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맛 없을 때 김치볶음밥을 대령합니다
애들이 초등학교 1, 2학년이던 30여 년 전 일이다. 놀이공원에서 노는 애들을 데리고 귀가하는 길이었다. 집까지 거리는 차로 3~40분 거리, 집에 가서 저녁밥을 먹을 참이었다.
그러나 사고가 났는지 교통체증으로 차들은 오도 가도 못했다. 그렇게 길에서 2시간 이상 허비하고 말았다.
지친 애들은 자다 깨 배고프다고 아우성이다. 시간은 벌써 저녁 8시를 가리켰다. 그때는 외식할 만한 변변한 음식점이 많지 않았다. 중국집에 들를 여유도 없었다.
9시가 넘어 집에 도착한 아내와 아이들은 거의 탈진한 상태, 나도 피곤했지만 무언가 식구들이 먹을 것을 고민했다.
불현듯 신김치가 생각 나 볶음밥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냉장고에는 김치밖에 없었다. 요즘말로 '냉파'를 시도했다.
이때 내가 허둥지둥 만든 것이 '김치볶음밥'이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김치를 대충 썰고 '찬밥'을 넣어 볶은 것이다.
식탁에 프라이팬의 김치볶음밥을 올렸다. 가장으로서 할 일을 다했다는 뿌듯함과 함께 반응도 괜찮을 것이라는 막연한 자신감이 충만했다.
이전에 김치볶음밥을 직접 만든 적이 없는 내가 요리를 다 하다니 신기했다. 잠시 과거 우리 집 풍경을 소환해본다.
어릴 적 우리는 김치만으로 식사한 적이 많았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김치를 볶으면 최고 반찬이었다. 식용유가 고기 대용이었다.
여기서 '김치누룽지'가 탄생했다. 프라이팬에 남은 김치에 밥을 올리면 누룽지가 눌어붙는데 이게 별미였다.
누룽지가 한 단계 진화한 것이 김치볶음밥이라 할 수 있다. 나중에 사정이 조금 나아져 소시지를 추가하거나 밥에 계란 후라이를 올려 모양을 냈다.
자장면을 기대한 애들은 김치볶음밥에 실망하는 눈치였다. 아내 표정은 비슷했다. 하지만 시장이 반찬이라고 한번 맛을 보더니 상황은 달라졌다.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사실 김치볶음밥은 어린 애들이 좋아할 리 없었다. 마음은 급하고 허기를 달래기 위해 뚝딱 만든 음식이었다.
그러나 입으로 체득한 경험은 추억으로 오래 남는 법, 어느새 김치볶음밥은 우리 집 정체성을 대표하는 음식이 됐다.
다 자란 애들도 배고프다 싶으면 내가 해준 김치볶음밥을 떠올리며 만들어달라고 농을 치기도 한다.
요리법은 단순하다. 양파와 파를 송송 썰어 식용유에 볶다가 자잘하게 썬 신김치를 넣어 잠시 볶는다. 여기에 먹을 만큼 밥을 넣고 고루 비비면 그만이다.
나는 가끔 김치 대신 깍두기를 잘게 다져 볶음밥을 만드는데 색다른 맛을 연출한다. 조금 담백하고 시원하다고 할까. 일명 '깍두기볶음밥'이다.
입맛이 없고 기름기가 당길 때 김치볶음밥을 대령하면 실수하는 법이 거의 없다. 요새는 건강을 생각해 식용유 대신 올리브유를 사용하고 당근을 추가하기도 한다.
어제 오랜만에 점심으로 김치볶음밥을 만들었다. 한술 떠본 아내가 말했다.
"역시, 당신이 만든 김치볶음밥은 최고"
답은 정해졌다. '누가 밥 해주면 좋겠다'라고 노래를 부르는 아내가 남편이 하는 밥이 맛있을 수밖에.
그거 아시는가, 수많은 볶음밥이 있지만 식당에 김치볶음밥 메뉴가 드물다는 사실, 개인적인 견해지만 손님에게 '찬밥'을 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집 김치볶음밥은 대를 이어온 '추억음식'이다. 간단하고 소박한 음식의 맛을 애들도 기억하니 3대로 이어질 것이 분명하다.