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초등시절 '밤서리 추억'을 소환하다
지난 주말 경기도 '양주 불곡산'을 찾았다. 높은 산은 아닌데 우리 부부는 산에 오르기보다 산 주변의 '둘레길 코스'를 거닐기로 했다. 이제는약한 무릎 관절 때문에 산행보다는 걷기를 좋아한다.
둘레길은 간간이 데크와 계단을 설치해 노약자를 배려한 시설이 많았다. 불곡산 근처 성당의 신부님은 초행길인 나에게 양주시가 산 중심으로 9킬로 되는 둘레길 코스를 조성했다며 은근슬쩍 자랑했다.
우리 같이 체력이 약한 사람들은 인위적인 시설이 있어도 둘레길 코스를 선호하는 편이다. 어쨌든 산행을 하면서도 주변에 또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건 환영할 일이다.
둘레길 샛길에서 본 밤나무
그런데 웬걸, 둘레길에서 방향을 읽어버리고 말았다. 안내판대로 따라갔는데 그만 샛길로 접어든 것이다.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다행히 많이 벗어나지 않아 제코스로 찾아가기는 어렵지 않았다.
되돌아가는데 발밑에 '밤톨'이 보였다. 밤송이가 벌어지면서 땅에 떨어진 것들이다. 한두 개를 주웠는데 제법 튼실했다. 윤기가 있는 것으로 봐 방금 떨어진 것이다. 이것을 아내에게 보여주니 무척 반가워한다.
우리가 잘못 접어든 곳은 밤나무들이 있는 곳이다. 나무 밑에는 벗겨진 밤송이들이 천지다. 나무 위나 땅바닥에 성한 밤송이는 거의 볼 수 없었다.
밤을 받아 든 아내는 둘레길 걷기를 포기하고 밤을 줍자는 기세다. 아내는 마치 보물 찾기를 하듯 정신없이 밤을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밤은 거의 없다. 밤들은 낙엽 덤불에 술래잡기하듯 숨어있다. 이는 인간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자연의 섭리'인 것처럼 보인다.
밤은 생각보다 적었다. 바닥에 떨어진 밤을 간혹 줍기도 했지만 대개 썩었거나 먹을 수 없는 쭉정이들이다.
아내가 30여분 동안 주운 밤은 10여 개 될까 '초라한 수확'이었다. 하지만 아내 얼굴은 둘레길에서 보물을 찾은 것처럼 행복해 보였다.
잊고 지낸 '밤서리' 추억 떠올라
우연히 밤나무를 보니 잊고 지냈던 추억이 살짝 떠오른다. 경기도 마석에서 다녔던 초등학교 3학년 시절이다. 학교 뒤 좀 떨어진 곳에 소위 '밤나무골'이 있었다.
나는 한 학년 아래 옆집 아이와 밤나무골에서 밤서리를 하곤 했다. 나무에 올라 내가 밤송이를 떨어뜨리면 그 애는 밤송이를 한데 모으는 일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10미터 이상 되는 밤나무에 오르는 것 자체가 무서울 텐데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났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기억에 생생한 것은 밤송이를 까는 작업이다. 서둘러 까고 밤을 챙겨 하산해야 한다. 늦거나 주인에게 들키면 모든 걸 뺏기고 매도 맞을 터였다.
밤송이를 두 발로 밟고 막대기로 꾸욱 누르면 광채를 띤 밤이 튀어나오는데 어린 눈에도 아름답고 신기했다. 사실 이 까는 재미가 먹는 재미보다 큰 추억으로 남았다.
서리한 밤을 둘이 공평하게 나누고 신발주머니에 담아 집에 오면 어머니가 대견하다며 머리를 만져주었다. 어머니는 "어디 밤인데 맛있게 잘 생겼구나!"라고 말했다.
어릴 때 밤서리는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추석 전후 밤 따는 어른들을 자주 보면서 절로 터득한 것이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밤서리하는 날 망을 보고 있던 밤나무 주인이 "도둑이야 이놈들" 소리치자 나는 놀라 나무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크게 다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생포된 나와 이웃 동생은 다시는 절대 훔치지 않겠다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풀려났다. 그러나 이후에도 서리는 몇 번 더 있었다.
한편 지난 달 아내 고향 친구가 밤을 보냈는데 그 양이 상당했다. 친구 부부가 자생하는 밤을 종일 고생하며 주운 것이다.
불곡산에서 주운 밤을 생각하니 친구가 보내준 밤 선물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나는 아내에게 내 감사함도 친구에게 대신 전해달라고 특별히 부탁했다.
찐 밤을 반으로 잘라 커피 스푼으로 파 먹으니 달다. 나는 족히 10개 이상은 먹을 수 있었다. 아내 또한 그 이상으로 밤을 맛있게 먹었다.
아내가 말했다.
"친구가 보낸 밤이 특히 맛있는 건 친구의 정성 때문인 것 같다"
이에 나는 어릴 적 밤나무 추억을 소환했다.
"나는 솔직히 밤을 먹는 재미보다 까는 재미가 더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