은 시간에 대한 이해를 더욱 흔들어놓았습니다. 미시세계에서는 사건 간의 확률만이 존재할 뿐, 시간의 선형적 흐름은 의미를 잃습니다. 일부 물리학자들은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이탈리아 이론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1956~)는 “우리는 사건(event) 간의 관계를 시간이라 부른다”라고 말합니다.


현대 물리학의 가장 급진적인 시각 중 하나는 블록 우주(block universe) 개념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는 동일하게 존재하는 4차원적 시공간 덩어리 안에 고정되어 있으며,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의 흐름은 단지 의식의 착시일 뿐이라는 주장입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시간 속에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구조물 안에 고정된 존재로서 존재합니다.

a6012267ba2837e828def60636730ecf.jpg 영화 <어라이벌(2016)>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 어라이벌(Arrival, 2016)은 이런 블록우주의 세계관을 보여줍니다.

영화는 어느 날 지구에 도착한 12개의 외계 비행체와, 그들과의 의사소통을 시도하는 인간의 이야기를 그립니다. 언어학자 루이스 뱅크스는 미군의 요청으로 외계 존재인 ‘햅타포드’와의 소통을 맡게 되며, 그들이 사용하는 기호 언어를 해독하기 시작합니다. 이들의 언어는 선형적 문장이 아닌, 시작과 끝이 동시에 존재하는 원형 형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루이스는 이 언어를 깊이 익히는 과정에서 점차 시간을 직선이 아닌 동시적이고 전체적인 구조로 인식하게 됩니다.

이제 그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과거와 미래를 따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미래를 "보고" 있었습니다. 아니, 보다 정확히는, 그녀의 현재는 미래를 이미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베르그송과 들뢰즈: 시간은 사건이다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1859~1941)은 시간의 진정한 본질은 시계로 측정할 수 없는 ‘지속(durée)’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시계의 시간은 균질하고 나열 가능한 숫자일 뿐이지만, 우리의 내면은 기억과 감정, 예감과 회상의 물결로 이루어진 질적인 흐름을 경험합니다. 이 지속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스며드는 시간들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1925~1995)는 이 사유를 계승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재’는 단순한 순간이 아니라 조금 전의 과거와 곧 다가올 미래를 함께 묶어 인식하는 흐름입니다. 미래에 일어난 일은 과거의 의미를 바꾸기도 합니다. 시간은 되돌아오면서도 항상 다르게 변화합니다. 우리 자아도 고정된 자기 동일적 존재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차이와 변화로 구성된 시간의 생명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만들어내는 사건으로서 살아가는 것일지 모릅니다. 존재란 ‘있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는 것’입니다.


불교 : 찰나생찰나멸(刹那生刹那滅)


불교에서는 앞서 언급한 ‘지속’하는 시간의 관점과 조금은 다릅니다. ‘찰나생찰나멸(刹那生刹那滅)’, 모든 존재는 매 찰나에 생성되고 소멸합니다. 우리는 고정된 나, 고정된 대상이 있다고 믿지만, 이는 단지 지속의 환상일 뿐입니다. 눈앞의 사과, 마음속의 기억, 사랑의 감정조차도 매 순간 생겨났다가 사라집니다. 우리는 지속성을 경험하지만, 이는 인식의 흔적이 이어져 보이는 것일 뿐입니다. 실상은 매 찰나마다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잡을 수 없는 찰나의 흐름입니다. 붙잡으려는 순간, 그것은 이미 지나갑니다.


우리는 왜 허상의 시간에 고통받는가


시간은 실체가 아니라 허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허상의 지배아래 살아갑니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정체성을 구성합니다. 기억은 과거의 시간들을 현재 속에 붙잡아 놓고, 현재를 과거로부터 규정하도록 만듭니다. 동시에, 우리는 기대와 불안을 통해 미래를 허구화하고 그 안에 자아를 투사합니다. 현재는 항상 과거에 붙잡히고, 미래에 끌려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끝내 살지 못합니다.


시간은 곧 유한하며, 죽음의 그림자를 동반합니다.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고, 나무가 자라 고목이 되듯이, 시간은 모든 존재를 부식시킵니다. 인간은 그 유한함을 자각하는 동물이며, 그래서 고통받습니다. 시간이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를 해방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더 깊은 불안을 부릅니다. “실재조차 아닌 것에 내 삶이 흔들린다”는 감각.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허상임을 자각하는 순간이야말로 해탈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시간의 해체, 존재의 해방


우리는 시간을 살아간다고 믿습니다. ‘지금’이란 감각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어디에 머물러 있는 것일까요?

불교는 말합니다. “모든 것은 공(空)하다. 고정된 존재는 없다.”
시간조차 그렇습니다. 우리가 시간에서 벗어나는 길은 “지금 이 순간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지금이 끊임없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직면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사실, 지금이라는 찰나마저 허상이라는 사실을 직면할 때, 우리는 오히려 해방됩니다.

‘지금’이라는 감각은 생명이 지닌 질서의 좌표이며, 죽음이 이 허상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유일한 길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삶을 살아가는 동안, ‘지금’이 허상임을 자각하는 그 순간만큼은, 인식은 허상과의 거리를 만들어냅니다. 그 거리는 잠시나마 우리를 가볍게 만들어줍니다.

시간도, 나도 없는 텅 빈 찰나. 그 빈자리에야말로, 진정한 자유가 깃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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